교육 이야기

섬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나요?

닥터 양 2022. 4. 2. 08:38

섬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나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제가 이 수업을 들어야 할 이유를 설명해 주시죠.” 어떤 학생의 요구에 교수는 매우 당혹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느닷없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또 그런 것을 일일이 설명해줘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강의의 취지와 내용을 설명하면 그만이었는데 개별적으로 강의를 들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설명까지 해 달라니 그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죠.

  그의 질문에는 과잉친절을 당연시하는 심리가 깔려 있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받아온 과도한 배려와 친절이 그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해서 답을 찾는 노력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손에 쥐어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자신을 당연시 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애매하기 이를 데 없는 문제입니다. 과연 그의 요구는 객관적으로 합리적인 수준일까요?

  MZ세대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어른들의 배려가 부족해서 그들이 힘들다고 합니다.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워 고통받는 그들을 위해 통크게 기성세대가 양보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사회에 진출하는 사람들이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들에게 적응하라는 듣도 보도 못한 주장이 마치 금과옥조처럼 힘을 얻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들었던 이야기 사회생활 잘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하는 이 주장에 우리는 당혹스러워야 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무슨 점령군이라도 되나요?

  그 이유 또한 해괴하기조차 합니다. 그들은 특별한 세대이다. 과거에는 없었던 새로운 세대이고 일본식 표현을 빌자면 새로운 인류’(新人類)라는 것이지요. 세대차라는 것은 보편적이어서 약 4천 년 전의 바빌론 왕국의 함무라비시대에도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상식이 되었습니다. “요즘 젊은 애들 버릇없다고 한 그들의 탄식은 우리에게도 예외는 아니니 말이죠. 그런데 무슨 근거로 전혀 차원이 다른 세대가 등장해서 세대차도 각별하다는 주장이 나올까요?

  세대차로 보면 86세대만큼 세대차를 느끼며 살았던 세대도 드물 것입니다. 대학이 어느 정도 대중화되었고 고등학교 졸업은 이미 의무화되다시피 한 첫 세대 그러기에 민주화에 유난히 민감해서 민주화세대라고까지 불린 세대 그에 비해 부모세대는 초등학교 졸업이 수두룩하고 고등학교 졸업은 고학력자 취급받던 세대였으니 그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였습니다.

  민주주의를 비롯한 각종 진보적 사상에 본격적으로 노출된 세대이기에 86세대와 기성세대 사이에는 건너기 어려운 강이 놓여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 증거로 86세대까지의 투표 성향과 그 이후의 세대의 투표성향 사이에서 드러나는 확연한 차이를 들 수 있습니다. 지난 대선에서도 4, 50대 세대는 철옹성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페미니즘의 열풍에도 4,50대 여성들은 제3의 정당으로 지지대상을 바꾸려고 했던 2,30대 여성과 달리 견고히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일관성을 과시했습니다. 그녀들에게는 페미니즘보다 민주화가 더 중요하였던 것이죠.

  하지만 86세대는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실은 저도 포함이니 우리라고 해야 할까요?)사회진출을 앞두고 많은 고민을 하였지만 사회여 변하라는 식의 당돌함은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MZ세대에게 그런 당돌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그러한 당돌함을 가지고 사회를 변화시킬 용기가 있었다면 도리어 MZ세대론은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혼자 끙끙앓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그들이 모습에 속된 말로 기성세대가 알아서(?) 기고 있다고 봐야 하죠. 진보주의에 치우쳐 인간의 개인적인 노력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고 있는 86세대의 함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적폐야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이죠.

  MZ세대론 뿐이겠습니까? 과거 약자라고 분류되던 사람들의 태도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피해자야. 그러니 배려해(양보해)” 이런 주장은 그 자체로는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 환경이 달라졌어도 여전히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면 과연 정당하다 할 수 있을까요? 이미 성인의 연령에 도달한 아이(아니 성인이)가 여전히 자신은 어리다며 보호와 배려를 요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까요? 한술 더 떠서 그럼에도 권리는 고스란히 갖겠다는 계산도 잊지 않고 말입니다. 보호는 그대로 권리는 어른 수준 하지만 의무는 여전히 어린 아이 수준 이렇게 되고 있다면 분명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아이러니하지만 이 모든 문제의 책임은 바로 86세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MZ세대를 길러냈고 지금도 그들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상대하는 것이 바로 86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저만 해도 80년대 학번에 60년대생이고 저의 아이들은 셋 다 2030세대이니 딱 그 조합입니다. 우리가 보여준 과잉배려 잘못된 가정의 민주화의 잘못된 결과가 오늘날 MZ세대론이라는 괴물을 낳았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배려와 가정의 민주화는 백번 생각해도 옳지만 그것을 보완할 조치는 소홀히 하고 오로지 배려와 민주만 생각하며 달리다가 이 지경을 만들어 놨으니 깊이 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식에게만 매달려 과잉보호에 힘쓰느라 부모님들에게 불효를 저질러온 죄를 치루고 있다고 하면 지나치다고 하시겠습니까? 민주화를 이유로 권위에 대한 도전을 서슴지 않아 효를 권위주의의 상징처럼 여겨 적폐청산이라도 할 생각으로 부정하고 눈은 오로지 자식에게만 가 있었던 것을 인정하십니까? 마치 그것이 진보의 의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MZ세대론의 시대에 예수님의 섬김의 가르침은 무용지물이 아니라 해로운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전에 섬기던 교회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은 윗사람의 권위가 확실하게 자리 잡은 상태에서나 그 가치가 있다저로서는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참으로 명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윗사람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윗사람에게 아랫사람을 섬기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이나 다름 없죠. 가뜩이나 윗사람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는 세대가 섬김까지 받게 된다면 어마 무시한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배려가 지속되면 권리가 된다저는 이 말을 제 아들에게 들었습니다. 그는 이런 문제에 민감하였는데 정작 자신은 MZ세대론의 신봉자이기도 합니다. 기묘한 조합이죠? 아무튼 과잉배려로 물들어 뼈속 깊숙이까지 자신들이 배려를 받는 것을 당연시하는 세대 그리고 그와 유사한 자칭 피해자’ ‘약자로 가득한 시대에 배려는 섬김은 부당한 권리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칠까요? 배려를 고마워하기는커녕 당연시하는 이 패악한 시대에 말입니다.

  별로 가능해 보이지 않지만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기성세대가 기성세대답게 권위주의와 기득권을 제대로 발휘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MZ세대를 비롯한 자칭 피해자’ ‘약자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기득권자들 강자들의 힘을 경험해야 자신이 이제까지 얼마나 큰 배려를 누리며 살아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고 그것이 배려에 대한 고마움으로 나타나지 않을까요?

  어른과 아이, 성숙한 인간과 미숙한 인간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해 봅시다. 어리고 미숙할 때는 자신은 보호와 배려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른이 되고 성숙해지면 그 보호와 배려를 실은 자신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호와 배려의 객체에서 주체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객체에 머물겠다고 우긴다면 영원히 그는 아이 미숙한 인간으로 머물러 버릴 것입니다. MZ세대론적 배려론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당연시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언제까지고 객체로 머물겠다는 인간의 약점을 그대로 인정해 버림으로써 그것을 실제 상황으로 확정지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상황을 보시면 어떤 생각을 가지실까요?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에 머리를 감싸 쥐실까요? 권위가 서슬퍼랐던 시대에 준 가르침이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진 시대에 그 가치를 잃고 도리어 해가 된다는 엄연한 현실 앞에 인자가 온 것은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라.”라고 스스로 가르침의 180도 전환을 시도하시게 될까요? 달리 뾰족한 수가 있을까요?

  너무 불경스럽다고요? 천만에!예수님 자신이 새로운 시대 즉 신약시대 은혜의 시대를 여시면서 구약의 규정에 도전하셨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복음도 시대에 따라 새롭게 해석하고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붙잡아야 할 말씀이 다르다는 식으로 차별을 하는 판에. 성경 말씀이라고 모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바리새파적 사고 아닙니까? 안식일에 치유사역을 하시면서 양이나 소도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이라도 구하는데 하물며 사람을 그대로 두겠는가 라며 분노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이러한 시도를 제대로 하신 분이라고 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엄청난 자기모순에 빠진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 분은 성경은 무조건 옳고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입에 침을 튀기면서 말합니다.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면 자신에게 불리한 가르침을 이건 신앙이 어린 사람에게나 맞는 것이다라고 도피를 하더군요. 그 이야기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성경이 무조건 옳고 그러니까 따라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과 완전히 모순된 주장 아닙니까? 이것이 이 분만의 문제는 아니지요.

  성경을 글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분들에게 꼭 묻고 싶네요. ‘서로 다른 가르침은 어떻게 합니까?’ 오늘의 현실과 너무나 다른 가르침은 어떻게 수용해야 합니까?’라고 말이죠. 엄연히 여성들이 교회에서 가르치고 설교하는 시대에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가르침을 그대로 수용해 여성들에게 목회자는 물론 주일학교 교사도 다 그만두게 해야 하나요? 그런데 구약에는 드보라 같은 여선지자도 있는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이 정도면 제가 불경스럽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시겠습니까? 텍스트를 콘텍스트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시대를 떠나 바른 자세이니 제가 하고자 하는 시도를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지금의 시대에는 로마서 13장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를 더 강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섬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타이틀의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섬김을 받기 위해서는 섬기는 사람들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 섬김이 고맙고 그런 섬김을 하시는 분들에게 더 큰 존경심을 가질 수 있겠지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조건 하에서만 제대로 된 가치를 가집니다. 지금처럼 섬김을 당연시하는 시대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클 수 있는 것이지요. (물론 완전히 무용한 가르침은 결코 아니니 오해하시지 마세요)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섬김에 대한 생각과 자세를 바르게 갖음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의 가치를 살릴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