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정죄는 여호와의 몫입니다.

닥터 양 2022. 3. 30. 12:27

정죄는 여호와의 몫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다. (사무엘 상 2412-13)

 

  이 세상에 넘치는 악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누구나는 아닙니다. 대부분은 무관심하며 그저 하루하루 살기에 바쁘지만 적어도 신실한 크리스천이라면 적어도 한두 번은 세상을 뒤덮고 있는 죄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죄악을 그대로 두시는가?’ 라는 고민을 하지 않은 크리스천이 있다면 그는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반 사람도 할 수 있는 생각이니까요.

  그런 우리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 정죄하지 말라입니다. 다른 말로는 판단하지 말라 재판관이 되지 말라. 하지만 악을 방치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아니 정죄하고 판단하고 재판하지 않고 내 버려두면 세상이 악으로 가득할 텐데 그게 말이 되나? ’ 아닌 말로 세상에 판단 재판 정죄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법천지가 될 것 같지 않습니까? 법이 있어도 이 모양인데 그것마저 사라지면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하지만 그럴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성경에서 정죄하지 말라 는 것은 세상의 모든 정죄나 판결을 멈추라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법을 어기는 사람들에 대한 재판이나 정죄는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걸 하나님이 모르실 리 만무하겠죠. 하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지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일을 구하라라고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보면 맹목적 이상주의자가 아니시고 현실적인 이상주의자 같습니다.

  다윗이 사울에 대한 호소에서도 우리는 그런 것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울은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자결을 하지는 않으며 이방인이나 동족이나 누군가에게 살해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아합왕의 경우는 동족에게 살해되어 그가 탄 전차에 피가 흘러내려 그것을 씻자 그 핏물을 개가 핧아 먹게 되었지요. 어느 것이든 방법은 달라도 하나님의 개입이었습니다.

  결국 다윗의 선언은 이루어진 셈입니다. 그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원수를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가 손을 들어 사울을 제거했다면 우리가 아는 위대한 신앙인이며 옹인 다윗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수에 대한 문제조차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다윗이기에 그의 모습은 우리가 존경해 마지 않는 것으로 변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골리앗 앞에서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이 선언은 그의 신앙이 얼마나 신실한가를 잘 말해줍니다. 신앙의 기본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답은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 싶어 기독교신앙을 거부합니다. 타 종교 중에 적어도 고등종교 중에 자신의 삶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있을까요? 대표적 고등종교 불교는 인간 자신의 노력에 의해 누구나 부처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명백한 인본주의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권력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합니다. 세상이 모든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로마서에서 적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궈위는 특정 권력자나 정치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질서를 잡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권위 그 자체를 말합니다. 왕정이라면 왕 공화정이라면 대통령이나 수상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정권이 교체되어도 권위는 여전히 유지되어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마치 문재인 정부가 물러나고 윤석렬 정부가 들어서는 것처럼 정권은 얼마든지 교체되어도 좋지만 정부의 권위는 유지되는 것처럼.

  그런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권위 권력기관들은 오늘도 정죄와 판결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정죄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 고 하여 여러분이 법원이나 검찰 경찰에 찾아가 항의시위를 하거나 판단하지 마세요라는 식의 조언을 줄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정죄나 판단을 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정실이나 뇌물 등에 의한 판단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결국 하나님이 말씀하신 정죄란 사적제재에 가깝습니다. 만일 개인이 사적제재를 하게 되며 어떻게 될까요? ‘도피성이라는 말을 아실 겁니다. 이것은 고의가 아닌 실수로 사람을 죽이거 다치게 한 사람들이 도피해 숨을 곳을 말합니다. 왜 이것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사람이 피해를 입으면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이를 막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비록 실수라고 하나 남에게 살해당했다면 아 이건 실수지? 이해하자라고 하며 자제를 하겠습니까? 어려습니다. 유명한 함부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도 사실은 가해자가 과도하게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을 막기 위한 규정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도피성는 사적제재의 근본적인 문제를 감안한 하나님의 신의 한수라 하겠습니다. 가족의 피를 본 유족이 느낄 분노를 잠재우기 어려우니 가해자를 도피시키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다시 돌아오게 한 도피성은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인간의 판단이 얼마나 감정적이고 어리석을 수 있음도 말해줍니다. ‘네가 과연 가장 공정하고 정의롭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을 하나님이 던지시는 겁니다. 물론 답은 아니요입니다. 우리는 공의롭게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면 당신이 알아서 세상의 권세나 권위 아니면 다른 힘을 이용해서 판단하고 정죄한 결과를 실현시켜 주십니다.

  ‘위대한 개츠비’(피츠제럴드)의 서문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네가 남을 비판하고 싶다면 그가 너에게 있는 유리한 점이 없는지를 생각하라겉보기에는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기가 막힌 사연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는데 알고 보니 BA의 가족에게 말도 못할 잔악한 행위를 했다고 하면 그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 좀 더 신중해 질 수 있겠지요? 범죄라기보다는 복수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연이 있을 수도 있는데 함부로 판단해 떠들어대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지요.

  사적제재를 하지 말라고 해서 법적인 제재조차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적제재는 과거 법적 체계가 허술하여 그것이 아니면 피해를 만회할 길이 없던 시절에 일반화된 자기구제방식입니다. 그 시절에는 오히려 그것이 더 바람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에 사적제재는 피해야 할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율법에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규정이 있는 것처럼 엄연히 죄에 대한 처벌규정이 들어 있으나 그 이전에는 사적제재외에는 하나님의 제재말고는 자신을 지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사적제재가 행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지신의 수하 300명을 데리고 조카 롯을 구한 사건은 바로 그러한 사례라 할 것입니다. 하물며 오늘날처럼 법과 질서가 잡힌 사회에서 사적제재는 매우 위험한 구제방법이니 금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의 사례를 다시 살펴봅시다. 그가 만일 사울을 살해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왕은 곧 하나님의 대변자이기도 합니다. 로마서에 의하면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역할을 하지요. 사사기에는 왕이 없어 각자 소견대로 살았다는 말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죠. 만일 왕에 대한 사적제재는 곧 반역이며 그것은 곧 공의에 대한 도전이 됩니다. 그런 것이 허용되기 시작하면 세상의 질서를 어떻게 바로잡겠습니까? 사람마다 정의의 기준이 다르고 또 사람의 악함은 불의조차 정의라고 바꿔놓을 정도인데 말입니다. 서로가 정의를 주장하며 왕을 죽이고 그로 인해 국가는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마치 중국이나 일본의 전국시대가 그렇듯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갖가지 타락을 범할 때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그 이방인들이 의롭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곧 이어 그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 쫓겨가게 됩니다. 물론 이방인들만 쓰시는 것은 아닙니다. 르호보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솔로몬의 죄악을 정죄하기 위해 여로보암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쓰셔서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분열시키신 사례처럼 동종을 들어 쓰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역시 북이스라엘의 정의로움을 의미하지는 않았죠.

  영화 벤허에서 주인공 벤허는 복수를 위해 노예신세에서 꿋꿋하게 살아가지만 그가 복수를 이룬 뒤에 찾아온 것은 허탈감 뿐이었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여인 에스더는 그에게 마치 메살라처럼 보인다고 하며 눈물을 흐렸습니다. 메살라는 복수의 대상인 벤허의 친구로 복수에 대한 열망이 그를 악하게 만들었음을 의미합니다. 남의 얼굴을 피를 뿌리려면 먼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고 합니다. 정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택하여 할 것입니다. 정죄에 의한 미움으로 자신을 괴롭히기보다 용서하는 마음으로 대할 때 여러분 자신이 평강을 누릴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정죄함에서 벗어나 평강을 누릴 수 있기를 에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