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의 주권

닥터 양 2022. 3. 29. 09:59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의 주권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 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사무엘 상1747)

 

  예전에 반공교육이 한창이었을 때 우리는 북한이 김일성이라는 개인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행사에서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김일성 수령동지의 덕분에 이렇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외치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치 교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같이 그들은 열광적인 모습을 보였기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당시에 북한에서 이루어진 일들에는 반드시 김일성의 은덕이니 은혜니 하는 말을 덧붙혔다고 합니다. 지금은 김정은의 이름이 함께 하고 있을까요? 확실히 모르지만 김정은이 물려받은 후계자라면 김일성은 북한의 체제를 전부 만든 사람이니까 어느 정도 그러한 외침이 설득력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북한에서는 창조주와 같은 위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유학할 당시에 일본 기자가 북한 주민과 인터뷰를 할 때도 그런 모습은 잘 나타났습니다. 김일성이 아직 살아 있었지만 이미 80이 넘은 시기라고 기억하는데 젊은 여성이 자신의 꿈은 김일성 수령 동지의 영도하에 조국의 건설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들에겐 정말이지 김일성은 살아있는 신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에 달고 사는 것처럼 그들의 입에서는 김일성의 이름이 끊이지 않고 언급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둘 사이에 모든 것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요약하고 싶습니다. 북한에서는 고문과 죽음이 두려워 김일성의 이름을 숭배하지만 우리 기독교에서는 고문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숭배하고 있다고. 그들의 믿음은 강요된 것이고 우리의 믿음은 충심에서 우러난 것이며 그러기에 위기의 상황이 오면 그 차이는 극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자신이 마음 깊이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숭배하는 믿음이 존재하는지는 남은 물론 자신도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막상 진심을 드러낼 상황이 되어야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죠.

  예전에 역사 드라마에서 여성들이 전쟁이 나서 자신들이 적에게 유린될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자신은 차라리 자결을 할 지언정 절대 정조를 지키겠다고 한 여성들은 도리어 그렇지 못했고 자신이 없다고 한 여성은 과감히 목숨을 버리더군요. 드라마이지만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실은 상황이 닥쳐봐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드라마가 보여준 것인데 실제의 역사도 그것을 증명합니다. 병자호란에 의해 끌려간 여성들의 대부분이 정조를 지키지 못한 채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물론 저는 그들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과 행동의 차이를 강조하려고 이 사례를 들었습니다. 여성의 정조를 묵숨보다 소중히 여겨 사대부 가정의 여성들은 모두 은장도를 가슴에 품고 살았던 조선시대에 조차 그 믿음을 지키기는 어려웠던 것이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그 진실은 상황이 닥쳐 보아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세 번 놀란다는 농담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천국에 갔다는 사실에 놀라고 또 천국에 꼭 갈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고 반대로 절대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천국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의 중심은 알기가 어려우며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러기에 예수님은 아예 판단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보인 모습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가직 고 있었는지를 극명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위대한 사사이자 제사장인 사무엘이 기름을 부어주기 위해 갔을 때 이미 어느 정도 드러났습니다. 외모가 수려한 그의 형들에게 기름을 부으려던 사무엘을 하나님은 만류하였고 결국 막내이자 가장 왜소한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하는 유명한 말씀과 함께.

  그런 다윗이기에 그가 골리앗을 보았을 때의 태도는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모두가 골리앗의 외모가 주는 공포에 떨며 전의를 상실한 채 그의 모욕을 견뎌냈지만 다윗은 곧 바로 전의를 불태우며 사울왕의 앞에 나아갔습니다. 역시 그의 외모의 열악함을 염려하는 사울왕에게 자신이 양치기를 하면서 사자와 곰 같은 맹수들에게서 양들을 지켜낸 이야기를 들려주어 왕을 안심시킵니다. “왕이시여! 저를 믿으십시오라는 그의 말은 믿음직합니다.

  그의 자신감의 근거는 자신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굳센 믿음과 그것을 갖게 한 그의 체험이었습니다. 믿음에 있기에 놀라운 능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으로 체험을 거듭함으로써 그 믿음은 굳건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지를 말하기 어려우나 마치 수레의 양 바퀴같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 다윗의 믿음을 성장시켰을 것입니다.

   믿음은 결코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아무리 믿음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현실 속에서 실천할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거나 아예 믿음 자체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는 자신의 믿음을 부르짖고 고백하나 막상 현실에서 부딪히는 고난의 어려움에서 그들의 믿음의 헛된 것을 여실히 드러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체험은 그러기에 신앙을 굳건히 하는 비료와 같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신앙을 이론으로부터 배웁니다. 말씀을 통해 배우고 기도를 통해 확인합니다. 그렇게 배운 신앙은 현실의 문제에 부딪힐 때 시험을 당합니다. 그 시험에 대하여 우리는 배운 대로 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체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체험은 자신이 이론으로 알고 있던 것이 사실임을 확인해 줍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체험 이전에 저는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었지만 체험으로 그것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닌 사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역사함을 그래서 저의 삶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혔을 때 먼저 하나님께 묻고 간구하게 되는 믿음의 정석이 몸에 배게 되었습니다.

  골리앗을 만나 싸우게 된 다윗의 태도는 바로 이러한 믿음의 정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마치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 한 보고에서 나타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주권을 맡기고 보았기에 적들은 우리의 밥이라는 낙관적 보고를 한 것이지 자기 자신을 보았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머지 10명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보았기에 우리는 메뚜기라는 비관적인 보고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다윗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는 사실과 상대인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이렇게 잘 표현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전장에서 무적의 힘을 과시하는 상대에게 선포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칼도 창도 단창도 요즘으로 말하면 총도 대포도 미사일도 여호와의 이름 앞에는 의미가 없다는 굳건한 믿음의 고백이지요.

  우리는 입으로는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지만 실제로 그 임재함을 시간시간마다 느끼고 있을까요? 적어도 인정하고 있을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원수마귀의 위협이나 공격이 닥치지 않으면 자신이 과연 어떤 상태인지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감정에 사로잡혀 멋진 신앙 고백을 할지라도 그것이 현실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에 의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말만 앞 세우는 신앙을 경계했죠.

  그 다음으로 다윗은 승전을 선포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언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골리앗을 죽여 그 시체가 짐승이 먹이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통해 나타납니다. ’너는 곧 내게 죽어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너희들은 알게 될 것이다라고. 이것은 둘의 전투가 단순히 그들만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서 역사하심을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자신은 물론 적에게도 믿음의 실체를 체험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체험이 가지는 위력입니다. 공개적으로 일어난 체험은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체험을 경험하도록 하여 믿음을 갖도록 합니다. 그러기에 체험은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키는 에너지이고 불신자에게 믿음을 가져오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체험 그 자체는 중요하지도 않고 그것이 목적이 될 수도 없음에도 소중히 여겨야 할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체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은 결코 신앙의 큰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우리의 궁극적 신앙고백이라 할 선포 즉 구원은 칼과 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외침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포함해 모든 신앙의 기본이 되는 선포입니다. 김일성을 찬양하여 자신들이 모든 삶을 그에게 귀결시키는 것처럼 기독교도라면 당연히 누구나 해야 하고 가져야 할 신앙고백이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전쟁에다가 무엇이든 대입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성공도 사랑도 행복도 치유도 모두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고 우리는 다윗처럼 믿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것도 바로 이 고백을 충실하게 받아들여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결국 하나님과 인간의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싸움을 통해 자신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분임을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인들에게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울러 인간은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방에 나가 떨어질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함께 명확해졌습니다. 골리앗은 그것을 위해 일종의 소품 또는 조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연이 악하고 강해 공포를 가져올수록 주인공의 가치는 빛나고 그것을 기획한 작가와 감독의 능력도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연출은 완벽했고 오늘까지 인구에 회자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다윗의 고백을 통해 나타나는 사실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역사하심 그리고 그것을 통해 증명된 사실 하나님이 인간과 모든 우주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믿고 계십니까? 만일 그렇게 믿으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놓치지 않도록 더욱더 기도와 간구 말씀으로 굳건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확신이 없다면 그것을 얻도록 더욱 더 기도하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시니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다윗은 결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기도와 간구를 통해 얻은 겨자씨같은 믿음을 체험을 통해 키워간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가 저지른 밧세바와의 간통 우리야의 살해는 엘리야만이 아니라 그의 성정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다윗이 한 것 우리라고 못하겠습니까? 믿음을 키우는 것에 대한 비법이나 요령은 없으며 오직 기도와 간구 말씀으로 무장한 채 삶의 가운데에서 그것을 실현하는 체험을 거듭하는 것 만이 비법이요 요령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비법과 요령을 통해 다윗의 고백을 자신의 고백으로 삼을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