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 –순종의 참뜻

닥터 양 2022. 4. 1. 09:55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 순종의 참뜻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디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하는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사무엘하 339)

 

  저에게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살아온 삶 그리고 제가 살고자 하는 삶을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인정받는다는 것은 뭐든지 잘한다는 칭찬을 받게 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구체적인 것에 대하여 비판이나 지적을 받는 것은 비록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삶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넌 잘 살고 있어. 하지만 이건 좀 고쳐야 되지 않을까?‘라는 지적은 얼마든지 환영하지만 넌 잘못 살고 있는 거야라는 애매모호하고 막연한 지적은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저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럿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 저를 아껴줍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제가 바라는 삶 지향하는 목표 가치관 등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좀처럼 해주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저를 사랑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도리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만은 저의 삶을 이해하고 전적으로 지지해주시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관포지교라는 말을 아시는지요.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을 가르키는 이 말은 제게 그런 의미에서 와닿습니다. 관중은 그의 절친 포숙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님이시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 뿐이다.“ 관중은 관자라고 불릴 만큼 위대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입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중 춘추시대의 다섯 패자(천하를 호령하는 권위를 가진 제후)의 한 명인 제나라 환공을 보필하여 그의 패업을 이루게 한 관중에게 포숙아의 이해와 지지 그리고 도움은 그가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절대적인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제나라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저로서 충분하나 천하를 제패하고 싶으시다면 관중을 쓰셔야 합니다.“ 포숙아의 이 한 마디는 자칫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던 관중을 구하여 그를 역사에 남을 인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관중은 한 마디로 줄을 잘못 섰습니다. 제나라에서 벌어진 왕권 다툼에서 자신이 지지한 주군이 패하고 그 자신도 포로가 되었습니다. 상대는 포숙아의 도움을 받아 내전에서 승리하고 즉위하게 된 환공이었습니다. 자신의 주군이 숙청된 마당에 그를 도와 싸운 참모인 관중의 목숨이 남아날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놀라운 반전이 있었습니다. 환공을 도운 포숙아가 관중의 중용을 주군에게 주청한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 그가 자신보다 훨씬 유능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내전에서 관중을 이길수 있도록 전쟁을 이끌어 간 포숙아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쟁에 한정되고 나라를 부강케하는 능력에 있어서 자신의 능력은 관중을 따라갈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좋은 우정도 눈 앞의 이익에 무너지는 것이 세상인심인데 스스로 자기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친구를 주군에게 추천한 포숙아의 우정은 참으로 고귀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감정 때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포숙아는 관중과 오랜 세월 함께 하며 그의 경륜과 능력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관중이 전투에서 도망을 가도 함께 장사를 할 때 이익을 더 챙겨도 하는 일마다 실패를 해도 포숙아는 그런 관중이 언젠가 큰 일을 할 인물임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큰 인물이라고 해도 모든 것에 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 포숙아는 결정적인 순간에 통큰 양보를 통해 관중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사람을 가지고 계십니까? 물론 이미 언급한 대로 저에게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그를 소중히 여기시겠습니까? 아마 보배처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그런 사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다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짓을 계속하거나 심지어 해가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사람이 자신과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함부로 그와 단절할 수도 없다면 매우 난감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윗의 측근인 요압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요압은 용맹한 장수이었고 지략도 어느 정도 겸비한 유능한 부하였습니다. 요얍이 없었다면 다윗의 왕국이 세워졌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요압에게 마음 속으로 원한을 품을 정도로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게 될 때 요압을 어떻게서든지 편히 죽지 않도록 지혜를 짜내라고 하는 유언을 남겼겠습니까? 죽는 순간까지 마음에 둔 것이죠.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요압은 자신의 신념이 강한 인물이어서 주군인 다윗의 명을 여러 번 거역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하였을 때 다윗은 비록 그것이 진압되더라도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요압을 이를 무시하고 기어코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음에도 그랬습니다. 그 때 다윗은 압살롬아! 내가 죽고 네가 살았어야 하는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라고 외치며 통곡을 했습니다. 아무리 반역을 한 자식이지만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압은 반역을 진압한 일등공신이었지만 다윗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잘못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죽어갈 무렵 또 다른 아들 아도니야가 멋대로 후계자를 자처하며 신하들과 즉위식을 하려고 할 때도 요압은 그 자리에 참가하여 아도니야의 반역을 도운 것입니다. 다윗의 시대가 끝났다고 성급히 판단한 것이지요. 물론 이 시도는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가 나단 선지자를 설득하여 다윗에게 고해짐으로써 뒤집어지고 결국 아도니아의 반역시도는 무산됩니다. 솔로몬이 즉위하고 요압은 결국 그러한 반역이 문제가 되어 살해되지요.

  요압의 불순종은 그들이 가진 군사적 힘 때문이었습니다. 정통을 이어 받아 왕이 된 것이 아닌 다윗에게는 군사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요압은 그 군사력을 이끄는 수장이었기 때문에 왕인 다윗조차 그를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유능한 장수를 함부로 징치할 수도 없었고요. 결국 다윗으로서는 군사적인 필요로 인해 요압을 계속 중요했지만 언젠가 그를 제거할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최고의 공신인 한신을 제거한 것처럼.

  요압이 다윗의 눈 밖에 난 최초의 계기가 아브넬 암살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다윗의 유다왕국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이스라엘왕국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사울과 세 아들이 전사하자 사울의 신하 아브넬이 이스보셋을 왕위에 앉히며 사울의 왕국은 이어졌고 유다지파는 다윗을 왕위에 앉힘으로써 이러한 분열이 발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넬은 무능한 이스보셋을 폐위하고 다윗을 통일 이스라엘의 군주로 삼기로 결심하고 다윗을 찾아갑니다. 조건으로 자신의 신변안전을 걸었고 다윗은 이를 흔쾌히 허락하면서 자신의 아내였지만 사울에 의해 강제로 다른 사람과 재혼한 미갈을 데려오라고 요구했고 이 역시 받아들여졌습니다. 두 나라의 평화적 통합이 성사될 상황이었죠.

  그러나 요압의 독단적 행동이 판을 깨고 말았습니다. 요압은 적의 실질적인 수괴인 아브넬을 그대로 돌려 보낸 다윗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몰래 돌아가는 아브넬을 암살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자칫 이스라엘 전체에서 다윗의 입지가 위험해 질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협상을 하러온 적의 참모를 몰래 살해했다면 당연히 적의 불신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 양국의 통합은 이스보셋을 암살하고 다윗에게 투항한 이스라엘 군지휘관들의 반역으로 성사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다윗의 명성에 일시적이나마 먹칠를 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요압의 충성은 주군인 다윗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전횡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골리앗을 때려 잡은 다윗이지만 혼자서 천하를 정복하지도 다스릴 수도 없으니 요압은 당장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요압의 존재는 다윗에게 일종의 가시였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요압의 비참한 최후를 가져온 것입니다. 국가의 원로이자 최고의 공신이라는 그의 위상도 그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한신장군이 그토록 유방의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마지막에 제거되어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남긴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토사구팽은 어찌보면 자업자득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공로가 크다는 사실 그리고 수하에 거느린 군사력 등을 이유로 주군에게 함부로 대들고 거역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군의 마음을 이해하고 순종하지 못했고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을 앞 세우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꼭 제거를 해야 하였는가에 대하여는 의문이 느껴지지만 그런 인물들이 살아있고 그의 후손이 그를 잇는다면 왕조의 안전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의구심도 역시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었을까요?

  요압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순종하기보다는 자신의 의를 쌓기에 급급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려 그 뜻에 순종하고 살아가는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저를 사랑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의 잘못된(?)사랑에 도리어 힘들어 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요압의 충성이 다윗의 마음을 괴롭힌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다르십니다. 그분은 징계를 하실지라도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다윗은 피의 복수를 지시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복수를 하실 분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못할 것이 자명합니다. 다윗은 요압의 눈치를 보아야 했지만 하나님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으시니까요.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하셔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가 언제까지고 하나님의 인내심을 시험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루속히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오직 주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삶이 어렵기만 하다면 더욱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한 죄를 짓지 않더라도 여전히 내가 주인이 된 삶을 사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결정은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어리석은 인간이 어찌 하나님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의 뜻과 결정이 하나님의 그것과 다르다면 여러분은 올바른 길을 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여러분의 회개와 그 실천을 위해 여러분을 압박하고 계시는 것이지 결코 여러분에게 심술을 부리시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순종하여 그 분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