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마음이 텅빈 사람들의 비극 – 현대 한국 사회의 허무주의

닥터 양 2022. 4. 4. 07:56

마음이 텅빈 사람들의 비극 현대 한국 사회의 허무주의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마태복음 1243-45)

 

 최근에 저는 어떤 목사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라고 해도 사역을 하고 있지 않고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는 분이셨기에 영적인 분위기를 느끼기는 어려웠습니다. 과거에 목사 안수는 받았지만 세상 속에 계속 있다보니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 목회자로서의 사명감이 있어서인지 어느 정도 이야기가 통한다는 느낌은 받았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자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의 주변에는 참으로 병적인 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그분의 삶을 망가트리고 있는게 아닙니까? 남편이라는 분은 그도 목사인데 예수가 밥 먹여 주냐는 식의 이야기를 합니다. 심지어 자식을 교도소에 넣을 방법을 연구하기도 하고 자신은 파산을 하기 위해 물쓰듯이 돈을 씁니다. 시부모라는 분은 각종 부채를 끌어쓰며 이 분과 그 가족에게 큰 짐이 되고 있습니다. 친정 부모님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양육을 거부했습니다. 무슨 환타지 소설을 접한 것처럼 전개되는 그분의 인생역정에 저는 머리가 아파졌습니다.

  그런데 그분 자신은 멀쩡한가 싶었지만 그 역시 정상은 아니었습니다. 첫째를 입양하였는데 남편이자 양아버지인 분이 그를 극심하게 학대하였지만 그것을 방치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그 아이를 보호하기는커녕 얘야 아빠는 다 이런 거란다고 하며 받아들이도록 설득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했냐고 하자 그 아이를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 아이는 정신적으로 문제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학대 후유증인 것이죠. 정인양 사건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할까요? 다르다면 그나마 나이가 있어 입양해서(5살 정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점뿐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감당할 삶의 무게는 무겁기만 합니다.

  왜 이런 아수라와 같은 삶을 살게 되었는가를 들으면서 생각해 보니 스스로 자처한 면이 너무나 큼니다. 시부모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분리가 정답인데 그분은 시부모를 스스로 불러들여 문제를 떠안아 버렸습니다. 양아들에 대한 양부(남편)의 학대를 저지하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아들을 위한 것이라고 둘러댔지만 남편과의 분리를 두려워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모든 행동을 긍휼함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언 듯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위한 것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분은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이어온 것일까요? 왜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자신의 삶 속에 끌어들여 자신의 삶을 어렵게 만든 것일까요? 자신이 긍휼함이 넘친다고 합리화시켰지만 사실은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상태에 놓이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마치 유괴범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그래서 유괴범의 편에 선다는 이른바 스톡홀름 증후군적 증상이 그분에게 엿보입니다.

  그분의 그러한 잘못된 삶에는 커다란 결핍이 있었습니다. 바로 부모님에게 버림받다시피 하여 조부모에게 양육된 사실에서 비롯된 애정의 결핍 말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사람에 대한 집착을 가져옵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제가 그런 증상에 시달려 왔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그것을 어느 정도 극복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것은 학업과 믿음에 의해 가능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극복했다기보다는 대상이 바뀐 것일지 모릅니다. 사람에서 학업과 믿음으로. 하지만 사람과 달리 학업과 믿음은 집착을 해도 그 폐해가 적거나 없기 때문에 저는 건강한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분도 그러한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이 만일 사람에 대한 집착을 보다 건강한 방법으로 보여주었다면 그분이 지향했던 것처럼 긍휼함의 아이콘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문제와 그 해결은 약간의 차이로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러한 결핍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상태에 있지만 행복지수는 도리어 바닥권에 머물고 있고 자살률은 선진국 중에서 1,2위를 다투고 있는 형편에 놓여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결핍을 메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허무주의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삶은 극과 극입니다. 하나는 극단적인 무기력증에 빠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매일 매일 반복된 삶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허무주의의 그림자를 느낌니다. ‘인생은 참 덧없구나. 내가 뭘 해야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또 하나는 허무주의를 감추기 위해 극단적으로 즐거움이나 기쁨을 찾아 헤매이는 사람들입니다. 보기에는 적극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취미가 다양하고 인간관계에도 적극적입니다. 제법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 같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철저한 외로움을 내포한 허무주의가 담겨져 있습니다.

  일본의 어느 연예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 시간 때우기를 하는 것이다라고. 100%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 점이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차피 태어나서 살아가야 하니까 뭔가 소일거리를 찾고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해도 무조건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꼭 절대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는가 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반론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허무주의를 제대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일본의 어느 평론가가 일본인의 허무주의를 잘 표현하여 주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인생은 허무하니 그대로 어딘가에 숨어 버리고 싶다. 그렇다고 자살할 용기는 없고 산 속에 들어가 숨는 것은 너무 힘드니 차라리 지금 이곳에서 하는 일에 매달려서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세상 속에서 숨어 산다. 이것이 우리 일본 사람들의 숨어사는 삶이다.‘ 그가 설명하는 일본식 은둔은 삶에 철저히 매달리어 인생의 허무함을 감추고 살아가는 방식인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무기력한 삶과 달라 보이지만 뚜렷한 목표나 꿈이 없이 그저 최선을 다해 삶에 매달림으로써 허무함을 달랜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우리도 이 일본 평론가가 말하는 방식으로 허무함을 달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사회를 지탱하던 가치관 종교적 권위 공감대가 사라지고 누구나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제어할 도구나 장치를 잃어 버린 느낌입니다. 커다란 결핍이 발생한 것이지요. 그것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갖가지 것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돈벌이 학업이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극단적인 쾌락주의로 칟다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결과적으로 훨씬 불건전해진 것이죠. 물질적 풍요가 낳은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풍요로움이 일반화되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니까 소비적인 형태의 도피처를 찾게 된다는 것이지요. 매일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시키는 각종 광고, 오락프로그램, 유흥가에 넘쳐나는 각종 퇴폐적 광고 등등. 그러한 결핍을 메워주겠다는 선전 문구 속에 우리는 쾌락주의의 향연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즐거움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오늘의 본문은 그렇게 해서 더욱 더 타락한 사람의 경우를 말해줍니다. 결핍을 채울 것을 찾지 못해 더 나쁜 방식으로 그것을 채우게 되는 사람 그것을 틈타 들어오는 사탄의 역사 말입니다. 차라리 이단 종교나 타종교에 귀의해서 사는 사람들의 삶은 건전할 수 있습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허무주의의 노예가 되어 자극적인 방법으로 결핍을 메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러한 심리를 파고들어 인간을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설령 그런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런 의미 없이 부지런을 떠는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세월을 아껴라는 가르침은 바로 그런 것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주행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정주행이라고 하니까 똑바로 가는 것인 줄 알았는데 드라마나 다른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리즈로 한꺼번에 보는 것을 의미하더군요. 아마 다른 것 하지 않고 한 가지에 몰두하는 것을 빗대서 만든 용어인가 봅니다. 주말 이틀간의 여가를 이른바 때우기위한 좋은 방법이라고 여겨지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나 허무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방송연출가나 감독 같은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정주행은 그냥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텅빈 머릿속에 그러한 콘텐츠를 채워서라도 허무주의를 잊고자 하는. 차라리 사이비종교에라도 빠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이비 종교는 그래도 인생에 대하여 가르침이라도 주니 낫지 않을까요? 대놓고 타락을 부추기는 사이비종교는 아마 없고 있다고 해도 지지를 받기는 어렵겠지요. 하긴 섹스를 사랑이라고 포장하여 난교를 벌이고 있던 사이비종교도 있으니 장담은 못합니다.

안개 속을 걸어봐도 채워지지 않는 나의 빈가슴 잡으려면 어느새 부서지는 젊음의 무지개여

커피를 마셔봐도 느낄 수가 없는 나의 빈가슴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젊음의 고독이여

내 젊음의 빈 노트에 무엇을 그려야 할까 내 젊음의 빈 노트에 무엇을 써야만 하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우리들 사랑의 이야기(중략) 이 세상에 살아있는 우리들의 모든 인생 이야기(후략)“ (’젊음의 노트에서)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고민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물론 지금의 젊은이들도 고민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공백을 허무함을 어떻게 메울까에 집중되어 허무함을 메우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고민은 없거나 그다지 없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문화콘텐츠의 범람은 정주행을 통해 그러한 공백을 쉽게 메꾸도록 함으로써 공백에 대한 처절한 고민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과연 이것은 기우에 불과할까요?

  여러분의 공백을 메울 최선의 콘텐츠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준 신앙입니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포맷되어 있는 인생은 결코 허탄한 시간 때우기에 몰두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혼을 결핍을 채워주는 최고의 선택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분별력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안겨주어 여러분들의 삶의 안전을 지켜주는 가이드가 되어 줄 것입니다. 또한 방향을 잃지 않게 해 줄 나침반이 되기도 합니다. 다른 콘텐츠는 그 아래 종속시켜 버려 함부로 여러분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도록 합시다.

  정주행이란 바로 이런 최고의 콘텐츠가 없는 상태에서 눈앞의 시간을 대우기에 급급하기에 생긴 현상일 것입니다.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흘려보내려면 뚜렷한 목적이 있어 햡니다. 그렇지 않으면 낭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목적은 삶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와 그에 따른 인생의 목표와 계획이 있을 때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니 시간 때우기에 몰두하지요. 시간은 때우는것이 아닐 적절히 활용하는 것어야 합니다. 자신의 목적과 그에 따른 목표 계획에 따라서.

  미사키유타(三崎優)라는 일본의 한 젊은이의 삶은 이러한 것을 제대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가정 학습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사업을 일으켜 30도 되지 않은 나이에 매출 1,500억의 기업을 이끄는 사업가로 변신했습니다. 그의 연수는 대략 150억원 정도였습니다. 그의 화려한 삶은 일본에서 화제가 될 정도였습니다. 각종 고급자동차와 주택 의복 등으로 메워진 그의 삶은 때우기였습니다. 돈은 벌었지만 그것을 쓸 전제로서의 목적도 그에 따른 목표도 계획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쳤습니다. 선배에 대한 자금지원이 탈세로 이어졌다는 혐의를 받게 되어 하루아침에 파렴치한탈세범으로 몰려 (나중에 무죄로 판명)모든 것을 잃고 호스트바에서 알바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탈세액에 해당되는 20억원을 100명의 지원자를 모집하여 나눠주고 자살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명예회복을 위해!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할 일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처럼 억울하게 네트워크의 공격으로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사람들을 돕는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일단 그렇게 변화된 삶을 살게 된 그는 타인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삶에 모든 것을 걸게 됩니다. 그런 자신의 삶을 그린 저서 과거는 바꿀 수 있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때 그래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SNS을 통해 나에게 응원메시지를 보내준 여러분들의 덕분입니다. 여러분의 따듯한 메시지에 정말로 힘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이번엔 제가 신세를 갚아야 할 차레입니다. “(미사키 유타 과거는 바꿀 수 있다후죠사, 2020, 서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삶이 바뀐 것을 여러분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깡패, 술주정꾼, 도박중독자, 가정폭력상습범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죄인들이 예수의 보혈로 정결케되어 존경받는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결핍을 메워줄 훌륭한 콘텐츠가 기독교의 자랑이며 그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인생의 방황이 끝나고 좋은 교회를 만나면 신앙의 방황이 끝납니다라고 한 문구를 기억합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일곱 귀신을 데리고 여러분의 결핍을 공략하러 오는 사탄의 침투를 막을 수 있는 견고한 방호막을 쌓으십시오. 배가 고프다고 아무거나 먹다가는 큰 병이 나거나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채워짐으로써 사탄마귀가 틈탈 수 없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