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남의 죽음 나의 곶불 ‘이웃 사랑의 소중함’

닥터 양 2022. 4. 11. 11:13

남의 죽음 나의 곶불 이웃 사랑의 소중함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1233)

  어렸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제가 학교에 들어간 1969년 무렵은 아직도 우리 사회가 가난을 극심하게 겪고 있었던 시절입니다. 길에는 구걸을 하는 거지들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안보를 위해 만든 향토예비군가를 이렇게 바꿔 부를 정도입니다. “어제의 거지들이 다시 뭉쳤다 집집마다 밥달라고 외치는 소리 ..” 아침이면 찾아와 밥 좀 줘 예?”라고 외치던 거지들의 목소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수사반장이라는 드라마를 아시나요? 요즘 젊은 세대는 아마 모르거나 알아도 그저 이름만 들었을 것 같지만 우리 세대는 물론 우리보다 조금 뒤의 세대도 이 드라마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각종 범죄 사건을 다루면서 사회의 문제를 살펴보는 이 드라마는 지금은 거의 (아마 전부일 겁니다) 사라진 방식으로 매주 방영되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무대와 인물은 동일한데 매번 주제를 바꾸어 제작되는 방식이고 그래서 매주 제목이 주어집니다.

  외국에서는 아직도 이런 방식이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 방송에서는 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TV문학관’ ‘베스트셀러 극장등등. 수사물 자체가 아예 사라졌지요. 예전에는 여러 가지 이름의 수사물이 많이 방영되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취향이 독특한 것일까요? 드라마는 거의 다 멜로물이고 게다가 모두 연속드라마 방식으로 방영되고 있으니까요. 수사반장은 그렇게 사라진 과거의 방식과 내용으로 국민적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였으니 더욱 인상적인 추억으로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수사반장은 어쩌면 제게는 사회를 배우는 훌륭한 부교재였을지 모릅니다. 사회의 어두운 면모를 범죄수사를 통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범죄를 주제로 하지만 그것을 통해 제가 도저히 접할 수 없는 사람들이나 현상을 볼 수가 있었기 때문에 정말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어린 나이이니 납득이 가지 않아 어른들을 귀찮게 하며 질문 공세를 펴기도 했죠. 가끔은 어른들이 짜증을 내며 너무 신경쓰지 말고 공부나 해라고 하신 것도 기억이 납니다.

  수사반장에서 다룬 많은 주제 중에 제게 큰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가난의 문제였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나레이션이 있습니다. “그들은 쓰레기통을 안식처 삼아 머나먼 길을 떠났다는 남성 나레이터의 목소리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지금 세대가 들으면 무슨 소리야?’할 암호같은 말이지만 생각할수록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한 가족이 쓰레기통 안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과거에 길 거리에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대형 쓰레기통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잘만 하면 성인 2,3명은 너끈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컸죠. 거기에 아이들은 작으니까 끼워 앉으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 가족이 그곳에 들어가 함께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건이지만 그 당시라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죠.

  요즘에도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사건이 일어나기는 합니다. 일가족이 함께 죽은 채 발견되는 사건 말이죠. 지금은 절대적으로 굶주림에 못 견뎌 죽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회복지 시스템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되어 있으니 먹을 것이 없어 죽을 일도 없겠지요. 하지만 그 시절에는 정말 먹을 것이 없어 죽는 이른바 굻어죽는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시골에서는 보릿고개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시절이니 굶는 것이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죠.

  하지만 제겐 그러한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자신이 그런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이 부자는 아니었지만 먹는 것 정도는 남아돌았습니다. 어려서 몸이 약했던 저는 제대로 먹지를 못했습니다. ‘없어서가 아니라 먹기 싫어서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밥 먹는 것이 싫은지. 그렇다고 군것질을 많이 한 것도 아닙니다. 저희 부모님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해서 군것질을 많이 시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저는 삐쩍 마를 수 밖에 없었죠. 결국 제대로 못 먹었다는 사실은 같지만 그 이유는 굶어 죽는사람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오죽하면 어머니께서 돈을 주면서 먹으라고 하셨죠.

  ‘왜 나는 먹기 싫어서 음식을 남기는데 저 사람들은 굶어죽는 것일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너무 불쌍해서 한 생각입니다. ‘내가 안 먹고 남긴 것이라도 주면 좋지 않을까?’라는 철없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제가 부모님과 함께 어딘가를 가면 꼭 듣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니 얘가 왜 이리 말랐어? 고기 좀 먹이지라고. 하지만 저는 고기라면 질색을 했기에 도대체 그 맛없는 고기를 왜 그렇게 먹이라는 거야라는 생각했었죠.

  저는 지금도 고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더 그랬고요. 오죽하면 고기 안 먹는다고 매를 맞았겠습니까? 심지어 저는 요즘 아이들이 고기를 잘 먹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성인이 되어서야 고기를 제대로 먹기 시작한 제겐 신기하기조차 합니다. ‘아니 애들이 어떻게 고기를 저렇게 잘 먹지?’라고. 저희 아이들이 고기를 잘 먹는 것을 보고 대견하게 여겼습니다. 어려서 느꼈던 고기의 느끼한 맛이 제겐 악몽이었으니까요.

  이 정도면 왜 제가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졌을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굶주림은 곧 가난을 말합니다. 굶주림에 대한 관심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굶주림 못지않게 가난이 주는 피해는 질병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병에 잘 걸리기도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도 어려웠습니다. 수사반장에서는 그러한 문제도 다루었습니다. 어린 저에게는 그것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병약했던 저는 병원에 자주 신세를 졌지만 돈이 없이 치료를 못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저 사람들은 뻔히 고칠 수 있는 병을 돈이 없다고 못 고친   채 죽어가야 하는 것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 교회문을 두드리고 제대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던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생각들이었습니다. 성경이야기 라는 책을 통해 또한 성탄절에 상영되는 왕중왕이라는 영화(예수님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로 거의 매년 되풀이되어 방영되었습니다)를 보면서 예수님은 병든 자를 치료해주시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라는 고마운 분을 믿는 것이 기독교라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았기에 쉽게 교회에 적응하며 다닌 것 같습니다.

  조금 과장되게 이야기하면 수사반장이라는 드라마도 제게 교회로 가는 길을 닦아준 고마운 방송일지 모르겠습니다. 어른들에게 질문 공세를 한 결과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그런 저에게 교회와 복음 그리고 예수님은 너무나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가난과 굶주림을 해결해 줄 능력과 의지를 가진!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저는 그러한 꿈을 교회에 예수님에게 걸고 살아갑니다. 사회복지가 잘 발달한 나라들이 대부분 기독교 국가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인 슈바이처 박사는 그러한 희망을 실현시키신 분 중 한 분인데 그 분은 저명한 신학자이고 독실한 기독교신자입니다. 제가 슈바이처 박사의 전기를 수도 없이 되풀이해서 읽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 아니 최소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라도 모두 슈바이처 박사처럼 생각하고 산다면 우리들의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 될까요?

  기독교인들은 천국을 바라보고 살지만 저 역시 그렇지만 제겐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도 너무나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가장 크게 느껴지는 말씀은 빛과 소금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천국에 갈 생각으로 가득한 삶이 최선은 아닐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그토록 구제를 이웃 사랑을 강조하시지는 않았겠지요. ‘천국에 갈 생각으로 지상의 삶은 대충 살아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다미 선교회 사건이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휴거를 기다리다 속된 말로 폭망하고 말았죠.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도 그런 사람들을 꾸짖는 가르침을 주었죠.

‘  남의 죽음은 나의 곶불보다 못하다는 말을 아십니까? 예전에는 흔했던 이 말이 지금은 낯설기만 합니다. 곶불은 바로 감기입니다. 내 감기가 남의 죽음보다 더 중요하다는 이 말은 인간의 철저한 이기심을 말해줍니다. 남이 죽었다는 것이 내가 감기 걸린 것 보다 중요한 사건아니라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그렇게 남의 삶에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그토록 또 성경이 지겨울 정도로 반복해서 이웃 사랑을 외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굶주림이 사라진 지금 하지만 여전히 이웃 사랑은 절실한 문제입니다. 비록 밥을 먹고 살게 되었지만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되새겨야 합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며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들이 그런 결정을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여러 가지 조사와 연구로 나타났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도 병이 나서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것이 간접적인 이유는 되기는 하지만.

‘  우리끼리의 사랑에 집중하고 계십니까? 내 자식 내 배우자 내 애인 내 친구에게만 마음을 쓰고 계십니까? 그들에게 모든 것을 다 하고 있어 이웃을 돌볼 시간조차 없으신가요? 하지만 주님의 자녀를 자처하신다면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셔야 합니다.

  그분은 이웃 사랑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처럼 소중히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 천국에 가서 살게 될지 모르지만 이 지상에서는 이웃 사랑에 힘쓰라고 하십니다. 이웃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은 지옥에 갈 죄라고도 하십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설령 지옥에 가지 않더라도 불쌍한 이웃에게 내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삶의 일부로 여기시고 살아가심으로써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