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며 인내하라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기다리며’
갓난아이가 배가 고파 울어대는 데 “얘야 기다려라” 하며 하루나 이틀 동안 모유나 분유를 주지 않는 엄마는 없을 것입니다. 갓난아이는 미래를 바라보며 울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위해 보채는 것이죠. 그러기에 보호자는 즉각 그 욕구를 채워줘야 합니다. 먹을 것을 주거나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아픈 곳이 있나 혹은 다른 불편한 것이 없나를 살펴보고 대처를 해 줘야 합니다. 그런 것을 잘 하는 것이 좋은 엄마의 조건이 될 것입니다.
큰 딸이 세 살 때의 일-기억이 조금 불확실합니다-이었습니다. 물론 갓난아이는 이미 아니었지만 아직 제대로 말로 의사표현을 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죠. 아이가 갑자기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화장실에 가지 않고 그대로 대소변을 보는 게 아닙니까? 우리 부부는 당혹스러워했습니다. 이미 대소변을 가린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 왜 그럴까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했습니다.. 심지어 아이를 혼나기도 했습니다. 혹시 아이가 부모에게 응석을 부리려고 그러는 것은 아닌가 해서요. 여동생이 태어나서 아직 돌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언니의 반항(?)이 우리 가정에 큰 혼란을 가져온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이유를 알고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나 소변을 내보내는 부위에 상처가 생겨 소변을 볼 때마다 고통을 느낀 아이는 소변을 참다가 결국 그대로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눈치가 빠른 아내가 먼저 그것을 알고 대처를 해서 다행히 해프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잠시나마 그것을 모르고 방치해서 아이를 고통스럽게 한 일이 30년이나 지난 지금도 제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가 아픔을 호소하는데 우린 그것도 모르고 아이를 꾸짖었으니’ 생각만 해도 내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서 미울 정도입니다. 이렇듯 갓난아이나 어린아이의 신호에 어른들은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자칫 방치가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이가 성장해가면서 좀 더 시간을 두고 대처해야 할 것이 늘어납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빨리 커서 편해지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아이들이 크면서 손을 대야 할 일은 줄어가고 몸이 편해졌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늘어나더군요. 그런 문제는 급하게 대처하기보다는 좀 더 생각을 해서 처리해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아! 몸이 편해지니 이제 마음이 불편해지는구나’ 과거와 달리 문제의 처리를 두고 아내와 다투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 문제는 해결책이 뻔하기 때문에 다툴 이유도 없었지만 아이들이 크면서 생기는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라도 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그때마다 ‘차라리 애들 어릴 때가 편했다. 그 때는 몸으로 때우면 됐는데 지금은 그것도 안 되고. 언제쯤 되야 아이들 때문에 힘들지 않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큰 딸이 크면서 대형사고(?)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학습지 교사를 했는데 학부모로부터 회비를 수금하여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한꺼번에 입금을 하곤 했습니다. 그 사이에 큰 딸이 그 돈을 몰래 꺼내 사용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물론 도둑질이죠. 돈이 없어지는 일이 계속되자 아내는 당혹스러웠지만 증거도 없이 아이를 의심할 수도 없어 안절부절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이가 주변의 노점에서 제법 큰 돈을 쓴 일이 노점상의 제보로 드러났습니다. “그 나이의 아이가 쓰기에는 너무 큰 돈이라 말씀드립니다”라 고. 평소에 아내와 친분이 있던 노점상 아주머니 덕분에 큰 딸의 범죄(?)가 백일하에 드러난 것입니다.
한 두 푼 훔친 것이라면 따끔하게 야단을 쳤을 텐데 액수가 수 십만 원에 이르니 저도 아내도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야단을 치고 싶어도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내에게 “돈을 그렇게 갖고 다니니까 문제지. 왜 얼른 입금을 안했나”라고 하며 엉뚱한 방향으로 공격의 화살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이지만 그렇다고 아내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인데 만만하니까 그쪽으로 화풀이를 한 셈이지요. 물론 그로 인해 말다툼이 벌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왜 나한테 그래? 잘못은 애가 했는데” “왜 빌미를 제공할 짓을 했냐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지금 같으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을 텐데 그 정도로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때라 한동안 이 문제는 저희 부부를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그대로 넘어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본인도 잘못을 알게 되었으니 더 이상의 징계는 아이에게 큰 상처가 될 거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이런 경험은 아이들이 크면서 자주 겪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도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앙이 어려서 급한 일이 생겨야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서 급하게 응답하셨습니다. 하지만 신앙이 자라서 급한 일보다는 장기간의 과제를 기도하는 일이 늘어나자 하나님의 응답도 느려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급한 응답에 익숙해진 저로서는 그것이 못마땅해서 하나님께 응답을 재촉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큰 딸의 절도사건에 대하여 우리 부부가 고민한 것처럼 하나님은 고민을 하셨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그보다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응답해야 할 기도제목이기 때문에 당신의 때를 기다리고 계셨을 겁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저도 어느덧 하나님의 응답을 차분히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의 신앙을 보다 성숙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도 인생도 신앙도 결국은 기다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급하게 결과를 가져오려고 하는 태도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하나의 기도 제목을 두고 기도하다가 하나님께 기다리라는 응답을 받고 그때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와 하나님이 일종의 딜을 한 것이기 때문에 저 역시 초조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습니다. 제가 포기하려던 기도제목을 하나님께서 붙드셨고 저는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면 저는 기도만 할테니 알아서 해결해 주십시오”라고 제안을 했고 하나님께서 OK사인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 저는 기대반 불안반의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른 아이에 비해 유달리 문제를 많이 일으켰던 큰 딸은 지금 딸아이 하나를 키우는 엄마가 되어 있습니다. 남편은 6살이나 어린 일본 남자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잘 커서 가정을 이루었고 아이까지 낳아 키우니 마음이 놓입니다. 둘째 딸도 결혼을 했고 막내아들만 남았습니다. 아이들을 키운 경험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저의 믿음을 키우시기 위해 애쓰셨을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는 기도 응답이 늦어져도 불평보다는 조용히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니 하나님께서는 흡족해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육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함이 아닌 바름이 정답이다. ‘좁은 길’ (0) | 2021.11.22 |
---|---|
하나님은 마술 지팡이도 종도 아니시다. (0) | 2021.11.21 |
우리가 애타게 찾아야 할 것 – 절박함 (0) | 2021.11.20 |
하나님은 믿음을 원하신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0) | 2021.11.19 |
약할 때 강함 되시네 – 약할 때 커지는 주님의 은혜 (0) | 2021.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