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애타게 찾아야 할 것 – 절박함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시편 105장 4절)
그 순간 제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하였습니다. 아무것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제 아이의 행방이었습니다. 비가 쏟아지는 날씨 속에 어디론가 사라진 제 아이를 찾는 것만이 저의 머릿속을 지배했습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라도 저는 아이를 찾아야 했습니다. 목숨을 주고라도. 마침내 아이를 찾았을 때 느낀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를 불러 잔치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나 제대로 마음으로 느끼고 있을까요? 우리는 주님에게 우리의 마음을 이해해달라고 늘 호소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실제로 얼마나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을까요? ‘주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이니 알아서 잘 지내실 거야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라고 치부하고 말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하지 않은 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뭡니까? 궁극적인 목적이 뭘까요? 축복받기 위해? 위로받기 위해? 남녀가 연애를 하는 것이 커피 마시고 영화 보고 밥 먹기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동의하십니까? 그런 걸 굳이 연애해야 할 수 있습니까? 친구하고도 할 수 있고 가족 하고도 할 수 있고 심지어 직장동료 하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연애라는 조금은 귀찮은 과정속에서 하는 이유가 뭘까요? 커피 마시고 밥 먹고 영화 보는 것은 연애를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연애의 목적은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을 키워가면서 관계를 다져가는 것 아닐까요? 사랑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작용이기에 그것을 확인하고 누리고 하는 시간을 통해 관계라는 형태로 현실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연애란 바로 그 과정입니다. ‘게임의 여왕’이라는 작품으로 우리에게도 알려진 세계적인 작가 시드니 셸던은 ‘코인의 모험’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사랑에 빠진 여성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그것은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와 함께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바로 이것이 연애입니다. 이것은 비단 남녀 간의 사랑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사랑의 문제는 수단과 목적이 바뀌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수단을 위해 없는 사랑을 억지로 만들어 연애라고 하는 수단을 목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는 것이죠. 사랑을 위해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애를 위해 사랑한다고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 없는 연애’가 판을 치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해서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옆구리 시려서’ ‘외로워서’ 연애를 합니다. 사랑 연(戀) 사랑 애(愛)라고 하는 연애에 사랑이 빠진 채 행위만이 관계만이 남아 버렸으니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사랑 없는 연애가 가져오는 비극은 끔찍할 수준입니다. 얼마 전 한 남성이 자신과 동거하던 여성을 칼로 여러 번 찌르고 분이 풀리지 않자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여자를 그렇게 죽일 수가 있나’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그들은 사랑을 한 것일까? 아니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행위를 한 것인가’라고 묻고 싶습니다. 사랑하니까 데이트를 하고 성관계를 갖고 선물을 주고받고 그렇게 하지만 실은 사랑이 목적이 아니라 데이트 성관계 선물이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즐거움이 필요하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속인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니 상대가 자신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게 되자 무참히 살해한 것입니다.
어떤 여성컬럼리스트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남자들은 여자에게 선물을 주며 오늘 밤 자신은 이 여자를 쓰러뜨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현재 남녀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격하게 공감했습니다. 이것을 여자들 입장에서 쓰면 이렇습니다. “여자들은 남자가 자신을 쓰러뜨릴 때 이것으로 자신이 얼마나 대가를 얻을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라고.”고. 결국 둘의 관계는 선물과 성관계를 주고받는 ‘성매매’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닐까요? 남녀 간의 성관계가 성매매가 되지 않으려면 둘 사이에 진실한 사랑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목적인 연애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다면 성매매로 전락할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면 기껏해야 사랑을 빙자한 쾌락의 추구에 불과할 것입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극단적으로 잘못되면 위에서 언급한 끔찍한 사건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랑이 있다고 남녀관계가 완벽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란 부족한 존재이니까 그런 부족한 인간이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적어도 상대를 수단으로 사랑을 수단으로 여기는 것에 비하면 좀 더 아름답고 궁극적으로는 보다 더 행복한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애타게 찾지만 그렇지 않으면 잊어버리거나 멀리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라면 그것은 쾌락을 위해 사랑을 빙자하여 연애를 하는 남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니까요. 여자를 쓰러뜨리기 위해 선물을 주는 남자 남자에게 선물을 받기 위해 남자의 품에 안기는 여자 그런 관계와 뭐가 다를까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수단으로 이용하시지 않으시니까 그 점은 명백히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부모 자식 관계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모가 선물을 주고 자식이 그것을 받기 위해 부모를 사랑하는 척을 한다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남녀관계와 어떻게 같냐고요? 아닙니다. 그런 부모자식관계는 널렸습니다. 다르다면 부모자식관계에는 헤어짐이나 이혼이 어렵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늙은 부모를 외면하는 자식이 어디 한둘입니까?? 그것이 모두 자식의 잘못만은 아닐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그런 마음을 갖도록 했다는 점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부모 자식관계에 가깝다고 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에 바탕을 둔 관계형성을 애타게 원하십니다. 즉 우리 자신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하나님께 달라는 것만 말하고 그것이 채워지면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어쩌다 응답이 늦어지면 “하나님이 계시는 한 거야?”라는 불평을 말하거나 원망을 쏟아냅니다. 마치 동거하던 여성을 살해한 남성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욕구를 채워주는 자판기로 여기면서 살고 있음을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오늘도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 자신을 너무나 원하십니다. 왜냐고요? 진심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네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영원히 사랑함이라..”이 찬양은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 너무나도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을 하나님께 받고 있는데 그 가치를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정작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자식에게 줄 보화를 쌓아 놓았지만 자식은 받으러 오지 않는다면 누가 손해인 가요??
오늘의 필자는 그런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자동차 뒤의 범퍼에 놓여있던 지갑처럼 우리는 주님을 그렇게 버려두고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가장 귀중한 재산을 뒤에 두고 왔음을 깨닫지 못 한 채”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결핍과 필요에 지나치게 집중하느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결핍과 필요는 주님이 채워주실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는 잊고 살기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외치십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고. 하지만 우리는 “됐어요. 제가 그냥 지고 갈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맞받아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응답이 없다고 원망하고 주님의 존재까지도 부정하려고 덤비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합니다..
시드니 셸던의 ‘코인의 모험’의 여주인공같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사랑의 관계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 엘리자베스 메디슨이라는 여주인공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오해를 받고 감옥에 갇힌 남성을 아버지를 대신해 도와주다가 그에 대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물론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였는데 남성도 그런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엘리자베스의 신분이 드러나는 바람에 한때 위기에 빠졌으나 마침내 ‘사랑’에 의해 결혼에 골인하게 됩니다. ‘원수의 딸’과 ‘피해자’라는 사실이 그들을 앞길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큰 장애를 이겨내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애타게 찾을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육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은 마술 지팡이도 종도 아니시다. (0) | 2021.11.21 |
---|---|
기도하며 인내하라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기다리며’ (0) | 2021.11.21 |
하나님은 믿음을 원하신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0) | 2021.11.19 |
약할 때 강함 되시네 – 약할 때 커지는 주님의 은혜 (0) | 2021.11.18 |
주님의 음성에 집중하라! ‘이 소란한 세상’ (0) | 2021.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