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할 때 강함 되시네 – 약할 때 커지는 주님의 은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12장 9절)
‘지선아 사랑해’의’ 저자 이지선 자매는 한동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오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귀가하던 그녀에게 닥친 끔찍한 재앙을 그녀는 도리어 축복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다시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화상으로 얻은 끔찍한 외모가 그녀에게는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이야기를 “어차피 그렇게 된 것이니 적응하기 위해 생각을 바꾼 것”이라고 폄하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물론 실제로 옛날의 아름다운 외모를 되찾을 수 있다는 상황에서 이지선 자매가 그것을 마다하고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누리고 있는 풍성한 은혜가 그녀의 화상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아마 자신의 약함이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된다는 점을 실감하며 살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이지선 자매는 그녀의 고난으로 인해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녀의 삶을 보다 빛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녀의 삶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만일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면 절대 받지 못할 사랑을 받게 된 것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나는 그녀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더욱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녀는 서숙희라는 이름의 목사입니다. ‘천국3층천의 비밀’의 저자 서숙희 목사는 유체이탈을 통해 천국에 14번을 다녀오면서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전하고자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장애란 걸림돌이 아니라 도리어 디딤돌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장애를 안고 사는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도리어 큰 은혜를 받습니다. ‘장애를 안고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다니’라는 생각에 사람들은 도리어 그녀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은혜의 크심을 실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약할 때 일하십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라는 찬양은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당당하고 힘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여지가 적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다지 주님에게 손길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 저는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염려 마시고 절 내버려 두세요”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거칠게 말하면 “신경끄세요”라는 것이 됩니다. 실제로 교회에는 이런 태도를 보이는 성도들이 제법 있습니다. 평안하고 안전하니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하고자 할 어떠한 동기도 없으니 신앙이 성장할 여지도 없는 상태입니다.
마치 부모가 잘 살고 있는 자식보다 어렵게 사는 자식에게 더 큰 사랑과 관심을 두는 것(‘아픈 손가락’)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어려움 가운데에 부르짖는 성도에게 더 큰 사랑과 관심을 주십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렇게 하시기 위하여 사랑하는 자녀에게 시련을 허락하시어 자신에게 부르짖도록 하시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축복을 주시기 위해 먼저 고난을 안겨주신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로 인해 약해질 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그러니 “약할 때 강함 되신다”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필자도 그러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루게릭병이라는 끔찍한 병으로 인해 필자는 도리어 넘치는 주변의 격려와 사랑 기도를 받으면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가 건강했다면 절대로 누릴 수 없는 축복을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생생하게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며 저를 통해 일하시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마치 아픈 손가락이 된 자녀에게 보다 더 큰 사랑을 쏟아붓는 부모의 사랑에 감격한 자식과 같은 그도 그렇게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몸이 아프면 부모님께서 평소보다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 때문에 아픈 것이 도리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신다면 필자의 마음을 조금 더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르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은 더욱 크고 놀랍다는 것뿐입니다..
16년 전 저의 아버지께서 전립선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나이 겨우 73세(우리 나이로) 예전과) 달리 오늘날에는 73세라는 나이가 죽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라고 생각되었기에 저는 무척이나 아깝다고 생각해 크게 서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10년만 더 사시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놀랍게도 제 기도는 “아버지께서 평안히 돌아가시게 해 주세요”로 바뀌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정신 차리고 다시 기도해도 어느덧 기도가 그렇게 바뀌었기에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순종했습니다.
실제로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평안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해 주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아직은 돌아가시기에는 아까운 나이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천수를 다하시고 돌아가셨다면 받지 못할 사랑을 누리신 것이 도리어 아버지에게는 축복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아버지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았습니다. 삶에 대한 미련을 강하게 표하셨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그분을 데려가시고자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제가 불효자일까요?
인생이란 오래 오래 살아야 더 행복하고 의미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김진홍 목사님이 예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드셀라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장수했고 예수님은 33세에 돌아가셨지만 무드셀러의 기록은 기껏 2,3줄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에 대하여는 성경 전체에 기록되어있으니 인생에서 길고 짧은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만일 저의 아버지께서도 오늘의 필자처럼 자신의 병으로 인해 느끼게 된 하나님의 은혜를 아셨다면 좀 더 행복하게 눈을 감으셨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갖고 있는 가시를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린도 후서 12장10절) 이렇게 그는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나 약점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느꼈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약할 때 느껴지는 주님의 은혜 때문일 것입니다. 시련이 닥쳐 괴롭습니까?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임을 생각하고 그것을 은혜의 때라고 여기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준비하신 비밀스러운 축복을 기대하면서 고난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성숙된 신앙의 소유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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