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을 넘어서야 진정한 믿음
목 차
1. 불확실성을 극복하는가가 고수와 루저의 차이
2. 불확실성을 넘어서야 진정한 믿음
3.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절대 순종의 믿음에서 시작된다.
1. 불확실성을 극복하는가가 고수와 루저의 차이
세상에는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만 이를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거나 적습니다. 주식투자의 경우를 봅시다. 성공적 투자자는 쌀 때 사서 비쌀 때 팔지만 대부분의 투자자는 비쌀 때 사서 쌀 때 팔기 때문에 재미를 보지 못하거나 도리어 손해를 봅니다. 쌀 때 사서 비쌀 때 사는 거야 삼척동자도 아는 투자의 원칙인데 그것이 안 되는 겁니다. 투자 기회를 아예 몰라 못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거짓 정보에 속아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왜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올바른 정보의 유무와 함께 정보에 대한 분석과 판단능력의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정보가 없으니 판단을 제대로 못하고 또 설령 있더라도 분석과 판단능력이 부족하니 실패를 하게 됩니다. 주식투자의 경우를 봅시다. 고수들은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손에 넣거나 평범한 정보에서 움직임을 포착하여 남보다 한 발 일찍 움직입니다. 하지만 루저들은 남들이 움직일 때 같이 움직입니다. 그러니 고수들은 아직 시장이 움직이지 않을 때 먼저 이익을 남길 자리를 확보하지만 루저들은 그것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거죠. 모두가 다 ‘사자’ ‘팔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이미 게임은 끝난 겁니다. 모두가 사면 가격은 당연히 비쌀 것이고 모두가 팔면 가격은 떨어지니까요.
고수들에게는 자신들의 정보와 그에 대한 분석능력의 결과를 믿고 움직입니다. ‘믿음’이 있기에 성공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는 말은 종교적 믿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확실한 것을 믿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믿을 수가 있느냐입니다.
2. 불확실성을 넘어서야 진정한 믿음
오늘의 본문은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치른 첫 전투라 할 여리고성 전투에서 하나님은 엉뚱하게도 성을 7일간 돌라고 하는 작전을 지시합니다. “아니 우리가 뭐 관광하러 온 줄 아시나” 이런 불평이 나올 법도 한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묵묵히 성의 주변을 돌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7일째 성을 돌고 함성을 외치자 2중으로 되어 철옹성 같던 여리고 성이 무너집니다. 마지막으로 성을 돌 때까지도 성에는 금 하나 가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돌파구가 보이기도 전에’라는 제목처럼 진정한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누가 봐도 확실한 징조가 돌파구가 보이는 상태에서 믿는 것은 참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려도” 믿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죠. “이 세상 모두가 내게서 멀어져도 너만은 내게 남으리”라는 노래 가사가 있습니다. 상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적이 일어나 누가 봐도 증거가 확실한 상태에서 누가 믿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가격이 오를거라고 믿을 때는 누구나 살 것이고 내릴 거라고 믿을 때는 누구나 팔기 마련인 것처럼 그것은 결코 성공을 가져올 수 없듯이 불확실한 상태에서의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하여 주시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이라면 내가 뭔가를 확실하게 보여준 다음에야 믿은 사람과 결과를 보여주기도 전에 믿고 따른 사람 어느 쪽을 믿음 있는 사람으로 여기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저에게 물질 훈련을 시키실 때 먼저 저에게 믿음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 얼마를 헌금하라’고 마음에 감동을 주시지만 결코 미리 그것에 대한 보상을 주시지는 않으십니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헌금하라고 하시며 미리 2,000만 원을 저에게 쥐어주신다면 그거야 매우 쉬운 일이지요. 하지만 그 어떤 보증도 없이 1,000만 원을 내라시면 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 믿음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한 두 번 그렇게 믿음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면 믿음이 확신이 되어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드리게 되더군요. ‘아 이렇게 해서 믿음이 성장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불확실성을 넘어서야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도 부담되는 헌금을 요구하실 때는 일말의 불안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거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기도하게 되지요. 그러다 확신이 들면 실행에 옮기지만 그때까지는 불안이 엄습합니다. 하지만 ‘신실하신 주’께서 저의 정성에 응답하시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에 그 불안은 점점 약화되고 있습니다.
3.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절대 순종의 믿음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물질에 대한 믿음뿐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전반적인 믿음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믿음이란 결코 하루아침에 성장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인간관계에서 그렇듯이 신뢰와 믿음은 처음에는 아무 증거 없이 시작되지만 결국 꾸준하게 이어지는 관계 속에서 쌓여가고 어느 순간 확신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리한 요구를 하신다면 아마도 믿음을 쌓아가게 하도록 하시는 것임을 믿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기도로서 확인하는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할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의 헛된 마음을 부추기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믿음은 평안한 상태에서는 생기지도 굳건해지지도 않습니다. 역사를 보면 외침이나 시련을 많이 겪은 민족이 강성해진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일본에게 식민지가 될 정도로 약화된 것은(고구려의 영광과 비교해) 상식과는 달리 우리가 외침이나 시련이 적은 평화로운 시대가 길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일본이 제국주의 시대에 강대국으로 부상한 것은 외침은 적었지만(우리보다 훨씬 더) 국내의 혼란이 끊임없이 내전과 대립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내전과 대립은 내부의 결속력을 다지고 위기에 대한 대처능력을 키워주었던 것이죠.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고난의 뒤에 축복이 기다리니 견디라는 이 가사 하지만 그것은 반쪽만의 진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축복이 기다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믿음이 굳건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축복이란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 그것이 최종적인 목적은 아닌 것입니다. 믿음을 성장시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늘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우리는 가장 성공적인 신앙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슴설레이는 일 아닙니까?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사실에! 우리가 아무리 많은 축복을 받는다 하여도 언젠가는 죽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축복은 함께 사라집니다. 나사로가 살아났어도 결국 그도 다시 죽었던 것처럼. 하지만 하나님과의 동행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져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우리에게 참된 행복 평화를 안겨줍니다. 천국에 살아도 마음에 평화와 행복이 없다면 그것이 과연 천국이겠습니까?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해 영원한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크리스천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바로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절대순종’의 진정한 믿음을 갖는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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