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왜 피흘림을 필요로 했는가?
<본문>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누가 복음 9장 23절
목 차
중요한 만큼 늦어지는 기도응답
2. 구원에 피흘림이 필요한 이유
3. 십자가의 정신의 올바른 이해
1. 중요한 만큼 늦어지는 기도응답
“왜 배우자에 대한 기도는 응답이 늦어지나요?” 청년들이 이런 질문을 자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조금은 놀라고 말았습니다.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도리어 배우자에 대한 기도가 빨리 응답된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 아닐까요? 배우자를 고르는 것이 그렇게 조급히 결정될 사안일까요?
누군가 슈퍼에서 음료수를 사려고 합니다. 그가 크리스천이라 어느 음료수를 사야할 지 고민 끝에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응답은 조속히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아무도 –제정신이라면- 그것을 위해 금식기도나 철야기도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어느 음료수를 살지 결정해 주세요”라고 외치며 밤을 새거나 밥을 굶지는 않습니다. 그럴 정도의 중요성을 가진 결정이 아니니까.
하지만 음료수를 사는 문제가 좀 더 시간을 들여 결정할 사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름 수련회에 준비할 음료수를 고른다고 칩시다.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니 보다 적절한 것을 고르고 싶을 것입니다. 취향도 가지각색인데 함부로 고르기는 어렵습니다. 자칫 수련회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니까요. 고작 음료수라고 할지 모르나 사람들은 그런 것 하나로도 불평불만을 터트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철야를 해야 할지도 모르고 금식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슈퍼에서 자주 물건을 구입합니다. 아주 일상적인 행위이지요. 요즘은 인터넷 쇼핑몰이 잘 되어 있어 그 횟수가 줄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앉아서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구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거리에 잔뜩 늘어서 있는 슈퍼나 편의점은 사라졌을 테니까요. 일상적인 행위는 일상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중요성이 떨어집니다. 다소 실패를 해도 그 여파가 상대적으로 작으니까 신중해야 할 필요도 작을 것입니다. 그러니 고민도 준비도 상대적으로 별로 필요 없겠지요.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는 것 취업을 하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전혀 다릅니다. 대학을 두 번 세 번 진학하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취업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경우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아침에 취업해서 점심 때 갈아타고 저녁 때 전직하는 미친 짓(?)을 누가 하겠습니까?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이 매일 반복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취업이라면 평생에 몇 번 있을 법한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만큼 사람들은 이를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준비를 합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철야기도 금식기도 새벽기도 등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음료수를 사기 위한 기도처럼 기도하자마자 또는 몇 분 내로 응답이 내리기를 바랄 사안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두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기도합니다. 심지어 어려서부터 그 기도를 드리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요즘엔 초등학생마저 대입이나 취업을 염두에 두고 공부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정도이니 예전보다 더 하겠지요.
그렇다면 배우자에 대한 기도는 어떨까요? 세상이 변하여 이혼이 죄악시되지도 않고 특별한 것도 아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한 명의 배우자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말은 배우자의 선택이 대학진학이나 취업보다 더 중요하고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직업이나 대학진학은 선택을 무르기도 변경하는 일이 자주 있지만 배우자를 무르거나 변경하는 것은 이런 것에 비하면 많은 고통과 비용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물건이라면 갖다 버리기라도 하지. 사람은 그러지도 못 하잖아” 우리는 가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일본의 영화감독이자 배우 개그맨으로 활약하는 피터 다케시(본명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이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막대한 재산을 주고 이혼을 하여 그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재산상의 큰 손실이라는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했죠.
따라서 배우자에 대한 기도에 응답이 늦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빨리 주어진다면 의구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응답인가’라고. 오늘날처럼 연애도 결혼도 너무 쉽게 이루어지는 시대에 어쩌면 마귀는 그러한 조급증을 역이용하여 결혼과 가정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파괴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왜 빨리 응답을 안 해 주시는 거야’라고 하는 마음을 품는 순간은 마귀가 역사하기 딱 좋은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래 알았어 빨리 답해 줄게’ 하며 답을 던져 주면 기도하던 사람은 쉽게 순종의 미덕(?)을 발휘할 것이 불을 보듯이 뻔하니까요.
하지만 생각을 해 보십시오. 초등학생이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아니 뭐가 급해서 벌써” “요즘 초등학생들은 너무 조숙한 가봐..” 등등의 비난과 걱정의 말이 쏟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번 바꾸는 직업에 대하여 기도하는 것이 맞다면 (꿈이라는 이름으로) 평생 한 번 바꿀까 말까 하는 배우자에 대한 기도를 하는 것이 왜 문제일까요?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저 00대학에 가게 해 주세요” “저 00직업 갖게 해 주세요” 라고 초등학생이 기도한다고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데 왜 배우자 기도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역으로 말해 “그런 것은 나중에 때가 돼서 생각해도 (기도해도) 돼”라고 말하는 부모가 어른들이 무책임한 것 아닙니까? 심지어 대학진학과 취업조차 “공부(준비)나 열심히 해 결정은 그 때가서 하면 돼”라고 말하는 무책임한 부모도 있습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 피해를 본 학생들을 자주 접합니다. 4학년이 되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것은 아마도 생각없이 공부만 하다가 마지막에 신중하지 못한 선택을 한 결과이겠지요. 취업이나 진학에도 이런 무성의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보다 덜 중요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배우자 선택을 조급하게 응답받으려 하는 모습은 당연한 것일지 모릅니다.
2. 구원에 피흘림이 필요한 이유
이렇듯 한 개인의 결혼 취업 진학과 같은 문제도 우리는 많은 대가를 치루며 가장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데 그것이 인류의 구원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구원을 대가 없이 받는 선물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대가를 주고 구원을 받지 않으며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가 가석방의 특별사면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그가 대가를 치러서가 아닙니다. 물론 가석방의 혜택을 받으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대가가 될 수 없습니다. 살인죄로 복욕하는 사람이 아무리 모범수로 산다고 해도 그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본인에게 그것이 대가로 여겨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죄에 대한 대가로 여겨질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마치 자녀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부모님이 대가를 지불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물비를 마련하려면 많은 시간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녀는 그것을 거저 받게 될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저 받지만 실은 예수님의 살과 피의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루었으니 구원 자체가 거저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이 주시는 선물에 자녀가 감사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런 대가를 치루고 마련된 선물을 거저 주시는 주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예전에 중국에 파견된 가톨릭 선교사들에게 중국인들이 이런 질문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천주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왜 굳이 아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인류를 구원할 필요가 있는가? 그냥 죄를 용서해주면 될 것을”이라고. 이것은 우리들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의문입니다. 어차피 우리에게 거저 주는 구원인데 굳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여 그 고통을 겪게 할 필요가 왜 있는지. 부모가 재벌인데 굳이 자식에게 힘들게 선물을 준비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처럼. 아마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이런 생각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겁니다. 적어도 기독교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하지만 이 역시 조금 더 생각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부모가 부자라서 쉽게 선물을 받을 경우 자식은 그 고마움을 얼마나 느낄까요? 거의 모를 가능성이 큼니다. 또 자식에게 아무런 노력도 없이 선물이 주어진다면?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고생을 해서 선물을 마련하는 모습을 본 자식은 그에 대한 고마움이 남다를 것입니다. 또 부모가 선물을 쉽게 주지 않고 자식에게도 일정한 노력을 요구하여 준 선물도 마찬가지의 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대학진학 취업 결혼 등이 너무나 쉽게 이루어져 버린다면 그것이 한 인간의 삶에 주는 영향은 미미하겠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얻기 위해 준비하고 계획하고 기도하는 과정을 거치기에 우리는 그 값어치를 충분히 알 수 있고 또 그렇기에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 중에 그것이 도리어 재앙이 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행운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모든 로또 당첨자가 불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평소에 열심히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을 자신들의 일부로 삼는데 성공하여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로또는 재앙이 될 수 밖에 없겠지요. 10살짜리 자녀에게 주는 몫돈은 그 아이에게 독이 될 가능성이 큰 것처럼.
그렇다면 인류의 구원이 하나님의 직권으로 간단하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이유도 납득이 가실 겁니다. 십자가의 형벌이라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죄의 무거움과 끔찍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겁고 끔찍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인간의 몸을 가지고 저런 고초를 겪어야 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만들 충분한 동기가 될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선물이 사실은 혹독한 노동의 대가임을 알게 될 때 진정한 감사와 사랑을 부모에게 느끼는 것처럼 말이죠. 그것은 자녀에게는 일생의 교훈으로 살아 있게 될 것입니다.
3. 십자가의 정신의 올바른 이해
우리는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진정한 크리스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위해 희생과 헌신으로 지셨던 십자가를 우리가 질 수 있다는 것은 그 분의 사랑을 몸소 느낄 때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의 진정한 가치가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정신을 가지고 신앙을 위해 또한 영혼구원을 위해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살다가 갔습니다.
만일 자판기처럼 ‘너의 죄를 용서하노라’하고 쉽게 구원이 주어졌다면 과연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인류는 구원으로 인해 변화될 수 있을까요? 그저 죄만 용서받았다면 아무것도 변함이 없을 것이고 인류는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계속 헤매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정신이 우리를 변화시켜 옛사람을 벗어던지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 전서 1장18절)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린도 전서 1장21절) 이와 같은 구절들은 우리에게 구원의 과정이 결코 쉽고 가벼울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쉽게 얻어지는 것은 쉽게 사라지는 법이죠. 우리 크리스천은 십자가의 정신으로 무장해 살아갈 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는 주님의 명령은 그것을 전제로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더 이상 기도 응답이 늦어짐을 탓하지 마십시오. 늦어진다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많은 준비와 대가를 치러야 할 사안이기 때문이라고 주님께서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곧 기다림입니다. 주님이 어떤 시기에 어떤 응답을 하더라도 따를 수 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범을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는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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