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사랑 불행한 대한민국 작품 소개(2)
목 차
3. ’우리만‘의 사랑과 ’모두‘의 사랑의 불균형
4.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회 –보편적 도덕 윤리의 실종 까 고민해 봐야 합니다.
3. ’우리만‘의 사랑과 ’모두‘의 사랑의 불균형
경제적 양극화가 오래전부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소득은 높은데 그 소득이 일부 소수의 사람들에게 치우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렵게 살아가는 문제입니다. 빌게이츠가 어느 술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면 그 술집에 있는 사람들의 평균 자산은 엄청나게 상승하지만 그렇다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진짜 잘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전체 사회의 소득이 높아도 그것이 일부 사람들에게 치우쳐 있으면 잘 사는 사회는 될 수 없겠죠.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는 경제에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양극화는 바로 사랑의 양극화입니다. 양극화라기보다 ’불균형‘에 가깝다고 봐도 좋습니다. 어느 쪽이든 사랑이 골고루 퍼지지 않으니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따듯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해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노인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이 흘러가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치 비만과 기아가 함께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먹을 것이 너무 많아 버리기도 하고 너무 먹어서 비만으로 고생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기아선상을 헤메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죠. 다만 넘치거나 모자라는 것이 먹을 것이 아니라 (먹을 것에 대한 문제도 100%해결된 것은 아니죠)사랑이라는 것이 조금 특이하다고 하겠습니다.
사랑에는 ’우리만‘의 사랑과 ’모두‘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만‘의 사랑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고 싶고 받고 싶은 사랑입니다. 대표적으로는 남녀의 사랑과 부모 자식의 사랑이 그것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친구와의 사랑 형제자매의 사랑이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저절로 하게 되는 사랑이죠. 지극히 한정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만‘의 사랑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에 비해 ’모두‘의 사랑이란 이와 상반되는 사랑입니다. 자연스럽게 하기 어렵기에 종교나 철학 도덕 등이 일부러 가르치고 강조하는 것에 의해 이루어지는 인위적인 사랑이죠. ’인류애‘ ’보편적인 사랑‘ 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름처럼 그 범위는 넓고 크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 말고 ‘인의’ ‘자비’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스스로 하기 어려운 사랑 그래서 우리가 일부러 강조해야 하는 크고 넓은 사랑 하지만 너무나 소중한 사랑이기에 ‘모두’의 사랑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모두’에 의해 ‘모두’를 위하여 ‘모두’에게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 사회가 사랑이 넘치는데 불구하고 불행한 것은 ‘모두’의 사랑이 빈약하고 ‘우리만’의 사랑만이 넘치도록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만’의 사랑만으로도 세상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가족이나 형제자매 친구 부모와 자식 간에 사랑이 넘쳐 서로를 아껴주고 도와준다면 세상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만’의 사랑의 혜택을 제대로 누릴 수 없거나 모자라서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모두’의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만’의 사랑의 또 하나의 문제는 그것이 세상을 어둡게 만들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만’의 사랑이란 ‘우리만’을 위한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만’ 행복하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기 쉽죠. 그래서 ‘우리’의 밖의 존재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심지어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택배기사 학습지 교사 보험설계사의 죽음 뒤에는 ‘우리만’의 행복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도 좋다는 이기적인 사랑 ‘우리만’의 사랑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만’의 행복을 위해 남의 행복을 짓밟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만’의 사랑의 문제입니다.
‘우리만’의 사랑은 제한하고(없애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사랑을 통해 모두가 행복해지자는 주장을 하는 것이 종교와 사상입니다. ‘우리만’의 사랑은 그러한 종교와 사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기적인 사랑이니만큼 이에 대한 절제와 규제가 필요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언급을 하지만 메인은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경전 성경을 전부 뒤져봐도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다만 아름다운 사랑을 한 남녀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교훈을 줄 뿐입니다. “배고플 때는 밥을 먹어라” “청춘 남녀들이여! 사랑을 하라” “부모들이여 자녀를 사랑하라” 이런 가르침을 굳이 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사랑은 ‘모두’의 사랑입니다. 인위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랑 하지만 너무나 필요한 사랑이기에 종교와 사상이 목소리 높여 ‘모두의’ 사랑을 외쳐 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방이 만들어진다고 건물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방들을 연결할 골격이 함께 만들어져서 모든 방들이 이어져야 비로서 건물이 완성되는 것처럼 ‘우리만’의 사랑이 세상에 존재해도 그것을 이을 ‘모두’의 사랑이 없다면 세상은 결코 완전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바로 ‘우리만’의 사랑이 제대로 ‘모두’의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불균형을 가져와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또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심지어 혐오하는 사회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만’의 사랑이 갖는 ‘이기적’인 면이 넘치니 고통과 슬픔이 넘쳐 사회가 전체적으로 불행하여지는 것이죠. “ ‘우리만’ 행복해지면 된다”는 사람들이 넘치는데 그 사회가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 사회는 그것을 완화시키고 중재하여 사회를 정화시켜주는 ‘모두’의 사랑이 미약하니 누구도 이를 제어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4.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회 –보편적 도덕 윤리의 실종
우리 사회를 오랫동안 지탱해온 정신적 지주는 바로 유교 구체적으로는 성리학이었습니다. 성리학적 가르침과 교훈은 우리 민족에게 절대적인 것이었기에 함부로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충과 효 인과 의 그리고 예와 지를 기본으로 하는 유교적 덕목은 우리의 삶을 이끄는 기준이었습니다. 삼강오륜과 같은 구체적인 가르침이 이를 뒷받침하여 기반을 튼튼하게 하였죠.
하지만 근현대의 역사를 거치면서 유교는 그 힘을 잃어 갔습니다. 서양에서 들어온 갖가지 사상들은 인간의 자유와 권리 평등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그에 반하는 내용을 갖고 있는 유교는 점차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시절 유교를 기초로 한 윤리 도덕의 교육을 강조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복권되기도 하였지만 민주화 운동으로 크게 도전을 받고 오늘날에는 권위를 거의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2,500여년 전 춘추전국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등장한 유교는 오늘날 더 이상 우리의 지지를 받기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유교를 대신할 어떠한 정신적 지주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서양에서 들어와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독교가 그런 역할을 해 주고 있을까요? 아니면 유교에 의해 억압되어 있던 불교가 유교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요? 그도 저도 아니면 서양에서 유입된 사상과 철학이 우리의 삶을 이끌 수 있을까요? 아쉽지만 어느 것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유교를 배척하면서도 그것에 대체할 것을 어느 것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를 지탱할 정신적 지주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아노미 상태이죠.
종교가 힘을 잃게 된 것은 근본적인 한계 때문입니다. 내세주의 기복주의 구원주의가 우리나라 종교의 중심적 내용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원래 종교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닙니다. 종교란 삶을 바로잡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현실을 도피하도록 사람들을 이끌기 때문에 현실의 개선에 별다른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유교가 인의예지로 현실의 삶을 바로잡으려고 애쓴 것과 대조적입니다.
그렇다면 종교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각각의 종교의 핵심적인 교리인 인의, 자비, 사랑일 것입니다. 인의, 자비, 사랑이 무엇입니까? 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배려와 도움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말하는 ‘모두’의 사랑입니다. 제가 ‘모두’의 사랑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갑툭튀’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종교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죠. 그것은 ‘우리만’의 사랑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고 인류가 함께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도록 이끌기 위한 이념이요 사상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가 우리나라 종교에서 제대로 강조되고 있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말하기보다 죄의 용서와 구원 그리고 축복 천국을 전하는 것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기독교도로서 50년 가까이 살아온 저로서는 그렇게 보입니다. 물론 기독교의 교리의 핵심은 사랑이기에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사랑을 말한다고 해도 ‘우리만’의 사랑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가 기독교가 보다 강조해야 할 ‘모두’의 사랑은 그다지 언급되지도 않고 매우 피상적입니다.
교회에서 아버지 학교 어머니 학교에 적극적인 것은 그러한 사례 중 하나입니다. 물론 가족의 관계를 위한 교육이나 가르침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왜 교회가 그런 것에 앞장서야 합니까? 교회가 무슨 심리상담소도 아닌데 말이죠. 그런 것은 세상의 기관에 맡기면 됩니다.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은 ‘모두’의 사랑을 가르치는 일이고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우리만’의 사랑은 저절로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을 가르친다면 신앙교육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하지 좋은 엄마 아빠가 되는 기술적 교육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에 치우친 것은 교회가 기독교가 ‘모두’의 사랑을 가르칠 의사가 박약하다는 증거이죠. 왜냐하면 ‘모두’의 사랑을 가르치는 것은 부담스럽기 때문이죠. 이웃을 사랑하라 자선을 베풀라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계속하면 아마 인기를 얻기가 어렵죠. 하지만 가족관계 개선 프로그램이라면 관심을 모을 수 있겠죠? 한마디로 말하면 종교가 세상을 리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풍조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셈입니다. 종교가 종교의 역할이 아니라 사회교육을 위한 역할을 하고 있다면 종교의 역할을 누가 해야 할까요?
불교의 경우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 불교 승려 중에 대중에게 여러 가지 메시지를 전하는 인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인 지혜를 가르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계발강사나 힐링강사처럼 행세합니다. 예전에 법정이라는 승려는 ‘무소유’를 통해 종교적인 가르침을 주었지만 지금의 소위 ‘인기승려’들은 주구장창 테크닉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불교의 승려가 그런 것을 가르쳐야 합니까? 그것은 심리강사들의 몫이죠. 그러다 보니 불교 본래의 가르침에서 멀어지는 느낌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들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자체를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것만으로 끝나도 되겠습니까? 그들이 강조하던 자비는 도대체 어디로 가 버렸단 말입니까?
이러한 종교의 변화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해야 할”것을 거부하고 “하고 싶은” 것만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회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가 아닐까 합니다. “해야 할” 것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에만 마음을 두는 사회 이것이 우리의 현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보편적 도덕과 윤리의 실종이라 하겠습니다.
어느 역사 드라마를 보니까 “그러니까 네가 유학을 잘못 배운 거다”라는 꾸짖음을 하더군요. 저는 오늘의 우리의 상황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민주주의를 잘못 배운 것입니다”라고. 서양의 민주주의는 기존의 모든 권위와 가치 가르침 종교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잘 발달된 독일에서조차 국가의 세금으로 기독교에 대한 지원을 합니다. 기독교의 이름을 내세우는 정당이 정권을 잡기도 합니다. 대통령이 국회에서 성경을 인용한 제목의 연설을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민주주의와 종교를 대립되는 것으로 여기기는커녕 적극적으로 그 가르침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민주주의를 빙자하여 그 모든 것을 송두리째 던져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글자 그대로 ‘엿장수 가위 마음대로’ ‘네 멋대로’ 살라는 것이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합의사항이 된 것 같습니다. ‘내 돈 가지고 내가 마음대로 하는 데 왜 말이 많냐’라는 말은 우리가 자주 접하는 주장이죠. 민주주의= 멋대로 하는 것 이라는 엄청난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 가르침을 거부하죠. 자기 멋대로 하면 되는데 가르침이 왜 필요합니까? 그러니 교회가 사찰이 ‘관계개선프로그램’이나 운영하며 기술이나 가르치는 심리상담소가 되었죠.
이렇게 말하면 당연히 반발이 일어날 겁니다. “아니 그럼 우리가 무질서한 삶을 산다는 건가? 우리나라 범죄율은 낮고 공중도덕도 잘 지켜지고 있는데 무슨 소린가?”라고. 예 맞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매우 잘 지키고 있습니다. 차선도 잘 지키기고 신호등도 잘 지킵니다. 냉장고까지 주면서 지키라던 정지선 지금은 누구보다도 잘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닐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가치 사랑과 자비 인의에 의해 사회구성원들이 서로를 돕는 마음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남을 착취하고 우리만‘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해야 할‘ 것에 대한 가르침을 거부하고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욕망을 채우려고만 합니다. 가르침을 거부한다면 누가 올바른 길을 줄 수 있겠습니까?
종교도 철학도 사상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것을 포기하고 대신 힐링이나 심리상담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템플스테이‘라 고 해서 휴양소 역할까지 합니다. ’템플스테이‘란 속세의 삶에서 벗어나 삶의 때를 지우는 프로그램인데 이제는 그런 기능은 온데간데 없고 자연 속에서 심신을 쉬게 하기 위한 캠프처럼 되었습니다. 음식도 사찰 음식이 아니라 세상 음식을 배달받아 먹기도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죠. 불교사원이 아니라 무슨 리조트 시설입니까? 다음엔 뭘 하게 될까요? 돈벌이도 되고 인기도 얻으니 뭐든 못하겠습니까?
이렇게 종교마저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하고 세상과 타협을 하고 있으니 세상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해야 할‘ 것 ’해야 할’ 사랑을 가르치는 것은 부담스러우니 기피해야 하고 모두가 원하는 것만 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가르침이 사라지고 하고 싶은 것만 하게 되니 그 결과가 바로 행복하지 않은 사회입니다. 가르침을 거부하고 ’하고 싶은‘일만 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자살과 혐오 대립으로 가득한 불행한 사회인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멋대로 하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면 행복해야 하는데.
그것이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멋대로 하게 하면 절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것이. 그러니 종교 철학 사상으로 교화시켜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한 것이지 하고 싶은 것만 시키려면 굳이 국가가 돈 들여 교육을 시킬 이유가 있습니까? 하고 싶은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해야 할‘ 것을 제대로 하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것을 제대로 해야 인간사회가 인간사회처럼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문명이 오늘날에 이른 것은 바로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것을 포기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이래도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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