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사랑하기(7) 상대를 정죄하지 마십시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아이들의 의무일까요? 아니면 바람직한 것일까요?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 친절한 제가 설명을 하죠. 바람직한 것은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는 뜻이고 의무는 좋고 싫고를 떠나 무조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군대에 남자들이 가야 하는 것은 바람직해서가 아니라(물론 그렇지만)의무이기 때문이고 이웃돕기 성금을 기부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그렇다면 답은 나온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바람직한 것이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처벌받는 법도 없고(정신적 처벌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지만)그래서도 안 될 것입니다. 담배를 피우거나 다른 학생을 때리거나 괴롭히는 것은 해서도 안 되고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무이기도 합니다.
자녀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거나 또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부모가 제재를 가해야 합니다. 즉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에 자녀를 정죄해도 좋고 또 해야 합니다. 그것을 게을리 하는 부모는 부모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지 않는 것이죠. 경우에 따라 그로 인해 부모가 처벌을 받거나 배상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직한 것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어떤 성인이 담배를 피워 건강을 해치고 있다고 해서 그를 죄인으로 여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금연을 권하고 이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겠지만. 공부를 안 하는 자녀에게 공부를 하도록 권하고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매우 바람직하지만 정죄는 안 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어느 직장에 취업을 했는데 그쪽에서 아주 특이한 제안을 했다고 합시다. 어떤 제안이냐 하면 10년간 최소한의 생계는 책임질테니 급여를 일체 받지 않고 일을 할 것 그렇게 해 주면 10년치 연봉의 두 배를 10년 후에 지불하겠다고. 어떻습니까? 2배를 받을 것이니 받아들이겠습니까? 당장 급여를 받을 수 없는 것은 곤란하니 거부하겠습니까?
아이들에게 공부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공부를 한다고 돈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성적이 올랐을 때 부모가 보너스조로 특별용돈을 줄 수도 있지만 그건 특별한 예외이지요. 어른은 다를까요? 위의 제안을 받는다면 대부분(거의 99%아닐까요?) 거절할 것 같습니다. 한 두 해도 아니고 10년을 급여없이 밥이나 먹고 살기가 어디 쉽습니까?
그렇다면 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의 마음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해를 한다는 것은 그것이 좋다거나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우리는 “이해는 간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처벌까지 면제해 준다는 보장은 없는 것처럼.
교육에 오래 종사하면서 느낀 것은 부모들은 공부를 하지 않는 자녀를 죄인취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를 속썩이려고 일부러 하지 않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죠. 그리고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온갖 인격적 모욕을 가합니다. 정말 이래도 좋을까요?
하지만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이 공부의 대가를 받는 것은 10년이상의 세월을 기다린 후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공부를 할 의욕이 없죠. 10년 후에 2배의 연봉을 줘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처럼. 게다가 모두가 퇴근 후에는 적당히 휴식을 취하거나 삶을 즐기는데 아이들에게 하루종일 공부를 하고 방과후에 또 공부를 하라는 것은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닐까요? 적어도 아이들의 시점에서는. 공부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기 싫은 것은 죄인의 악행처럼 정죄될 일은 아니라는 것 자연스러운 생각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그야말로 어른들의 ‘내로남불’이 되겠지요.
하지만 부모들은 자신들은 일을 편하게 하고 싶어하면서 자녀들의 그런 심리는 이해하지 못하기 쉽습니다. 심지어 밤잡까지 줄여가며 공부하도록 강요하고 그것을 거부하면 정죄하는 것이죠. 심지어 어떤 부모는 텔레비전을 거실에서 안방으로 옮기라는 교육전문가의 조언을 무시합니다. 그 정도의 인내도 거부하면서 왜 아이들에게는 초인간적(?)노오력(?)을 요구하십니까?부모가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공부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간해서 시런하지 못하면서 자녀에게만 공부를 강요하는 일도 있습니다.
“뭐가 다른가요? 정죄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공부를 하라고 한다면 같은 거 아닌가요?” 라는 반론이 나올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여전히 뭔가를 하도록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는 것이 같다고 생각합니까?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분노나 좌절감이 느껴지지 않거나 덜 느껴지겠지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면 더 큰 분노와 좌절감을 느낄 것입니다. “아이구 내 팔자야 자식 때문에 이렇게 힘들다”라는 불평도 나올 것 같습니다. 아닌가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자녀에 대한 사랑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미움과 적대감만저 가질 수 있는 상황인데 아무리 자식이라도 어려울 것입니다. 정죄의식은 이렇게 마음의 사랑을 방해하는 독소적인 요소입니다. 인정하시나요?
성적 말고 좀 더 일상적인 주제를 다뤄봅시다. 지금도 그런 부모가 있는지 모르지만 예전에 엄마와 딸 사이에 ‘머리 묶기’논쟁이 있었습니다. 가정방문을 자주 하니 자연스럽게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학교에서도 여학생들의 긴 머리를 묶고 다니도록 규제를 했는데 가정에서도 그런 것을 강제하는 부모가 제법 계셨습니다. 어떤 남자 교사는 가발까지 동원해 긴머리를 풀고 다니는 것이 거추장스럽다는 주장을 학생들 앞에서 시전하기도 했죠.
이 논쟁의 배경에는 세대차이가 있습니다. 어른들은 사춘기 소녀들이 머리를 묶고 다니는 모습을 흐믓하게 바라봅니다. 좀 더 안정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긴 생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는 모습은 불안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연령을 불문하고 긴 생머리를 선호합니다. 물론 남성들 중에도 적지 않게 그런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두 세대의 감각이 충돌하는 것이 ‘머리 묶기’논쟁의 실체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머리 스타일까지 어른들의 지시대로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정도면 어른들이 아이들을 자신들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일종의 인형처럼 대하고 있다는 것이죠. 민주주의가 발달했고 개인의 자유와 인격이 존중되는 시대에 이것은 분명 잘못된 생각일 것입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요?
실제로 사회는 소녀들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제는 머리를 묶고 다니는 여고생은 거의 없습니다. 학교가 자유를 허용한 것입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는 시대에 머리를 묶어라고 강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규제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어른들의 마음을 만족시켜 준다는 터무니 없는 이유로. 아이들이 어른들의 취향이나 만족시켜주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은 지금 시대와 전혀 맞지 않습니다.
어른들의 ‘정죄의식’은 그들의 욕심의 투영의 결과일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위해 남을 움직이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남성은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치마 좀 입고 다녀라”고 면박을 주었다고 합니다. 남성으로서는 애인이 치마를 입음으로써 각선미를 감상하고 싶거나 보다 여성미를 느끼게 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했을 것입니다. 물론 부탁이나 바람으로 그러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것을 강요할 권리는 없을 것입니다.
어른들의 ‘정죄의식’도 바로 이러한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저 자신도 놀란 것은 머리를 묶은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아마 얌전하게 보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아이들이 고작 어른들을 편하게 하기 위해 사는 존재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이들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무척 불쾌할 것입니다.
상대를 자신의 욕망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 자체부터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이들이든 어른이든 각자의 삶과 취향 개성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즉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줘야 한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특정 취향이나 성격을 마치 보편적인 것처럼 강요하는 것은 상대를 도구화하는 결코 해서는 안 될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죄자 의식을 갖지 않기 위한 가르침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욕구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겐 자신의 삶을 살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당신의 기대나 요구를 실현시켜주지 않는다고 하여
정죄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욕구와 기대를 실현하는 것이 설령 그 사람의 삶에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피해를 본 것 뿐 이고
당신은 그것을 안타까워하면 되는 것입니다.
가련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십시오. 그리고 인내와 끈기로 권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이 취해야 할 올바른 사랑의 길입니다.
사람들에겐 자신의 삶과 생각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내 생각을 따라 주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상황이 내 마음에 안 드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상황 역시 자기 움직임을 이어 갈 뿐입니다.
바꿀 수 없으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맞추세요.
맞추기 싫으면 바꾸세요.
단 상대가 거부하는 것에 분노하지 마세요.
그것이 당연한 것임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고 대책을 세워 바꾸어 갈 수 있습니다. “
정죄의식을 극복하기 위한 다짐
상대에게 허물이 있습니다. 잘못이 있습니다. 결함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비난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주십시오.
상대의 허물이 어디서 왔을까 하고.
상대로서는 넘기기 어려운 환경이 놓여 있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에게 그런 허물이 없는 것은
당신이 그보다 유리한 환경이나 조건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그 보다 운이 좋은 것뿐입니다.
그래도 정죄할 마음이 듭니까?
상대의 허물은 애처로운 마음으로 보시면 안 되겠습니까?
상대가 그로 인해 겪어온 그리고 겪고 있는 고통에
더 마음을 두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함께 극복하고자 노력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극복하기 어렵다면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없을까요?
신도 당신의 허물을 다 대가 없이 용서하셨습니다.
당신도 상대도 모두가 신의 사랑을 받아야 할 불쌍한 죄인일 뿐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차이는 그저 껍데기일 뿐입니다.
신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정죄의식을 버리지 못하면 마음의 사랑은 불가능하며 사랑으로 행복하기도 어렵습니다. 상대를 비난하는 마음을 품고 어떻게 그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행복할 수 있으며 또한 마음의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정죄의식은 결국 자신의 이기적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욕망에서 벗어나십시오. 마음의 사랑으로 행복하시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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