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건전한 사회를 위하여 -물질주의 가치관에서의 해방

닥터 양 2021. 1. 16. 20:12

건전한 사회를 위하여 -물질주의 가치관에서의 해방 

 

목 차

1. 기승전취업인 나라 대한민국

2. 문제의 원인은 돈과 물질 지상주의적 가치관

3. 그림자는 잡을 수 없다. -헛된 욕망이 가져오는 불행

4. 삼성공채가 미달되는 사회 그림자가 아닌 행복을 쫓는 사회

 

1. 기승전취업인 나라 대한민국

아니 이럴 수가 ......정원보다 지원자가 더 적다고?”

그럴 리가 있나? ....작년만 해도 20만이 지원해서 삼성고시라고 했잖아?”

그러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만약 이런 대화가 오간다면 그것은 기적일까 아니면 이변일까? 특별히 삼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국내 대기업공채에 또는 공무원시험에 교사임용고시에 공사시험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떨까? 그동안 취업시장에서 갑이었던 이른바 신이 내린 직장을 이번엔 취업자들이 외면한다면?

  물론 절대 있을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 나라의 국민들은 이런 직장에 들어갈 것을 오매불망 꿈꾼다. 모든 것이 그것을 향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 듯 그런 것과 아무 관련 없을 것 같은 것까지 실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가?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길은 취업으로 통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울 강남은 왜 땅값이 유달리 비쌀까? 그곳의 주택들이 고급이라서? 천만에 비가 줄줄 새고 수돗물에서 녹물이 나오는 곳조차 있다. 낡아서 수리해야 할 곳도 많다. 절대로 고급이 아니다. 다른 곳에 가면 궁궐같은 크기의 신축아파트에 살 돈을 구닥다리 아파트에서 녹물을 마시며 살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지 않는가? 바로 그것은 대학진학 때문이다. 자녀의 대학진학을 위해 강남은 성지가 되어 있고 그로 인해 땅값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있는 것이다. 대학진학은 무엇 때문에 중요한가? 진리 탐구를? 인성교육을? 노노 절대 아니다. 바로 취업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교육은 두 가지에 집중되어 있다. 하나는 대학진학 또 하나는 취업이다. 좋은 대학을 가야 취업이 잘 되니 일차로는 진학에 목숨을 걸고 있고 그 뒤에 취업을 위한 준비가 남아있다. 진학과 취업은 구별하기 어렵다. 진학이 취업이고 취업을 위해 진학이 존재하니 말이다. 한 가정에 아이가 태어난 순간 그 아이의 모든 것은 진학과 취업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독서를 하는 것도 마음의 양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논술 시험과 취업고시를 위해서다.

  반대로 그것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모조리 배제되어야 한다. 음악을 듣거나 친구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진학과 취업에 관계가 없거나 방해가 되니 억제되어야 한다. 삶의 의미를 가치를 생각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럴 시간에 수학문제를 더 풀고 영어단어를 더 외워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녀의 대화가 공부에서 시작해서 공부로 끝나는 경우도 그리 드물지 않다.

  아버지는 일찍 집에 돌아오면 안 된다. 아이들의 사교육비를 벌어야 하니까. 일찍 돌아와 아이들의 상담상대가 되어 주는 자상한 아빠는 무능한 존재일 뿐이다. 아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엄마 역시 악한 존재이다. 아이들을 효율적으로 공부에 몰두하게 하는 엄마가 최고의 엄마인 것이다. 회사나 공장에서 일에 집중시키는 감독관이 최고인 것처럼 말이다. 가정은 사랑과 평안의 장소가 아니라 진학 취업의 전진기지에 불과하다.

2. 문제의 원인은 돈과 물질 지상주의적 가치관

  이런 나라이니 삼성고시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사교육천국이 된 것이 아닌가? 무엇 때문인가? 왜 이런 나라가 되었는가? 정부가 나빠서? 기업이 나빠서? 아니면 대학이 나빠서? 도대체 이 모든 것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물론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취업자를 압박하는 기업도 문제이고 그런 기업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학교도 또 입시생에게 갑질하는 대학도 문제이다. 이런 문제들을 알면서도 손도 못쓰고 있는 정부도 나쁘다. 모두가 조금씩은 책임을 져야 할 죄인들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가치관이 아닐까 싶다. 인생의 목적이 오로지 돈과 물질적인 성공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가치관 말이다. 인간의 존엄성도 삶의 풍요로움도 진정한 마음의 교류도 저버리고 오로지 돈과 물질적인 성공만을 최고로 여기는 가치관이 이 모든 문제의 배경에 있는 것이다.

  과거에 대학은 취업을 위한 기관이 아니었다. 대학에 기업의 관계자들이 와서 머리를 숙이고 졸업생을 보내달라고 하던 시절도 있었다. 아니 그런 기간이 결코 짧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제아무리 명문대라도 그런 식의 도도한(?)태도를 보이기 어렵다. 되려 기업에 가서 취업을 부탁하는 절절한 대학인들의 모습이 더 눈에 뛸 것이다. 아닌가?

  대학입시는 과거에도 중요한 교육의 목적이었지만 모든 것을 던지고 매달려야 할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생들도 동아리활동은 있었다. 하물며 중학생이나 초등학생이야 말해 무엇하랴? 3이 아니라면 입시에만 올인하는 삶을 사는 학생은 오히려 소수였다. 그런데 지금은 유치원생까지도 입시를 염두에 두면 살아가야 한다. 책을 읽어도 논술을 위한 대비이다. 되지도 않은 발음으로 영어를 배우는 것도 그렇다. 취미활동조차 입시의 스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내신성적으로 학생들을 얽매니까 고등학교 3년이 전부 입시의 과정이 되어 버린다.

  누가 이렇게 하라고 강요한 것일까? 아니다. 그렇게 압력을 넣은 사람도 기관도 없다. 대학이 예전보다 고등학교나 학부모에게 더 뻑세게 공부를 시키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오히려 본고사 폐지로 입시공부의 부담을 줄었을 터이다.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문제를 내어 입시생을 곤경에 빠뜨렸던 악명 높은 본고사는 사라졌다. 학력고사이든 수능시험이든 그것이 아무리 어렵게 출제된 들 본고사에 비할 바인가? 수학과 대학생조차 쉽게 풀수 없는 수학문제, 영문과 대학원생조차 끙끙매야 하는 영어문제를 내던 본고사가 없는데도 왜 이렇게 사교육이 기승을 부리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쉽던 어렵던 경쟁이 있으면 승자와 패자가 있다. 승자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향한 레이스는 뜨거울 수 밖 에 없다.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 제한된 경쟁만이 가능했던 시절이 지나 이제는 모두가 이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것이 경쟁을 더 뜨겁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사교육시장을 부풀려 버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가치가 돈과 물질적 성공에만 집중되어 버린 사회가 된 점이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아닐까? 다시 말하지만 대학을 향한 뜨거운 레이스는 결코 학문에 대한 의욕이나 진리에 대한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이다. 대학이 주는 금전적인 보상에 대한 열망인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다른 것은 다 버려도 좋다는 (극단적으로 말하면)생각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교육의 정상화를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입학사정관제를 대비한 사교육이 횡행한다. 입시제도와 사교육은 사람과 그림자의 관계와 비슷하다. 입시를 개혁해도 사교육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마치 그림자를 잡을 수 없어 허우적대는 인간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인간은 그림자를 잡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교육제도의 변화로 사교육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가치관이 그대로 인 한에서 말이다.

3. 그림자는 잡을 수 없다. -헛된 욕망이 가져오는 불행

  모일간지에서 달관세대라는 말을 쓰면서 젊은이들의 삶을 조명한 일이 있다. 일본의 사토리세대에서 나온 말인 것 쯤 은 누구나 알 것이다. 돈과 물질적 성공을 포기하고 자신들만의 삶을 즐기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차가웠다. 한마디로 씨알이 먹히지 않는 소리다. 왜냐? 그런 젊은이가 주류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주류는커녕 사회적 현상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만약 누군가 그런 소리를 한다면 그는 당장 패배자혹은 루저로 낙인 찍힐 것이다.

  삼포세대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최근엔 사포 오포라고도 한다. 결혼 연애 출산을 포기한다는 삼포에서 취업과 주택까지 포기하니 오포가 된다. 이에 대한 매스컴의 대책이란 고작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자는 것이다. 양질의 일자리를 무한대로 늘리면 물론 해결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양질의 일자리란 어떤 절대적 기준이 아니다. 남보다 나은 삶을 제공해주는 일자리이다. 그런 일자리가 무한대로 나올 수 있는가? 나보다 못한 존재가 있어야 만족하는 사회  그것도 돈과 물질이라는 한 가지 판단기준 밖에 없는 사회에서 모두가 만족하는 일자리조차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결혼한 후 두 사람이 고생하여 가정을 일으켜 세우기로 하여 결혼을 하였다. 그러니 결혼이 비교적 용이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결혼이 바로 행복의 시작이어야 한다. 적어도 그런 보장이 필요하다. 여기서 행복이란 마음의 행복이 아니다. 물질적인 풍요함이다. 그러니 쉽게 결혼을 할 수 없다. 일정한 물질적 수준이 있어야 결혼이 가능하지만 과거에 비하여 그것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으니 말이다. 냉수 한 그릇 떠 놓고 결혼을 하여 열심히 일해서 조건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조건을 갖춘 후에 결혼을 하려 하니 쉽게 할 수 있겠는가? 설령 그런 좋은 조건의 사람이 있다해도 그 수는 매우 적다. 그러니 결혼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에라 안 하고 말지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 오를 것이다.

  삼포니 오포니 하는 것이 그러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지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해서 나온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역시 물질적 성공 돈이 전부인 사회가 낳은 비극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맺어진 부부들이 왜 그토록 이혼을 많이 하는지 생각해 볼 문제 아닌가? 그들의 생각대로라면 반대여야 하지 않을까?

사회구조나 경제상태를 비난하는 것은 매우 쉽지만 그런 점을 개선하기는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근본적인 것이 바뀌지 않는 한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가치관이 바뀌어 각자가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 삼성고시가 미달사태를 맞게 될 것이다. 그러면 기업이 갑질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학이 취업학원으로 존재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유치원생이 진학과 취업을 걱정하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아닌가?

  세상에는 가치있는 것들이 많다. 우정도 사랑도 중요하다. 예전에 어느 왕이 기묘한 실험을 했다. 그는 아이들의 언어습득이 선천적이라고 믿고 아이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한 쪽은 말을 정상적으로 걸게 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말을 절대 걸지 말게 한 채 양육하게 하였다. 말을 걸면서 양육한 아이들은 정상적으로 자랐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말을 못 배운 것이 아니라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 왕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먹을 것 입을 것 모두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언어를 통해 느끼는 인간의 사랑을 받지 못해 죽고 만 것이다.

  사람이 가난해서 단지 그것만이 이유가 돼서 자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여도 실제로 그에게 결정적인 사인이 되는 것은 무관심과 고독이라는 것이다. 에밀뒤르껭의 자살론은 인간의 자살을 고독감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반대로 유대감을 충분히 갖고 사는 인간이 자살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도 그의 결론이다. 어렵지만 나를 돕고 격려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죽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자살하기 쉽다. 어렵고 힘든데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자살을 감행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질 것이다.

  물론 물질적인 것이 전혀 필요없다는 식의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는 성경구절이 있다. 여기서 이 모든 것이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의 대상 즉 먹고 마시는 것이다. 즉 물질인 것이다. 신은 결코 물질이 필요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지정하지는 않았지만 바로 가치있는 삶이 아닌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예수는 성경 곳곳에서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라는 식으로 가치있는 삶을 가르쳤다. 그런 것을 우선시한다면 세상이 행복한 곳이 될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반대로 물질적인 것에 얽매인다면 도리어 불행해질 것이라는 경고도 아울러 주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거두리니 그렇다면 너의 모든 소유가 누구의 것이 될 것인가?” 라는 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등은 바로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매달리지만 원하는 것만큼 얻지 못해 고통받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얻고 싶어하는 수준의 물질은 늘 그들이 갖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높기만 하다. 그림자와 인간의 관계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만족할 날이 올 것인가? 절대 아니다고 본다. 그림자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4. 삼성공채가 미달되는 사회 그림자가 아닌 행복을 쫓는 사회

  그렇다면 그림자를 잡으려 하지 말고 그림자와 함께 살아가면 되는 것이 아닐까? 물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살지 말고 갖고 있는 물질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 이외의 행복과 가치를 추구한다면 물질에 대한 집착 역시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평소 그림자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물질이외의 가치를 찾기 위해서는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가를 자신의 조건과 가진 것에 비춰 깊이 성찰한다면 답이 나올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을 찾아 가는 삶을 산다면 물질에만 집착하여 모든 인생을 걸어야 하는 어리석음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위암으로 위를 절제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는가? 그들은 평소에는 작아진 위로 인해 끊임없이 시장기를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친구들과 포커게임을 하거나 하는 식으로 해서 즐거움에 빠져 있을 때는 시장기를 전혀 아니면 거의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그저 하는 소리가 아니다. 실제로 마음이 흡족한 상태에서는 위산이 적게 분비되기 때문에 식욕이 억제된다는 것이 검증된 사실인 것이다. 그래서 위가 작아진 사람들이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에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물질이란 그저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뚜렷한 가치도 행복도 모르는 사람들은 본능에 충실하게 되고 본능 중에서 물질에 대한 욕구는 가장 크다 하겠다. 가장 쉽고. 생각도 필요없고 고민도 필요없지 않는가? 그러니 물질에 사로잡혀 그것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사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건전한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인가 아니면 그렇지 못한 사회인가를 이러한 것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 한국사회는 그런 점에서 절대로 건전한 사회가 될 수 없다. 바로 물질지향적인 사회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린 황폐한 사회 그것이 한국사회의 슬픈 자화상인 것이 아니겠는가?

  삼성공채에 미달이 나오는 사회가 오길 바란다. 공무원시험이 미달되고 진정한 사명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교사를 지원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지나친 욕심일까? 오늘도 나는 그런 건전한 사회를 꿈꾼다. 비록 영원히 실현되지 못할지라도 그런 꿈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짝퉁이라도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