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 ‘새싹’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25-6)
자동차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면 그냥 고철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자동차는 달려야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는 자동이라는 명칭이 앞에 붙어 있지만 자동으로 달리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움직인다는 자동이라는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니라 누군가가 움직이도록 조작을 해 두어야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이죠. 일단 시동을 걸고 출발을 시켜놓으면 자동차는 글자 그대로 자동으로 움직이는 차가 됩니다. 물론 그렇게 된 경우도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핸들을 조작하거나 적당히 브레이크도 밟아 줘야 제대로 갑니다.
요즘은 사람이 운전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하는 글자 그대로 자동차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비행기와 같습니다. 비행기도 과거에는 인간이 일일이 조작을 해야 제대로 날았지만 지금은 거의 다 자동적으로 움직입니다. 예전에 우리나라 비행기가 사고를 당했는데 비행기 조종사들이 포커게임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 되었습니다. 저는 놀랐습니다. 아니 비행기를 조종하면서 어떻게 포커 게임을 하지 라고. 하지만 이미 비행기는 자동으로 움직일 정도의 수준이 되었기 때문에 일단 창공에 떠서 움직이게 되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이제는 자동차도 그런 수준으로 발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행기도 자동차든 제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의 조작이 전혀 필요없는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자동차나 비행기는 목표를 스스로 정할 수도 없고 또 가야할 이유를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인간이니까 누군가를 만나고 싶거나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기계는 글자 그대로 기계적으로 그러한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면 됩니다.
그렇다면 비행기나 자동차를 조종하는 인간은 완전히 자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갓 태어난 아기가 자동차나 비행기를 조종할 수 없습니다. 일단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니까 조종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조금 더 자라서 몸을 어느 정도 자유롭게 움직여도 조종할 능력이 없어(기술 등) 할 수 없습니다. 비행기나 자동차의 조종을 배워 면허를 따면 비로소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적어도 20년 전후의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조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동차나 비행기는 가야할 목적지가 있어야 조종을 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목적지는 글자 그대로 목적이 있어야 정해집니다. 목적이 있으려면 그가 그 목적을 이룰 필요가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차원의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목적은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있어야 정해집니다.
저는 예전에 가출청소년들과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무질서한 삶을 살았습니다.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나고 새벽녘까지 떠들고 놀았습니다. 술도 마시고 게임도 하고. 게다가 그들은 무분별한 남녀관계도 가집니다. 또 지나가는 아이의 돈이나 물건을 빼앗거나 본드를 흡입하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제대로 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왜 이럴까요? 그들은 인성이 엉망이기 때문일까요? 가정교육이 잘못되어 그런 것일까요?
물론 그런 점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꿈도 목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개념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목적도 없이 자동차를 몰고 나가면 여기저기 떠돌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삶도 목적이 없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죠. 한마디로 말하면 내키는 대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놀고 싶을 때 놀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삶이 반복되니 어떠한 거리낌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행기를 조종할 능력이 있어도 목적지를 정할 목적의식이 없으면 조종을 할 수 없습니다. 목적의식을 가지려면 인생관 가치관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인생관 가치관은 그 사람의 목적의식을 가지게 하고 그로 인해 삶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결정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비행기나 자동차를 조종해 어디를 갈 것인가도 그렇게 해서 결정됩니다. 적어도 그 조종이 의미 있는 성과를 내고자 한다면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목적의식을 가지도록 하는 가치관 인생관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를 지탱했던 가치관 인생관이 더 이상 힘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가치관 인생관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가치의 공백을 파고든 것은 바로 쾌락주의라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네 멋대로 살아라’입니다. 사실상 가출청소년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상태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소돔과 고모로와 비슷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가치관 인생관을 세워 모두가 공유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서로를 혐오합니까? 여혐 남혐에 노인혐오 어린아이 혐오(노키드존) 등등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지요? 흉악한 범죄도 자주 일어납니다. 그것은 과거와 달리 생계형범죄가 아니라 증오범죄나 인권말살의 범죄라고 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이익이나 쾌락을 추구하는 풍토가 이 나라를 덮고 있습니다. 사람의 도리나 윤리를 가르치면 ‘꼰대’니 ‘갑질’이라고 비난받습니다. 이게 나라입니까?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 소리 주님 들으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가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모두가 주를 필요해’에서)
마음대로 살아서 행복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왜 행복지수는 바닥이고 자살은 선진국 중 1,2위를 다툴 정도로 많습니까? 노인 빈곤율 노인자살율도 선진국 1위입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풍요로운데 어르신들은 더 불행합니다. 예전에는 우리의 미풍양속이던 효는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의 가치관 인생관이 무너져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무릇 지킬만한 것 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장 23절) 고 하는데 우리는 마음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인 마음을 지켜주실 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가져와 지키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너지면 생명이 무너집니다. 마음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자살한 사람들은 마음이 무너졌기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이지 자신이 처한 객관적 환경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은 비단 죽어서 구원을 받거나 살아서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 축복된 삶을 살아서만은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가치관 인생관의 기준이 되어 주실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쾌락에 빠져 소중한 마음을 지킬 어떠한 방패도 없어진 지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가치관과 인생관을 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일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다 이루어진 꿈은 꿈이 아니라 악몽이다“라고. 사람에게는 조금은 아쉽고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다 이루고 나면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도다“하고 숨을 거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다 이루었으니 살아계실 이유가 없어진 것이지요. 그러니 지나치게 다 이루어진 꿈은 사람이 살아갈 힘을 앗아가기 때문에 악몽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욕망에 제한을 두지 않고 그것을 다 이루고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살아갈 힘을 잃고 방황하며 그것을 감추고자 더 강한 욕구를 가집니다. 그렇게 끝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사회 그래서 더 살아갈 힘이 없어 새로운 욕망을 추구하는 사회 바로 이것이 우리의 민낯인 것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에서 탈출하여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길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에게서 탈출구를 찾으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고 하셨던 예수님 그것은 짐을 다 예수님께 맡기고 편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지기 쉽다“고 하셨던 말씀처럼 올바른 가치관 인생관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짐은 가볍고 멍에는 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자유롭게 한다‘고 하신 취지도 같습니다. 자유로운 삶이란 그저 멋대로 하는 삶이 아니라 마음의 자유로움을 느끼는 해방된 삶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해방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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