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의 사랑 표현하기 ‘하나님 사랑하기’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사랑하셨음이라(요한 일서 4장 19절)
어린 자녀가 정성들여 만든 선물-예를 들어 종이접기로 만든 꽃-을 받으신다면 기분이 어떠실까요? 금전적 가치는 그다지 없는 이 선물에도 여러분은 감동을 받으시지 않겠습니까? ‘아 우리 아이가 참 갸륵하구나. 나를 위해 이런 것을 준비하다니’ 하며 기뻐하는 여러분의 마음에는 자녀에 대한 사랑이 한층 더 커질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랑받는 기쁨은 곧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상대가 자신이 뜨겁게 사랑하는 대상이라면 그 사랑하는 더욱더 불타오를 것이 분명합니다. 마치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살지요. 자녀는 부모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에게 부모는 도움을 받는 존재 즉 자신에게 사랑을 주는 존재라는 생각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교사에게 갖는 마음도 비슷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부러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을 정하여 기념하는 이유도 역으로 말하면 평소에 우리 자신이 부모님이나 스승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죠.
하지만 사랑이 내리사랑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올라가는 사랑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 이야기처럼 자녀의 사소하지만 마음이 담긴 부모에 대한 선물은 부모에게는 너무나 감동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표현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감동도 고마움도 모르는 것과는 대조적이지요. 부모도 스승도 자녀와 제자에게 사랑받는 싶은 욕망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누구나 받고 싶어 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저 역시 이러한 점에서는 반성을 해야 합니다. 저의 아버지는 73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실 무렵에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희 아버지를 10년만 더 사시게 해 주세요. 그럼 제가 효도를 할게요.” 저는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 이렇다 할 효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늘 받기만 한 저는 그것을 너무나 당연시했고 경제적으로도 저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사시기 때문에 제가 해 드릴 것이 없다고까지 단정 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교대로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면서 저는 아버지께서 저희의 사랑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이렇다 할 방법이 떠 오르지 않았던 저는 그저 머뭇거리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아버지의 수명을 늘려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시간을 벌자는 속셈이지만 아버지께서는 기다리시지 못하시고 끝내 그대로 돌아가셨습니다. 기도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수명 연장의 기도를 하면 어느덧 기도의 내용이 바뀌는 게 아닙니까? “저희 아버지 편하게 돌아가시게 해 주세요”라고. 아무리 원래 기도로 돌아가려고 해도 잠시 후에는 이런 기도를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틀간의 격투 끝에 저는 하나님께 손을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기도대로 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7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과연 아버지께서 살아계셨다면 제가 효도를 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살아계신 어미니에 대한 제 태도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머니와 함께 산 지가 10여 년이 되었지만 저는 어머니에게 효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저는 어머니에게 사랑을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비슷합니다. 어머니는 제가 사랑해 드리지 않아도 잘 사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효도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는 하나님에게 사랑받는 것에만 너무 익숙해져서 그분이 우리의 사랑을 원하신다는 것을 잊고 있지는 않는 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내며 평소에도 견강의 시간을 가지기 때문에 충분히 사랑을 표현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행위에서 우리가 얼마나 그분에 대한 사랑을 의식적으로 드러내고 표현하는가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것에 머물러 있지 사랑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거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는 부모님이나 스승에 대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 드릴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기 때문입니다. 늘 사랑만 받아온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이 불필요하거나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죠. 하물며 상대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뭘 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도 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여러분이 부모의 입장에서 느낀 것을 하나님도 느끼신다는 사실은 성경을 조금만 읽어봐도 아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사랑을 애타게 원하십니다. 어린 자녀가 사소한 선물을 부모님에게 드렸을 때 감동하는 것이 선물의 현실적 가치가 아니라 그 마음인 것처럼 하나님도 같은 이유로 감동하십니다. 자녀가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사랑을 표현할 때 감동한다면 하나님도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우리의 고백에 같은 이유로 감동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늘의 필자는 발렌타인데이에 교회 어린이집 아이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 고백을 접하고 도전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필자도 평소에 하나님과의 경건의 시간 그리고 교회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했다고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사랑의 고백과는 거리가 있었음을 필자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필자의 반성은 우리가 드리는 경배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랑의 표현이 들어 있으며 또 그것을 가슴으로 느끼며 드리고 있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즐겁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으로만 여기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경외란 곧 두려움을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즐거움보다 스트레스를 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좀 더 사랑을 표현하는 마음으로 경배를 드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저는 최근에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찬양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며 기도 중에도 사랑한다는 말을 이전보다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신앙생활이 너무나 즐거워졌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과의 교제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자칫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사랑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계신다면 지금부터라도 하나님과의 밀월관계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더 많이 사랑의 고백을 하시면 아마도 그런 관계를 만들기가 조금은 더 쉬워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를 통해 사랑을 더 느끼고 고백함으로써 신앙생활이 주는 참다운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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