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너그러운 마음’

닥터 양 2022. 3. 7. 10:10

무엇을 보다 어떻게 너그러운 마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리보서 45)

 

 세상에는 목표 지향적인 사람과 관계 지항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목표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과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변을 보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고 자신이 어느 쪽인지도 알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성별 나이 직업 국적 등에 따라 두 종류의 사람의 비율이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여성들 중에는 관계지향적인 사람이 비교적 많고 남성중에는 목표 지향적인 사람들이 좀 더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성들은 최근까지 사회의 주류가 아니었고 사회활동을 하기 어려워 대개는 가정을 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가정이란 뭔가 목표를 이루는 장소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 움직이는 곳이기 때문에 자연히 여성들은 관계중심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반면 남성들은 목표를 이루는 것이 중요시 되는 사회에서 생활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목표 중심적인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적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에서 살펴 봅시다. 한국 사람들은 예전에 비해 목표지향적이 되었지만 아직도 관계중심적인 성향이 강하고 일본 사람들은 목표지향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비중심의 평화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인의예지를 중심으로 한 관계를 중시했습니다. 일본은 사무라이라는 이름의 무사를 중심으로 한 투쟁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목표를 중시하게 되었고 그것이 사회전반적으로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처럼 한 나라의 특징도 이렇듯 그들이 걸어온 역사(국생이라고 할까요?)에 의해 형성되어 굳어지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세상에 완벽이 없듯이 양자에게도 각각의 장단점이 있습니다. 관계중심의 삶은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지만 그 대신에 발전과 성장을 방해합니다. 게다가 관계를 지나치게 중시하여 내부적인 알력과 갈등을 키우기도 합니다. 목표중심의 삶은 성장과 발전을 가져오지만 대립과 충돌을 끊임없이 야기할 가능성이 큼니다.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고 지배한 것은 목표 중심의 사고가 낳은 비극이고 우리가 그들에게 당한 것은 관계중심의 사고가 낳은 정체적 삶이 낳은 결과입니다. 전자가 육식동물적인 삶이라면 후자는 초식동물적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을 이러한 기준으로 분석해 보면 바로 목표중심적인 특징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는 전쟁적인 용어가 다수 존재합니다. 엉적 전쟁와 승리, 십자가 군병, 영적 무기 등등 조금은 살벌한 말들이 쓰여지고 이것은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각 성도들을 전쟁에 임하는 전사들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신앙적인 훈련을 군사훈련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교회가 있는데 이 역시 그러한 특징을 잘 말해 줍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특징은 육식동물처럼 돌아다니며 전세계에 그 지배력을 심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힘은 그저 숫자의 많음에 있지 않습니다. 전사로 양육되는 성도들의 충성도는 그 어느 종교에 비할 수 없이 강합니다. 그러기에 숫자에만이 아니라 지역적 분포도에서도 범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이슬람이나 불교 힌두교 유교가 설령 숫자적으로 많다고 해도 그들의 분포지역은 자신들이 낳고 자라난 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대조적이죠.

  하지만 이러한 특징은 목표중심적인 사고가 낳는 문제점도 가져왔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완화되었지만 한 때 기독교는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에 섰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제국주의적인 침략과 기독교의 전도원리에는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이 과격해졌다고 하나 그것은 원래 이슬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기독교에 대한 저항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19세기 이전의 이슬람에 그러한 특징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이러한 문제점은 비단 전체적인 수준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개개인의 성도들에게도 목표지향성이 강해져(적어도 신실한 성도라면)그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과격한 모습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가끔 주변에서 남들과 충돌하는 삶을 사는 기독교인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믿음이 가지는 고유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목표지향적인 성향이 가져오는 잘못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나치게 전도에 열을 올리다가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잊고 말아 문제를 야기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은 결코 우리에게 덕이 될 수 없는 결과입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한복음217)이라는 말씀처럼 자칫 우리는 신앙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시키는 행동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습니다. 주의 전 즉 오늘의 교회에 대한 열정이 말씀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어긴다는 것은 목표지향적인 신앙이 가져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시키셨죠.

  우리 자신도 신앙생활에 가끔은 정화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는 주님이 주신 비전조차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조차 우리에게는 우상이 된다고 말이죠. 그럼 무엇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가 물으신다면 바로 주님과의 깊은 관계라고 답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아름다운 사랑을 할 때 상대를 위해 많은 것을 해주면 무조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것이 때론 상대와의 관계를 해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보통 목표지향적인 사람들이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목표대로 사랑을 이루고자 하지요. 하지만 그럴 경우 상대는 안중에도 없어져 버릴 수 있습니다. 그게 바람직할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완수하라고 하시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온유하고 자비로운 모습을 보이는 관계 중심적인 모습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결코 목표만을 추구하는 비인간적이고 냉정한 종교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세상 사라들도 자신의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그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사람을 그저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말고 목적으로 여겨야 합니다.

다 먹자고 하는 짓인데라는 농담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가 라는 기본적인 전제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지 않으면 세상의 성공주의 출세주의와 다를 바가 없어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자세로 끊임없이 신앙생활을 점검하여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