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난처이신 하나님 ‘희망이 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시편 63장 7절)
어제 저는 어떤 사람과 통화를 하고 무척이나 속이 상해 버렸습니다. 그는 제가 멘토 역할을 해 주는 청년인데 도대체 삶에 대한 의욕이 없어 보입니다. 무엇을 하라고 해도 하지 않고 그저 변명만 늘어놓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무기력의 끝판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할 정도입니다. 왜 그렇게 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저는 그에게 하나님과의 교제시간을 꼭 갖도록 조언해 왔고 그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제대로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제가 그토록 기도를 강조했지만 전혀 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넌 하나님께 복을 받고 싶지 않니? 기도를 안 하면 누구 손해인데? 바로 네 손해야” 이렇게 말하면서도 답답한 심정이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라는 전지전능한 분을 아버지로 모시면서 왜 그 분과 대화를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는 기도를 하지 않을까요? 불신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말만 하면 하나님께서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믿고 있다면 당연히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겐 자신의 삶에 대한 위기의식도 미래에 대한 소망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모님 밑에서 살면서 이렇다 할 어려움을 겪지 않으니 그에겐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갈급함이 없으며 그러니 하나님과 긴밀하게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무기력이란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송파 세 모녀 사건’을 비롯한 집단 자살 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것은 근본적으로 말해 무기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불우한 환경이 자살을 가져오다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견디며 사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은 그러한 의지를 가지기 어렵습니다.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은 대개 주변사람들과의 교류가 없거나 매우 적습니다. 한마디로 고립되어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그 자체가 무기력의 증거이며 또한 무기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무기력하니 남과 어울리기를 꺼리고 남과의 교류를 하지 않으니 점점 더 무기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사람은 자신의 어려움을 돌파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도움을 청하는 것조차 제대로 하기 어렵게 되지요.
저는 이 청년에게 그러한 모습을 봅니다. 그가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바로 무기력함에 빠졌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바꿀 노력으로서의 기도조차 하기 어려워졌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믿음 이전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가 설령 믿음이 있다 해도 구하고 바랄 것이 없다면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공부를 안 하는 학생은 교사에게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무엇을 물어 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갈급함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다윗은 자신이 상한 심령으로 주님께 나아가기를 평생동안 해 온 사람이고 그래서 주님께서 자신에게 합당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이 무기력하게 살았다면 그래서 갈급함이 없었다면 과연 그런 칭찬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자진해서 골리앗과의 무모한 싸움을 벌여 승리하였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사울왕의 핍박을 받았으니 그의 갈급함은 적극성에서 비롯된 고난에 의한 것입니다. 그것은 무기력한 인간에게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가치를 그에게 준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영적 무기력함에 빠진 채 살고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침체에 빠져 있지는 않으십니까?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주님께 의지하고 그분에게 간구하시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 고민이신가요? 그렇다고 자신의 삶이 모두 순조롭게 풀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기력증에 빠졌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이 추구해야 할 목표 소망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릭워렌 목사님은 ‘목적이 이끄는 삶’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사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자각해야 합니다. 사명을 깨닫게 되면 구체적인 목표를 찾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기도해야 하겠지요? 성경도 봐야 하고. 그런 갈급함이 신앙생활을 살립니다.
우리는 세상에 그저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구체화시켜 살아가는 것은 크리스천의 의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불신자들과는 구분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운동장에서 달음박질치는 사람들은 썩을 면류관을 위해 스스로를 절제하지만 크리스천은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유혹이 얼마나 강하고 달콤합니까? 그 속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삶은 얼마나 편합니까? 그러한 삶을 거부하면서 구분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분의 위로와 격려 그리고 능력을 기도하며 구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그분은 언제든지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 내주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분에게 간구하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목표가 없고 무기력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간구할 의욕도 동기도 없습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사명을 깨달아 구체적인 목표를 향해 –사도 바울이 말한 표대를 세워-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동반자로 삼아 나아가십시오. 우리의 피난처을 의지한다면 넘지 못할 산이 없고 건너지 못할 바다도 없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영적 무기력을 이겨내고 하나님에 대한 사명을 자각하여 우리의 피난처이신 성령님을 의지하며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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