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믿음은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일꾼중 하나에게 대답했다. ‘여보게 친구, 나는 자네에게 불의한 것이 없네. 자네가 처음에 1데나리온을 받고 일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자네 일당이나 받아 가게. 나중에 온 일꾼에게 자네와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네. 내가 내 것을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내가 선한 것이 자네 눈에 거슬리는가?’ 이처럼 나중된 사람이 먼저 되고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될 것이다.”(마태복음 20장13-16절)
목 차
1. 임금을 더 많이 준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까요?
2. 사랑이 없기에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3. 강도와 품꾼들은 그저 운이 좋은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4. 참된 믿음은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5.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1. 임금을 더 많이 준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포도원의 주인이 일꾼을 모집하러 인력시장에 나갔습니다. 아침 7시에도 나가고 9시에도 나가고 그렇게 여러 번 나가 품꾼을 데리고 와 일을 시켰습니다. 품삯은 1데나리온 노동시간은 저녁 6시까지입니다. 몇 시에 와서 일을 시작하든 그 시간이 되면 일을 마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늦게 온 사람들은 일하는 시간이 짧겠지요.
마지막으로 주인이 나간 시간은 오후 5시입니다. 일이 다 끝나기 한 시간 전입니다. 놀랍게도 그 시간에 아직도 여러 명이 일을 하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었기에 주인은 물었습니다. “어째서 하루 종일 놀고만 있는가?”라고. 그러자 “일을 하고 싶지만 시켜 주는 사람이 없어 그렇습니다.”고 답합니다. 비자발적 실업상태인 셈이지요. 그러자 그들도 데려가서 일을 시킴니다. 물론 끝나는 시간은 마찬가지이니 그들은 겨우 1시간만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노임을 지불하면서 일어났습니다. 주인은 나중에 온 사람부터 임금을 지불하라고 했기에 청지기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5시에 온 사람들에게 1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겨우 1시간 일했는데 하루치 일당을 준 것입니다. 아마 당시에는 1데나리온이 하루 최저임금(암묵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은 1데나리온이 한 가족의 하루치 최저생계비였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주인은 1시간 일한 사람이라도 생게비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1데나리온을 준 것 같습니다. 자비로운 주인이지요.
하지만 처음에 아니면 좀 더 일찍 온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불만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아니 우리는 하루종일 동안 땀 흘려 일했는데 어떻게 겨우 1시간 일한 사람과 같은 임금을 줍니까?”라고 그들은 항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일리가 있습니다. 동일 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죠.
하지만 주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원래 1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을 했고 주인은 그 약속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최저임금제도가 없는 시절에 임금은 노동자와 고용주의 합의로 정해졌으며 둘은 1데나리온에 합의를 하였으니 법적 도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맞는 말입니다. 서로 합의한 임금을 지불했으니 말이죠.
문제는 적게 일한 사람들 –최저 1시간-에게 같은 1데나리온을 주인이 지불한 것 입니다. 물론 이것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도 1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을 했을 것입니다. 설령 하지 않았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임금을 약속보다 적게 줄 때가 문제이지 더 준다면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 약속보다 더 임금을 받게 된다면 아무도 불만을 터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죠?
주인은 이 점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내 것 가지고 내가 선한 일을 한 것이 문제냐?”라고. 주인은 최저생계를 보장해 주고 싶어 1데나리온을 준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밥도 덜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물론 이것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알려지면 일부러 늦게 와서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일단 생각하지 말고 이 비유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비유는 상징적인 이야기이지 그것을 실화로 여겨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랑이 없기에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먼저 온 품꾼들이 화를 낸 것은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상대적 박탈감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들은 약속대로 받았으니 만일 그들이 먼저 임금을 받고 돌아갔다면 아무런 문제점도 발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보다 훨씬 짧게 일한 사람들이 같은 임금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본 느낌이 든 것입니다. 자신의 시간당 임금은 그들보다 훨씬 적게 된 셈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들이 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온 사람들이 같은 임금을 받은 것에 포인트를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주인은 약속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늦게 온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자신의 것으로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과의 신의나 약속을 철두철미하게 지키고 산다면 말이죠. 물론 남에게 줄 것은 주지 않고 자기 좋으라고 인심을 쓴다면 문제겠지만.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경우 십중팔구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공평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을 제대로 알고 실천하고 있다면 더 준 주인에게 감사와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참 좋은 분이다”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랑을 가지기도 실천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이야기와 비슷한 비유는 여럿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 길 잃은 1마리의 양 이야기 등도 달라 보이지만 서로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목자와 아버지는 공평보다 사랑을 택하였다는 점에서 주인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비난한 큰 아들은 (99마리의 양들도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먼저 온 품꾼처럼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렸기에 불만을 터트린 것입니다. 그에게는 동생이 살아 돌아온 것에 대한 기쁨이 없었고 다만 그가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날린 것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환대를 불공평하게 느껴졌죠.
3. 강도와 품꾼들은 그저 운이 좋은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이들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주인과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일까요? 물론 그것도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본질은 아닐 겁니다. 만일 그것이 중심테마였다면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 되어야 합니다. 늦게 온 품꾼들이 주인에게 묻습니다. “주인님! 어째서 저희에게 1데나리온을 주셨습니까? 겨우 한 시간 (혹은 세 시간)만 일 한 저희에게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과 같은 임금을 주셨나요?” 그럼 주인은 최저생계비를 주고 싶었다고 하겠지요. 게다가 이 경우에는 굳이 그들의 임금은 먼저 주어 문제를 일으킬 이유도 없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의 임금을 나중에 준 것은 이 이야기가 그저 주인의 자비심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고자 한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온 사람들의 불만을 일부러 조장할 이유가 없죠.
탕자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 큰 아들의 반응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때는 제가 아직 신앙경력이 짧았기 때문에 큰 아들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 자신이 이른바 신앙의 짬밥이 늘어나자 은근히 큰 아들의 분노에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탕자를 구원받은 강도라고 여기고 나처럼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큰 아들에 대한 동지의식을 느끼게 된 것이죠. 이럴 바에는 차라리 예수를 늦게 믿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말입니다.
의외로 예수님과 십자가에 매달렸다 구원 받은 강도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부러워한 적은 없지만 그가 행운의 사나이라는 생각은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사람들이 신앙생활=고통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면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주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모른 채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볍고 지기 쉬운’ 멍에를 탓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여전히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 안에 대한 죄에 대한 욕구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강도와 탕자 그리고 늦게 온 품꾼들은 요령 있게 구원이나 하루치 품삯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강도가 십자가에서 처형 될 때 예수를 만나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을까요? 늦게 온 품꾼이 주인의 자비를 미리 계산하고 늦게 나타난 것일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구원과 품삯에 대한 절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십자가에 매달렸지만 한 사람은 예수를 계속 비난했지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그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을 보고 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부끄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죄가 많은데 저 분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는가’라는 생각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보고 백부장 한 명이 “이분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순간 백부장도 강도도 같은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님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구원을 받은 것은 십자가에 매달린 순간 회개와 함께 예수가 구세주임을 시인하는 영접 기도를 올렸기 때문입니다. 눈 앞에 예수가 계신데 눈 감고 기도할 필요는 없겠지요? 하지만 사실상 그는 영접 기도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회개와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구원받게 되어 있다고 배웠습니다. 따라서 강도의 구원은 말씀과 모순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행운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진실한 회개를 하였고 주를 구세주라 시인한 것입니다. 무엇인 문제인가요? 미리 계산된 행동도 아님을 물론입니다.
품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일할 기회를 가지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은 어느 정도 시간이 되었을 때 가방 들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절대로 아내와 아이들을 굶기지 않겠다는 생각과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강도의 간절함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원에 품삯에 대한 감사는 상상 이상이었겠지요.
4. 참된 믿음은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이 이야기의 주된 테마는 인생 역전 성경대로 표현하면 ‘앞 선자가 뒤가 되고 뒤에 있는 자가 앞 선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래 앞 선자는 먼저 온 품꾼과 큰 아들이 됩니다. 아울러 그들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교회 중직자 위선적인 신앙인들인 바리새파인들 또는 아예 이스라엘민족 자체를 말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뒤에 있던 사람은 탕자와 나중에 온 품꾼 세리와 창녀 이방인 구원받은 강도 등 입니다. 이들 간의 차이는 바로 절실함이었습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그 지위를 인정받고 살았기에 굳이 절실함을 느낄 이유가 없었습니다. 큰 아들은 자신의 업적을 내세울 수 있었고 바리새파인들은 경건하게 살아온 모습으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였습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한 중직자들은 교회 내에서 그 지위가 확고할 것이고 이스라엘민족은 자신들만이 여호와의 선택을 받았다는 자부심에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러한 자부심은 결국 그들이 예수님 아버지 포도원 주인에 대한 참된 사랑을 느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후자에 속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자부심 따위가 있을 여지가 없었습니다. 의지할 상대가 없던 그들에게 아버지 포도원 주인 예수님은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해 주는 유일한 상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여호와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나 예수님에 의해 구원의 길을 얻었으니 마치 구원을 당연시 하던 이스라엘 민족에 비하여 더욱 간절함을 가지고 느꼈습니다. 세리나 창녀 구원받은 강도 늦게 온 품꾼에 대하여는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죠.
참된 믿음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찾아온다는 점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지위나 믿음에 대한 자부심으로 인해 교만에 빠져 버린 사람들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업적이나 실적이 아니며 바로 지금 얼마나 믿음의 대상에 대하여 전적으로 의지하고 사랑하는가에 달렸다는 것을 새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5.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정체된 사람과 성장하는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그가 과거의 실적 현재의 지위나 유산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장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러한 것에 큰 비중을 두지 않지만 정체된 사람들은 반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업적 지위에 대한 자부심이 자나치고 그것을 내세우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을 강조하면 할수록 그들의 현재는 공허할 것입니다. 그것을 감추고자 하는 몸부림이 바로 과거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자랑이 됩니다.
교회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미래를 강조하고 정체된 교회는 과거를 돌아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 오늘을 이루었다’고 하면 할수록 그들의 눈은 과거에 머물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들여다 볼 냉정함이 있습니다. 아니 그렇기에 성장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생존하는 사람들은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것을 집중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과거에 대한 자부심이나 집착이란 불필요한 짐 덩어리일 뿐이기에 그들은 미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집중시킨다는 점에서 양자는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비유는 결코 비현실적인 교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토끼도 될 수 있고 거북이도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현재에 가지고 있는 자산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가 입니다. 신앙경력, 직분, 외형적인 신앙생활의 경건함 등에 사로잡힌다면 결코 그에게는 참된 믿음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큰 아들도 먼저 온 품꾼들도 이스라엘 민족도 바리새인도 사실은 그러한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이에 뒤늦게 온 거북이에게 뒤진 토끼들이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세월이나 공로의 축적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훈장이 결코 아닙니다. 비록 신앙연륜이 짧아도 탕자처럼 늦게 온 품꾼처럼 이방인들처럼 간절함을 가지고 믿음을 구한다면 거북이처럼 앞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직분이나 경력 과거의 업적에 사로잡히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한참 신앙이 성장하는 후배들을 억압하는 뒤떨어진 토끼가 되지 않도록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 봐야 할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끊임없이 패달을 밟으며 전진하지 않으면 제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교만의 함정에 빠져 그와 같은 후퇴를 하는 일이 없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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