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과 더불어 사는 삶 ‘하나님 붙잡기’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리라(욥1장22절)
신앙적인 기초가 부실했던 시절 제가 가진 의문 중 기도에 대한 것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성경에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주시리라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심을 아신다는 말이 있는데 왜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면 그냥 채워주시지 뭐 구태여 기도를 하라는 것인가? 여러분은 이런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있습니까? 귀찮은데 그냥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말이죠.
유기성 목사님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우리가 보면 참으로 이상하다. 자기 자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것을 자신에게 달라고 하라신다. 알면 그냥 주면 되지 왜 굳이 달라고 하라고 하는 것일까?” 물론 목사님은 그 답을 뒤에 설명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자녀의 필요를 알고 있는데 굳이 그것을 자신에게 요청하도록 시키겠습니까? 보통의 부모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육아의 경험이 있는 저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와닿는 것이 있었습니다 .자녀가 말을 안 해도 주었을 때와 요구를 해 와서 주었을 때는 분명히 그 결과(영향)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특히 제가 자녀의 요구에 쉽게 응하지 않고 거절을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것은 자녀의 삶에 또 저와 자녀와의 관계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올 것입니다.
세상은 아시다시피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나 다른 곳에서 여러 가지 교육을 받으면서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죠. 학교에서는 실패나 실수가 현실적인 불이익을 주지는 않습니다. 또 그것이 학교라는 곳을 무너뜨리거나 적어도 큰 손해를 끼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학교는 그런 것을 위한 기관이기 때문에 그것이 허용되는 것입니다.
학교는 마치 실험실과 같습니다. 실험실에서의 실패는 현실적인 피해를 가져오지 않지요? 왜냐하면 실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험을 통해 가능성을 테스트하고 큰 문제가 없을 때 비로서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합니다. 마찬가지로 학생들도 교육으로 그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를 때 비로서 사회에 나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현실사회에 보다 유익한 존재가 될 수 있으니까요.
아이가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그는 사회를 배웁니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녀의 필요를 채워줄 준비를 하고 있어 비교적 쉽게 필요를 채울 수 있지만 학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학교의 급우들은 실수나 잘못에 대하여 부모처럼 이해하고 용서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비난하고 제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학생들의 필요를 채워줄 의무가 어느 정도 있지만 그렇다고 부모처럼 무한대의 책임을 지지는 않으며 또 그래서도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이는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삶을 위한 격투를 시작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필요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들어준다면 그 아이가 이런 사회를 경험하게 될 때 제대로 적응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대체로 첫째 아이가 둘째 이후의 아이들보다 사회적응력이 떨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합니다. 첫째 아이는 어느 정도 기간은 부모에게 유일한 자식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니 부모는 그의 필요를 채우는데 모든 힘을 기울였을 것이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사회라는 곳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둘 이상이 되면 더 이상 부모는 자녀의 필요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니 아이들은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들은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고 익히게 되는 것이죠. 상대적으로 그럴 기회가 적었던 첫째들은 그런 능력에서 상대적으로 뒤질 수 밖에 없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예전에는 ‘첫째 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물론 아들을 선호하던 시대에 나온 위로의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첫째 딸은 엄마의 든든한 지원자이기도 했습니다. 엄마가 살림을 할 때 큰 딸을 옆에 두고 조수역할을 시키면서 살림을 가르쳤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링컨 대통령의 친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 새어머니가 오시기 전까지의 기간 그의 누나가 주부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누나가 성인은 아니었습니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5,6학녀 정도의 나이입니다. 그런데도 비록 서투르긴 했지만 어느 정도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평소에 엄마가 누나를 곁에 두고 조수로서의 역할을 시키며 가르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도 여자아이들은 살림을 거들 능력이 있었고 심지어 남의 집 가정부로 일하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자녀의 수가 잘해야 2,3명이고 가전제품이 보급되어 가사일이 쉬워진 지금 엄마들은 더 이상 큰 딸을 조수로 사용하지 않고 살림을 가르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큰 딸은 사회성의 결핍이라는 단점을 고스란히 안은 채 과거에 가졌던 ‘살림밑천’이라는 장점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죠. 아니 이것은 아이들 모두의 특징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만일 문제라면 아이들의 탓이 아니라 어른들의 탓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필요를 알아서 채워준다면 생기는 더 중대한 문제는 부모에 대한 감사를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구를 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는 과정은 자녀와 부모의 관계를 깊게 합니다. 보다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고 그것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됩니다. 자녀로서는 자신이 얻게 될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확실하게 알 게 됩니다. 아울러 그것을 채워주는 부모의 소중함과 고마움도 느끼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런 과정이 없이 채워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주어지는 것의 가치 그리고 부모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배울 기회를 가지기 어렵겠지요. 그것은 자녀의 부모에 대한 태도를 나쁘게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감사는커녕 당연한 것으로 여겨 주지 않을 때 불쾌감마저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저 주어지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나요? 쉽지 않을 겁니다. 그것이 어쩌다 한 번이면 오히려 고마움을 크게 느끼겠지만 일상화되어 버린다면 당연하게 여길 것입니다. “배려가 계속되면 권리가 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기도를 시키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이는 부모에 대하여서도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채워주시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는커녕 그의 존재마저 의식하게 될까요? 아예 잊고 살 가능성이 큼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의 깊은 교제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우리를 이끌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만나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겨우 필요를 채우기 위해 만나다니 기복신앙 아닌가?”라는 비난을 할지 모르나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필요가 생길 때 우는 것 뿐입니다. 그런 그에게 다가와 필요를 채워주는 부모의 존재는 그에게 절대적일 수 밖에 없고 그것을 통해 그는 부모에게 의존하고 따르는 습관을 가지게 됩니다. 그럴 때에 부모가 아이를 바로 가르치고 이끌면 아이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너희가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 아이처럼이란 미숙함이 아니라 순수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것도 같은 원리 아닐까요? 만일 우리에게 필요가 없거나 그 필요를 알아서 채울 능력이 있다면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어질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또는 설교나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상태에서 머문다면 그의 신앙은 절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제 자신도 그랬지만 그에게 하나님이란 그저 지혜로운 선생님일 뿐이지 믿고 따를 수 있는 절대자는 될 수 없습니다. “가끔 만나서 좋은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정도이겠지요. 설령 많은 것을 알려준다고 해도 내 삶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식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이것은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언제든지 하나님에게 등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그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결코 예수님에게 짐을 맡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존이라 것이어야 하는데 의존을 하려면 상대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가끔 만나서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에게 그런 것이 가능할까요? 기껏해야 한 두 개의 짐을 부탁하는 정도이겠지요.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라면 자아가 없어지기는커녕 더 강해져야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수도를 하여 부처가 되려면 남에게 의존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겠지요. 스스로가 강해져야 하는데 의존이 말이 됩니까? 하지만 기독교는 의존 하나님에 대한 의존이야말로 믿음의 핵심적 교리입니다.
얼마 전 친한 선배와 이를 두고 작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다락방 교재의 ‘염려에 굴복하지 않기’라는 타이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역이라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그 원고의 필자가 주장하는 것이 ‘고난을 맡기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맡기라’는 말은 곧 내 힘이 아니라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맡겨 해결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의 핵심이 걸린 것이기에 저는 선배에게 양보하기 어려웠습니다. ‘굴복하지 않기’로 할 경우 자신의 힘으로 이겨내는 것도 포함되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생김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슈퍼맨이 되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앙원리를 가장 잘 설명한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을 보면 기독교의 본질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교나 다른 신앙을 가진 분들이 보면 “뭐가 이렇게 요구가 많아”라고 생각될지 모르나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을 충분히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존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은 그에 대한 전적인 믿음에 따른 절대적인 순종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한 전적인 믿음에 따른 절대적인 순종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중의 핵심 교리이며 그것은 은혜라고 하는 선물로 나타납니다. 선물은 아무나 주지 않습니다.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오늘의 필자는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붙잡을 것을 권합니다. 시련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기는 것은 기독교의 교리와 배치됩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하나님은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이 되어 버립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게 되면 둘은 남과 그리 다르지 않게 됩니다. 인간의 부모는 늙어서 힘이 없어지니 그럴 수도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라는 부모는 절대 늙지도 쇠하지도 않으시는 분이니 우리가 그분과 멀어져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거리를 둔다면 그는 아직도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에게 절대 순종할 믿음이 없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필자의 주장 중에는 교리에 대하여 크게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욥의 경우를 말하면서 “시련은 그냥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믿는 자에게 '우연'이란 없습니다. '그냥'도 없습니다. 믿는자에게는 큰 일은 물론 범사가 모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욥을 시험하도록 사탄에게 허락하였지만 그것이 하나님에게 그저 소일거리 정도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사탄에게 자신의 충실한 종 욥이 얼마나 자신에게 충성하는지를 과시하고 싶다는 허영심 때문일까요?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맞지 않는 것이니 결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냥 오는 시련’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욥에게 시련이 찾아오게 되었을까요? 그가 잘못 해서 온 것이 아님은 명백합니다. 하지만 이 시련이 주는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시험에 의해 욥기라는 귀중한 성경의 한 부분을 손에 넣었습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시련에 대한 마음가짐을 가르치는 책이기에 매우 가치가 큼니다. (성경 중에 가치가 없거나 작은 것은 없지만)욥에게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질 기회가 주어졌으니 그것만으로도 속된 말로 ‘계를 탄“셈입니다. 게다가 배의 축복을 받은 것은 덤이라고 할 수 있죠. 아울러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어쩌면 그에겐 가장 큰 축복일지 모릅니다. 그의 친구들의 잘못된 언행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됩니다. 이외에도 있지만 이 정도로 해두죠. 이래도 ”그냥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비슷한 경우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100살에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합니다. 바치라는 것은 목회자를 만드는 수준이 아니라 죽여서 제사로 바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품상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요구입니다. 하나님은 몰렉 같은 우상을 섬기며 자식을 인신공양하는 풍습을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을 꾸짖으실 때 언제나 이 이야기를 들먹이실 정도이니 아시겠지요. 그런데 아들을 그것도 당신이 약속하여 낳은 아들을 바치라니. 그것도 단지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서 말이죠. 저는 이 부분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고작 그런 것을 몰라 시험을 하느냐는 것이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인데 그 정도라면 사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왠만한 영적 능력이 있는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고작 그걸 몰라서 아이를 바치라니! 그러고도 하나님 맞습니까? 전지전능이라는 말이 너무 아깝네요.
저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과정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고 믿습니다. 마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칼로 발을 씻겨 드린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여인이 한 것이 오래오래 전해진다:고 하신 말씀처럼 막달라 마리아의 행위는 우리에게 믿음이 주는 효과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300데나리온이라는 지금으로 치면 최소 수천만원의 향유를 붓는 마음 그것이 바로 믿음이 가져온 헌신의 마음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가르침을 이렇게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를 향한 가롯유다의 비난은 본질에서 크게 벗어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그걸 아끼면 그 돈이 과연 가난한 사람에게 쓰여질까요? 비슷한 이야기로 십일조를 한다는 말에 불신자들이 "그럴 돈이 있으면 부모님에게 드리겠다"고 합니다. 좋은 말인데 그런 사람치고 부모님에게 실제로 드리는 거 봤습니까? "그럴 돈이 있으면" 뭐할까요? 가족 여행이나 자식들을 위한 자금으로 쓰여질 겁니다. 그러니 그들의 말은 하나마나한 견성(개소리)입니다.
하나님에게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야말로 이웃사랑을 실천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것을 그것도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릴 수 있으니 이웃사랑에 대한 주님의 명령도 충실하게 지킬 것입니다. 효자가 부모말씀을 가려 듣나요?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진정한 효자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모두 순종하고자 합니다. 그 말씀에 어려운 이웃을 도우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만 패스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이야말로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좋다면 결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설령 인간의 육신의 연약함으로 죄를 지어도 곧 회개하고 돌아나옵니다. 선을 행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소극적 신앙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소유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사랑을 한다면서 상대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랑이 진실한 것이라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죽인다고 해도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 갖는 위력입니다. 그러니 죄는 피하고 선은 서둘러 하는 것이 믿는 자의 자연스러운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먼저 장착하면 나머지는 고구마 뿌리처럼 딸려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은 우리에게 오늘날까지 믿음의 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은 다릅니다. "날 사랑해?" "응" "말 해줘!" "알면서 왜 그래? 새삼" "그래도 듣고 싶어" 이런 마음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그가 그런 것을 행동으로 표현함으로써 당신도 흡족해 하시고 후세의 귀감이 되도록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상징한다는 것도 있고. 이래저래 이 사건은 막달라 마리아의 사건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해가 안 되시면 일단 한 번 보여주세요. 그럼 알 겁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통해 끊임없는 시련과 마주합니다. 그 중에는 신앙과 관계없는 시련도 있지만 신앙으로 인한 것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멕시코에서 선교하시는 에스더 권 선교사님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주변과 충돌이나 마찰 핍박이 없다면 이상한 것이다. 자신이 정말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의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분만의 문제제기가 아니라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영적인 충돌은 한 번은 극복해야 할 문제인데 그것이 없다면 자신의 신앙생활이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변 사람 중 하나가 어느날부터 전혀 다른 행동을 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주변 사람들이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 줄까요? 물론 사소한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남에게 주목을 끌만큼의 변화라면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너 왜그래?“ ”무슨 일이 있는거야? 그게 뭐야? 말 해봐!“ 등등 갖가지 반응이 나올 겁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거듭난다는 것은 사소한 변화가 아니라 인생 자체가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소동이나 충돌이 없다면 주변 사람들이 다 기독교도이고 그래서 그것을 다 이해할 정도의 수준이 아닌 이상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의 삶이 여전히 옛사람에 머물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즉 전적인 믿음과 그에 따른 절대적 순종이 없다는 것이죠.
신앙은 시련을 동반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더욱더 주님과 가까워질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면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것은 인생 최대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니기에 시련은 그런 의미에서 축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련을 통해 강권적으로 만난 하나님을 우리는 더욱더 의존하고 믿게 됨으로써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저도 어렴풋이나마 시련에 대한 감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징계가 없다면 자식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남의 자식에게 왜 징계를 합니까? 교사라도 되지 않는 한. 남이 하는 것은 벌이지 징계가 아닙니다. 벌은 상대를 힘들게 하는 것이 목적이고 징계는 그가 잘 될 수 있도록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징계가 아니더라도 교육으로서의 시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육이란 배우는 사람에게 일부러 시련을 주어 그것을 극복하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인공적 시련’이라고 할 수 있죠. 인공적이든 아니면 자연적이든 시련으로 인해 주님과 가까워지고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믿음이 생기고 그로 인해 절대적 순종을 하게 되면 신앙은 궤도에 오른 셈입니다. 그러니 시련에 감사할 수 밖에요.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시련과 더불어 살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원래 인생이 시련의 연속이지만 믿는 자의 삶을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믿음의 성장을 통해 자신과 가까워지고 결국 자아를 완전히 내려놓은 상태가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크고 작은 시련에 마음을 비우고 그것을 삶의 일부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것은 그러한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믿음이 정상에 이르렀다면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시련과 친구가 되어 더 이상 두려워 하지 않게 된 삶! 생각만 해도 벅차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그런 차원 높은 신앙의 길을 걷기 위해 시련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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