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 ‘알아봄’

닥터 양 2022. 1. 2. 14:00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 알아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13:34-5)

 

  사랑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여기도 사랑 저기도 사랑..우리나라는 특히 사랑이 발에 차일 정도로 흔해서 가치가 없어질 정도입니다. 오죽하면 이런 말이 나왔을까요? “미국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역할을 한다. 경찰관은 수사를 하고 의사는 병을 고치며 교사는 가르친다. 일본드라마에서는 설교가 메인이다. 경찰관도 의사도 교사도 설교를 하며 가르치려고 한다. 우리나라는? 직업에 관계 없이 사랑을 한다. 경찰관이 나오면 경찰관이 사랑을 하고 의사가 나오면 의사가 사랑을 하고 교사가 나오면 교사가 사랑을 한다

  저는 이 주장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완전히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텔레비전에서 미국 드라마를 많이 방영해서 보았는데 요즘은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지상파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죠? 아마 한국 드라마작가들과 배우들 밥그릇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보기가 힘들어 판단의 근거가 없지만 일본드라마가 설교적이거나 한국 드라마가 사랑 타령을 한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정통사극을 해도 사랑이 메인 주제로 등장하는 나라가 우리 말고 또 있을까요? 없으면 만들어가면서까지 그렇게 하니까요.

  이러한 차이는 결국 그 나라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직업정신이 투철하다는 것이고 일본 사람들은 철학적이며 우리는 사랑에 굶주려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미국에 살아본 적이 없어 잘 모르지만 미국이란 나라는 성공에 목매는 나라이고 그러니 직업정신이 투철할 것 같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제가 좀 알죠. 일본에서 10년간 유학을 하며 살아 보았으니. 그들은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보통 순종적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굉장히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국민입니다. 우리와 다르다면 일단 결론이 나면 군말 없이 따른다는 것이죠. 평소에는 지독하게 따지지만 일단 위기가 오면 단결을 하는데 익숙해져 있고요. 아마 전쟁을 일삼던 나라라 그런가 봅니다. 전쟁이 시작되면 단결해야 하니까.

  그럼 왜 우리는 저렇게 사랑에 목숨을 걸까요? 물론 사랑이라고 해도 갖가지 사랑을 모두 포괄하지는 않습니다. 두 가지가 메인이고 나머지는 곁다리입니다. 70-80%정도는 남녀의 사랑이고 20-30%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입니다. 예전에는 우정이라든지 동료애라든 것도 주제로 다뤄졌지만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1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메인 주제로 다뤄지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걸어온 역사와 관계가 깊습니다. 한미일 중에서 우리가 가장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전쟁과 대립이 일상화된 삶을 살았고 우리는 그런 것이 비교적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카우보이 사무라이가 그들의 상징이라면 우리의 상징은 선비이지요? 선비는 문명과 평화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문명은 그들보다 더 발달했던 것이죠.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한가롭게 사랑 타령하기가 쉽겠지요? 우리가 혈연에 목을 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는 혈연이 중시되기 어렵지만 우리는 그런 위기를 별로 겪지 않았기 때문에 무능해도 내 새끼를 챙길 여유가 있는 겁니다.

  문제는 그 사랑이 보편적이기보다는 우리로 치면 성경적이기보다는 대단히 정욕적이라는것이죠. 여러분이 보시기에 우리가 과거에 비해 더 열심히 사랑을 찾고 있기 때문에 또 사랑이 넘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다?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남녀간의 사랑이 더 아름다워지기는커녕 온갖 문제를 노출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는 남녀의 사랑이 더 이기적이고 쾌락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다를까요? 아닙니다. 결코. 아니면 왜 영유아 아동학대 사건이 급증할까요? 최근의 정인이 사건은 양부모라 그렇다고 해도 친부모의 학대도 만만치 않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자기 아이를 빈 집에 버려두고 가버린 엄마의 이야기를 아시죠. 아이가 아니라 부모 자신이 우선시되니까 일어나는 믿기 어려운 사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부모의 자식 사랑도 예전에 비해 이기적인 것이 되어 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토록 사랑이 이기적인 것이 되어 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릭 프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이란 주변으로 퍼져나가야 한다. 마치 돌을 물에 던지면 물결이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것처럼. 그렇지 않는 사랑은 또 다른 형태의 이기주의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확대된 자기애라고 한 기억이 납니다. 결국 자기중심적인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죠. 나를 위한 사랑!

  물론 자신을 위한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사랑은 대상이 있으니 그 상대에 대한 배려가 필수인데 자칫 그러한 배려가 결여되기 쉽다는 경고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사랑이 넘쳐도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설명이 되겠지요? 자기 중심적인 사랑이 넘친다면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는커녕 결국 삶을 더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요? 그것은 보편적 윤리 도덕 나아가 철학의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규범이 상실된 채 오로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이름을 빌린 방종이 횡행하고 있다는 것이죠. 젊은이들은 더 이상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고 어른들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꼰대’ ‘갑질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기가 일쑤이지요. 도리어 젊은이들의 생각에 적응하라고 강요하는 분위기도 있습니다. 물론 젊은이들의 지혜도 기성세대는 존중해 줘야 합니다. 많은 천재들이 젊었을 때 큰 발견을 하거나 저작을 남깁니다. 개신교의 거두 칼뱅은 27살인가에 그 유명한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여 신앙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칼뱅이 보여준 삶은 그에 걸맞을 정도로 훌륭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지혜에 비해 그의 내면의 성장은 빠르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는 보편적 기준이 필요하고 그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 각자의 생각대로 살도록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고전은 그러한 기준이 될 수 있는 지침서입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유교윤리를 배우면서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았습니다. 그것이 비록 성경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소위 초등학문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있었기에 사회가 안정될 수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그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그로 인해 우리는 정신적인 무질서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줄 윤리도덕적 기준은 현재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있다면 네 멋대로 주의가 아닐까 합니다. 마치 사사기에 나오는 무질서가 재현된 것 같습니다. 왕이 없으니 각자의 소신대로 살았다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하라고 하셨지만 그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다르고 또 그래야 합니다. 그것은 달콤하고 정욕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성적인 사랑 아가페의 사랑에 가까운 사랑이어야 합니다. 즉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타인에 대한 희생과 헌신을 동반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랑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대도 사랑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해서 우리는 잘못된 사랑을 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랑을 하라고 하면 누구나 행복한 표정을 짓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그 누구도 제대로 아가페의 사랑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욕적인 사랑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가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사랑이 마냥 즐겁고 행복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하니까요.

  오늘의 필자의 경우도 그런 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필자는 타고난 환경부터 불우했습니다. 어머니가 죽었다고 조부모에게 입양되는 일은 상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의 아버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있다면 조부모에게 입양될 리가 없겠지요. 아버지가 아예 없는 미혼모의 자녀이거나 이혼 등으로 헤어진 경우라 하겠는데 어느 쪽이든 불행한 것은 마찬가지이죠. 그런데 오늘날 미혼모 탄생을 업적인 것처럼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애당초부터 부모의 한 축인 아버지를 무시하는 생각이지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순전히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수단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처럼 자기가 필요하니 낳고 키우는 것이죠.

  정인이 사건은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자신들의 기쁨을 위해 아이를 키웠는데 현실이 녹록하지 않으니 학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키웠으니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학대로 이어질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미혼모 출산을 장려하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이것이 정욕적인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정욕적이 사랑입니까? 태어날 아이의 입장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부모의 즐거움 행복이 전부인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과 거리가 먼 것은 당연합니다.

  필자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늘 자신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섬뜻합니다. 조부모에게 입양되었다고 하지만 할아버지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필자의 양어머니이기도 하지만 할아버지의 아내이기도 하고 다른 자녀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왜 입양한 손자와 늘 함께 다녔을까요? 정상이 아니지요. 그것은 손자를 위한 무한한 사랑이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아마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손자를 이용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아이가 학교를 가면 부모는 아이와 떨어져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서로에게 거리가 필요한데 할머니 겸 어머니인 이 분은 그러한 분리를 못 견디신 것 같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가 교도소에 간 것이 이러한 사실과 무관할까요? 그는 교도소에서 그 누구의 면회도 받지 못했습니다. 할머니는 돌아가셨고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필자의 인간관계가 할머니에게 한정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요? 그에게는 보다 넓은 인간관계가 필요했으나 늘상 붙어다니는 할머니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했으니까 그렇겠지요?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혼자 남게 되었고 결국 그것이 그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게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가 폭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했다면 할머니의 부재가 그토록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설령 교도소에 들어갔더라도 면회 한 번 없는 상태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도 그를 사랑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테니까요. 그러나 할머니는 그를 독점하려고 했고 그것이 그녀의 부재를 심각한 문제로 만든 것입니다. 이것도 정욕적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자신을 철저히 희생하시는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분이 굳이 원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우리가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시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도 욕심이라면 욕심이지만 그런 욕심은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 것입니까? 내 행복 내 기쁨이 우선이 아니라 상대의 행복 기쁨이 우선인 사랑이 진정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만일 그런 사랑이 우리 사회에 넘친다면 자살률이 선진국 중에서 1,2위를 다투는 나라가 되었겠습니까? 어려서부터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이익에 충실하도록 배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엇었다고 갑자기 이타적이고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우리는 깨닫지 못합니다. 독사가 독을 뿜는데 그것을 독사 자신은 모릅니다. 그래서 엉뚱하게 사랑의 가치를 폄하합니다. ”사랑이 그렇지 뭐“ ”사랑이 밥 먹여주냐이런 식의 말을 쉽게 합니다. 현실의 사랑이 문제가 있다고 해서 사랑 자체를 폄하해서는 안 되는데 자신의 잘못을 탓하기 싫으니 사랑 자체를 비난해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죠.

  그러니 나아질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남이 아가페의 사랑을 해 주기를 바라니까 드라마만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죠. 그런 드라마를 보면서 너무 멋있다.’고 감탄하지만 자신이 그런 사랑을 하겠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으며 누군가가 그것을 자신에게 해 주기만을 바랍니다. 나아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행동을 끝임없이 합리화시킴니다. ‘사랑하니까 좋은 거야라고 말이죠. 남이 보면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인데 정작 자신은 그것을 모릅니다.

  오늘의 필자는 다행히도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볼 것이라고 합니다. 그 사랑은 정욕적인 사랑이 아닐 겁니다. 비록 자신은 할머니의 정욕적인 사랑에 희생되었지만 할머니와 분리되어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배운 것 같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면회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필자 자신에게는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습니다. 그에게도 분명히 피붙이나 지인은 있을 것인데 교도소까지 발걸음을 할 정도로 그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 그에게 면회 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졌겠습니까? 그는 그런 모습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라고. 그것은 악마라도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천하의 흉악한 범죄자도 자식을 사랑하고 애인을 사랑합니다. 살인마 유영철도 자식의 이야기를 했을 때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그렇지만 그에게 무고히 살해된 많은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지 궁금합니다. 그럴 사람이라면 애시당초 그런 끔찍한 죄를 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살해당한 사람들도 그 누군가에게는 자식이요 애인이었을테니까요. 하지만 그는 정욕적 사랑 밖에 몰랐기에 자신의 자식에게서 남의 자식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남의 자식에게서 자기 자식의 모습을 볼 수 없었죠.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배워야 우리는 모르는 남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 수 있습니다. 정욕적인 사랑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랑을 이용할 뿐 결코 아름다운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먼저 내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 분에 대한 믿음이고 순종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최선을 다해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 가면 그 분을 본받는다면 우리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말에 자신들의 정욕적인 사랑을 떠올리고 행복한 얼굴을 하지 마시고 희생과 헌신을 떠올려 비장한 마음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것이 삶의 일부가 된다면 그 또한 행복한 것이 되겠지요. 저와 여러분이 아가페의 사랑을 즐겁고 행복하게 실천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