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본질 ‘찬양 기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끝에서부터 찬송하라(시편 42장10절)
남녀가 사랑을 합니다. 서로를 너무나도 원하고 함께 있으면 하루가 한 시간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영국에서 ‘런던에서 글래스고(북쪽 끝의 도시)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을 묻는 공모에서 1등 한 답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바로 그런 관계였습니다. 그들에겐 천리만리 여행길도 함께라면 마냥 설레임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관중과 포숙의 우정을 우리는 ‘관포지교’라고 합니다. 그들은 서로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관중은 포숙과의 우정을 “나를 낳아주신 것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님은 자식을 가장 사랑하지만 그러나 가장 잘 이해한다고 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가까이 있기에 부모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알아주는 친구는가 있다면 그의 삶은 결코 실패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친구처럼 지내는 부모와 자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식이 갓난아이 시절에는 그들의 관계는 일방적이었습니다. 부모는 모든 것을 제공하고 자식은 그저 받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관계는 쌍방형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자식이 성인이 되고 결혼하고 그도 자식을 갖게 되고 그런 과정을 거쳐 그들의 사이는 대등하게 변해가고 결국엔 오랜 벗처럼 되었습니다. 물론 부모의 자식 사랑이 훨씬 깊지만 이제는 자식도 부모님을 깊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오랜 결혼생활을 한 부부가 있습니다. 사랑으로 시작된 관계지만 서로를 너무 몰라 다투고 때론 이별을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둘의 관계는 깊어갔고 서로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조력자가 되어 갔습니다. 심지어 얼굴과 표정까지 닮아 보입니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정도가 되어 버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설명을 읽으면서 어떤 기분이 드셨습니까? 흐믓했습니까? 축하드립니다. 어쩌면 그런 분들은 이러한 관계에 가까운 관계를 누리고 계실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아쉽습니까?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비록 이런 이상과는 거리가 멀지만 아직은 꿈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터무니없는 소리 같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꿈을 잃은 당신의 삶이 어떨지 심히 걱정되는군요. 밥은 잘 먹고 다니시나요? 잠은 잘 오시나요?
여러 종류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지만 사랑의 본질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잘 해주는 것? 아끼는 것? 그런 행위를 열심히 하는 것? 그런데 말입니다. (김상조님 등장)잘 해주는 것 아끼는 것은 사랑이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백화점 고객에게 점원이 아무리 아껴주고 잘 해줘도 그것은 사랑과 무관하겠지요. 사기꾼이 그렇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껴주고 잘 해주는 것은 사랑의 결과일지 모르나 증거는 아닙니다. 즉 사랑하면 아껴주고 잘 해 주지만 그 반대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사랑의 본질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음입니다. 절대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행위는 그 결과일 뿐 본질이 아닙니다. 이미 말했지만 사랑이 없어도 얼마든지 아껴주고 잘 해 줄 수 있습니다. 의사는 사랑하지 않아도 환자의 병을 더 잘 고쳐주고 119구조대원은 사랑이 없어도 더 구조를 잘 해 줍니다.상대를 이용하려고 작심하고 달려드는 사람은 가장 자애로운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다가 한 가지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뭘까요? 바로 사랑이 믿음과 유사하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믿음은 행위를 가져오지만 행위가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헌금을 많이 내고 봉사를 열심히 하고 기도를 오래 한다고 해도 믿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물론 믿음이 좋으면 이런 행위를 하지만 그 반대는 꼭 진실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과 행위의 관계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와 비슷한 셈이지요.
이러한 것을 사도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잘 표현했습니다. 아무리 큰 희생을 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고 하였지요? “그게 말이 되나? 사랑없이 그런 걸 어떻게 해?” 가능합니다. 소방대원들이 불을 끄기 위해 몸을 던진 것 그것이 상대에 대한 사랑의 결과라고 보증할 수 있을까요? 단지 사명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광의의 사랑일지 모르나.
믿음의 본질은 마음이고 사랑입니다. 아닐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동의하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에는 선 듯 동의하기 어렵지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신앙의 본질도 모른 채 신앙생활을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사랑을 그저 남녀 또는 부모 자식의 달콤한 행위로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사랑도 달콤합니다. 그것을 제대로 한다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위에 친구와의 우정 부부의 사랑을 언급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도 여러 가지 사랑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것은 참고하시기 바란다는 의미에서 여러 사랑을 소개했습니다. 그것이 이해가 되신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도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저는 10여년 전에야 하나님에 대한 저의 사랑을 제대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 전에는 하나님이 저를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저는 그저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신앙을 정의했습니다. 그러니 신앙은 기쁨이 아니라 부담이고 짐이고 따라서 인내하고 견뎌서 쌓아올려야 할 과제 또는 미션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참고 견디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야’ 라고. 매일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찬양을 해도 그것은 숙제를 하는 학생의 마음이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설레이고 행복해 하는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루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 때 숙제를 다 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불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10년 전 저는 하나님에 대한 저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이성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아이가 자라 부모를 제대로 인식하고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나를 알아주는 친구와 우정을 쌓아가게 될 때 부부가 서로를 자신의 반쪽이라고 인정하게 될 때 느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기쁨을 주었습니다. 예배 찬송 기도 성경 헌금 봉사 가 의무가 아니라 사랑의 결과가 되었으니 부담은커녕 행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가뜩이나 남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을 즐기던 저에게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행복감을 주었습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하나님에게 가슴설레이는 감정을 느끼다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생각과 삶 자체가 바뀌는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해야 한다“에서 ”할 수 있다“로 변하였습니다. ”기도 해야 한다“가 아니라 ”기도 할 수 있다“로 ”헌금해야 한다“가 아니라 ”헌금할 수 있다“로 바뀌는 행복감은 경험한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고려의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노국공주)와 정략결혼을 했기에 처음엔 결혼생활이 과제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그의 가장 큰 행복이 되었지요? 바로 그런 기분이라고 해야 합니다.
하루에 한 시간 하기도 힘들었던 기도를 6,7시간 이상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전에 다니던 교회 목사님은 하루에 5시간을 기도한다고 정하고 실행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 어렵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저라고 매일 5시간 이상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기도가 의무나 숙제처럼 느끼는 것이 목회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신앙의 프로가 어떻게 기도의 즐거움을 모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기도 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라는 찬송이 제겐 너무나 실감이 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느낌이니까요.
헌금은 어떻습니까? 헌금이야 말로 “해야 한다”가 가장 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쓰는 것이 아깝다면 그것이 사랑입니까? 사랑하는 자식 연인 친구에게 돈을 쓰는 것이 행복하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상대가 하나님이라도 마찬가지이어야 합니다. 저는 그런 사랑을 알고 나서 헌금이 얼마나 행복한 것으로 여겨지는 모릅니다. 예전에는 “헌금 종류가 왜 이렇게 많아?”라고 불평을 했지만 “하나님! 당신께 드릴 헌금 종류가 이렇게 많아 행복해요. 더 늘려 주세요!”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헌금이란 헌금은 몽땅 했습니다. 없으면 만들어가면서까지! 이 핑계 저 명분 그 이유로 했습니다. 지금은 명분을 늘리기보다 횟수와 금액을 늘리는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없어서 못 드리지 드리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혀. 왜냐하고요? 사랑하니까!
그리고 10년이 지난 오늘날 내게 믿음은 사랑처럼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 되었습니다. 나를 찾아오셔서 믿음을 가지게 해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그 분을 찬양할 때마다 가슴이 떨리고 헌금을 드릴 때 행복하고 –축복의 기대감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행위가 주는 기쁨 때문에- 기도할 때 달콤하고 등등...마음이 없다면 결코 느낄 수 없는 행복감으로 저의 믿음생활은 가득차 있습니다. 그 행복의 근원은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고 행위는 그 마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저는 오랜 부부처럼 오랜 부모자식처럼 오랜 친구처럼 사랑으로 하나된 관계를 만들어갑니다. 행위는 더 이상 그 자체로는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죠. 남녀가 데이트를 할 때 배가 고파 밥을 먹는데 그걸 사준다고 해서 그들이 사랑한다고 할 수 있나요? 인심 좋은 사람이라면 사랑이 없어도 사 줍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사줄 가능성이 큼니다. 그럼 그 사람이 저를 사랑하는 겁니까?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의 필자는 겨우 그러한 행위의 함정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자판기로 여기고 요구만 해 온 자신을 돌아보고 찬송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를 인정하며 기쁨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를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도 그런 단계에 이른지 이제 겨우 10여 년 정도 된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 전에는? 필자처럼 하나님을 자판기로 여겼죠.
쉬는 날이 되면 저는 외출을 하기 싫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부족했던 주님과의 연애를 마음껏 즐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일에 쫓겨 부족했던 달콤한 주님과의 연애 데이트를 원없이 누릴 생각에 전날 밤에 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아니 이미 그때 시작되었습니다. 평소보다 늦게 까지 주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이미 데이트는 시작되었으니까요. 당일이 되면 심지어 씻는 것조차 시간이 아까워 자꾸 미루다가 저녁 늦게야 씻은 날도 있습니다. 평소의 제성향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깔끔하지는 않아도 씻는 것만은 칼같이 하는)
휴일에 가장 힘들여 하는 것은 찬양입니다. 음악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하는 저에게 휴일은 찬양의 날입니다. 3,4시간은 기본으로 부릅니다. 갖가지 종류의 찬양을 소화하면서 저만의 콘서트를 개최합니다. 아니 찬양집회를 열지요. 검색창에 입력만 하면 원하는 찬양을 듣고 따라 부를 수 있는 환경에 감사드리며. 그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따라 부릅니다. 좋아하는 것은. 집이 넓고 이웃과 거리가 있어 다행이지요. 아니면? 클레임이 잔뜩 들어와 그것도 못 했을 것입니다. 이른바 ’층간소음‘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도는 어떨까요? 평소에는 요점만 간단히 하던 기도를 마음껏 길게 합니다. 친구를 위해 기도할 때 평소라면 꼭 해야 할 말만 했는데 그에 대한 느낌을 늘어놓으며 그에 맞춘 기도를 올립니다. “하나님! 이 친구는 이런 사람이니 이렇게 해 주세요”라고. 그럼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그 친구에 대한 사랑이 샘솟아 오르니까요. 친구든 가족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랑의 크기에 비례해 기도의 기쁨도 다르다는 점에서.
말씀은 어떨까요? 성경을 많이 읽는 건 기본이지만 그보다 더 즐거운 것은 신앙서적을 읽거나 동영상으로 설교 강의를 듣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듣고 보지만 휴일에는 작심하고 듣고 봅니다. 그래도 시간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저의 신앙의 멘토 손선미 선교사님을 알게 된 것도 치유의 여왕 홍예숙 사모를 접한 것도 천국에 대하여 가르쳐 준 서숙희 목사님과의 만남도 그렇게 이루어졌으니 참으로 문명의 이기가 고맙기만 합니다. 문명의 이기로 문명과 가장 거리가 먼 믿음을 키우다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까요?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 라고 했지요? 저는 “내 사전에는 지루함이 없다”고 말하고 싶네요. 걸으면서 찬양이나 인터넷 동영상 강의 설교를 듣고 앉으면 성경 신앙서적 인터넷 동영상을 보고 기도를 합니다. 때때로 전도활동도 합니다. 책을 나눠주거나 보내고 편지를 쓰고 합니다. 물론 만나서 전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제 삶이 영화같으니 세상 영화도 드라마도 시시해 집니다. 그런 거 안 봐도 매일 감동의 눈물을 쏟아내는데 무엇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에 시간과 노력과 돈을 쓰나요? 하루가 72시간 쯤 되면 모를까.
사랑의 본질이 마음이고 신앙이 사랑이라면 결국 신앙의 본질도 마음일 것입니다. 필자가 말하는 것처럼 주님을 자판기나 해결사로 만들지 마시고 사랑하는 님으로 만들어 그 관계를 깊게 형성해 간다면 신앙생활처럼 행복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라는 애인은 시도 때도 없이 만나주시는 고마운 분이라면 우리는 하루 24시간 곁에 사랑하는 존재를 대기시켜 놓고 있는 셈입니다. 이 얼마나 황홀한 이야기입니까? 어떤 연인이 이렇게 해 줍니까?
오늘의 필자는 자신의 기도를 ’청원기도‘에서 ’찬양기도‘로 그 시작을 바꾸었습니다. 저도 찬양을 마음껏 부르면서 기도를 준비하지만 찬양을 그저 준비의 도구로만 쓰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노래로 하는 기도이자 사랑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관계를 깊게 하면 매일매일 사랑에 가슴 설레이는 기쁨을 누립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관계를 깊게 하여 하나님과 사랑의 행복을 마음껏 나눌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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