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천국으로 가는 길고 긴 여정 ‘동방박사의 날’

닥터 양 2022. 1. 6. 16:58

천국으로 가는 길고 긴 여정 동방박사의 날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드리니라(마태복음 211)

 

 어렸을 때 일입니다. 초등학교 때인지 중학교 때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적어도 고등학생 때는 아직 아니었다고 확신하니 늦어도 중학교 때일 것입니다. 저는 저희 집에 세 들어 사는 집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100평에 가까운 큰 집이었는데(마당이 딸린 집)안 쪽에서는 저희 가족이 사는 안채와 세 사는 방이 두 개 정도 있었고 밖에는 잡화점에 딸린 방 2개짜리 셋집과 다른 셋집 3개가 붙어 있었습니다. 마당에는 늘 개가 한 두 마리가 있었으며 가끔 집안에서 고양이를 키우기도 했습니다. 마당에는 포도나무 같은 유실수를 재배하기도 하였고 여러 가지 꽃을 키우고 있었죠. 제법 살만한 집이지 않습니까? (부자였냐고요? 부자는 아니지만 제법 여유가 있었습니다)

  바깥 채에 있는 셋집의 툇마루에 앉아 밖을 보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아줌마 둘이 종이 하나를 들고 들어오셨습니다. 길을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가져온 종이에 그려진 약도가 가관이었습니다. 아무리 약도라지만 동네 이름과 길 하나 그리고 찾는 사람 집 아이 이름 하나 적은 게 전부입니다.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보다는 낫겠지만 모래에 떨어진 바늘찾기보다 어려운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가 찰 노릇이죠.

  그런데 더 기가 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아줌마들이 찾던 집이 바로 제가 앉아 있었던 그 셋집 사람들이었다는 거죠.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그분들은 모래 속에서 바늘을 찾으신 것이죠. 기가 막힌 행운(?)으로! 만일 그날 우리가 문을 닫고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찾을 수가 없거나 더 많은 고생을 해야 찾았을 겁니다. 자칫 그분들은 집 찾아 삼만리를 쓸 뻔했던 것이죠.

  생각해 보면 그분들은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겨우 도로 한 두 개 그어놓은 것을 약도를 들고 집을 찾아 나섰으니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떠나기 전에 금식기도라도 했을까요? 아니면 최소 통성기도라도. 어린 저이지만 하도 기가 막혀 50년 가까운 옛날 일이지만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지도르 들고 오시던 모습 그리고 불친절하기 이를 데 없는 지도의 엉성함, 그 집이 여기임을 확인했을 때 보인 기쁜 표정들...그 행운에 또 한 번 놀라 어안이 벙벙이 된 제 모습(물론 상상입니다) 등등...지도 보고 놀라고 그 집이 여기인 것에 놀라고... 마침 제 옆에 않아있던 셋집 아이를 알아보신 거죠. 그 아줌마들이..“아 너구나...”하며!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무모한 (물론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도전(?)이 드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전화가 희귀했고(물론 유선전화입니다)그래서 미리 연락을 해서 장소를 확인하기도 어렵던 시절에 사람들은 그렇게 생전 안 가본 집을 장소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렇기에 뜻밖에 반가운 사람도이나 불청객이 찾아오는 일이 빈번한 불확실성의 시대였습니다. 요즘은 휴대전화로 연락하고 가지 않으면 자칫 불청객이 되어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할지 모르니 이런 불확실성은 거의 기대도 염려도 할 수 없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깜짝쇼도 마른 하늘의 날벼락도 없어진 확실성이 시대가 된 것이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확실성의 시대이기에 나타나는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가 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불확실성이 일반화되어 있으니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도 상대적으로 작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불확실성이 거의 사라졌으니 어쩌다 그런 것이 생기면 엄청나게 공포심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른바 결정장애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평소에 확실한 자료나 통계 등을 기반으로 결정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는데 그것으로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힐 때 생기는 증상입니다. 그만큼 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도 어떤 버스가 몇 분 후에 오는가를 미리 알아야 직성이 풒리는 시대이니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었하겠습니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불확실성은 더욱 커져갈 것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누구와 만날 때 해질 무렵이라든지 점심 무렵같이 우리세대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습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과거 우리나라에 와서 한국인들의 시간개념이 애매한 것에 놀라 ‘Korean Time’(코리안타임)도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인데 그렇다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태고적부터 정확한 시간을 측정해 살아온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기계문명에 앞서(적어도 근대에서는) 그 시차 때문에 생긴 갭일 뿐이죠. 오늘날에 코리안 타임을 지키다가는 신용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힐 것입니다.

  중세에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내리는 벌 중에 성지순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종교문제에 대한 재판을 공시적으로 하여 갖가지 처벌을 할 수 있던 시대이니 이런 벌이 있었겠지만 아니 성지순례가 왜 벌이야?’라는 의문이 생길 성입니다. 요즘엔 일부러라도 하는 마당에 그게 벌이 될까요?

  물론 됩니다. 그 시대라면 여행은 우리가 생각하는 즐거운 것이 아니라 위험과 갖가지 돌발사태가 기다리고 있는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고 인신매매를 당해 노예로 팔려 갈 수도 있었으며 가진 것을 다 빼앗겨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행자들은. ‘어린이 십자군이라는 것을 아시나요? 어른들의 꼬임에 빠져 아이들이 십자군에 참가했지만 도중에 인신매매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천로역정이라는 소설을 아시지요? 존 번연이라는 분이 쓰신 기독교 소설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인물이 멀고 먼 길을 걸어가서 마침내 천국에 도달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라면 겪어야 할 각종 박해와 위기 유혹 등을 여행이라는 당시로서는 가장 불확실성한 과정을 통해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모습을 통해 참된 신앙인의 삶의 모델을 삼으려고 한 것이지요. 얼마나 이 작품이 지지를 받았느냐는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린 기독교 서적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여행의 불확실성이 실종되거나 약해진 시대였다면 훨씬 덜 팔렸을지 모르겠지만 오랜 세월 동안 여행의 불확실성이 견고하게 존재했으니 더욱 공감되어 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의 필자가 소개하는 동방박사들도 그러한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도전한 끝에 인류의 구세주 예수탄생의 현장을 직관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예언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움직이는 별을 따라 온 것입니다. 어찌보면 제가 앞에서 언급한 약도 보고 온 그 아줌마들보다 더 담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줌마들이야 못 찾으면 돌아가도 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엄청난 시간과 힘을 낭비하고 또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일이니까요.

  동방박사 이야기에는 번외로 이런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동방박사가 3명이 아니라 4명이었는데 나머지 한 사람이 동행자들과 떨어지는 바람에 오랜 시간 혼자 길을 헤매이다가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님을 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허구이겠지만 그들의 순수한 믿음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제법 흥미진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크리스천이나 동방박사 모두가 불확실성에 도전한 위대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여행은 마치 오늘날 우리가 교통기관 숙박시설 등 각종 편의가 갖추어져 있는 바람에 불확실성을 잊은 채 여행을 즐기는 모습과 대조적인 것 같습니다. 완벽하게 보장되지 않으면 선택조차 하기 여러워진 현대인의 모습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장엄함 또는 신실함을 느낄 수 있어 마음이 숙연해지기까지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과거에 비하여 신앙이 주는 불확실성이 약해진 오늘날 우리는 과거에 순교를 각오해야 했던 시절은 물론 여러 가지로 어려움 속에 처하면서도 신앙생활에 전심전력을 다한 시절과 달리 매우 좋은 신앙적 조건 속에 놓여 있습니다. 최첨단 장비가 갖춰진 예배당에서 예배를 하고 교회가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를 즐기며 안락한 신앙생활을 하지만 과거의 간절함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네요.

  하지만 그럼에도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길 그래서 천국에 도달하는 길은 과거에 비해 평탄하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내부의 적에 더 약합니다. ‘종교와 사랑은 말릴수록 뜨거워진다는 농담이 있습니다. 저는 양자를 다 경험한 사람으로 격하게 동의합니다. 박해가 없기에 신앙을 유지하기 더 어렵습니다. 주변에서 말릴 때는 뜨겁게 사귀던 남녀가 그것이 사라지자 내부총질로 무너져 헤어져 버립니다. (제 경험담) ‘하던 00도 멍석 깔아 놓고 하라고 하면 안 한다는 말도 있지요. 그것은 간절함이 사라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방금 전 저는 유튜브에서 아리까리한(?) 영상들을 접했습니다. 물론 유튜브에 야동이나 그에 접근한 영상이 들어 있을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합법적 범위내에서 최대한 노출을 한 여성들의 야한(?)포즈가 들어 있는 동영상이 여러 개 눈에 들어 왔습니다. 이른바 음란물이라고 보기에는 수위가 약하니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영상이 의외로 더 자극적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얼마나 음란하며 패악한 세대인지 알 수 있는 증거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이 과거에 비해 편해졌다고 할 수만은 없음을 말해 줍니다.

  음란이 유일한 방해물은 아닙니다. 물질주의가 어쩌면 더욱 큰 유혹일 수 있습니다. 서로가 물질의 소유를 자랑하는 시대 그것이 없으면 뭔가 뒤떨어지고 무능해 보이는 시대에는 누가 봐도 문제가 있는 음란물보다 합법적으로 죄를 짓기 쉬운 물질주의가 더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폭식이 음식에 대한 죄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운 것처럼 물질 소유도 죄라고 말하기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모은 물질적 축적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요?

  크리스천의 길에 들어선 지 최소 30여 년이 넘어갔습니다. 최소라고 표현한 것은 이런저런 세월을 다 합하면 최대 50년까지 되기 때문입니다. 비록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예수를 믿거나 의식하며 살았던 시절이 기니까요. 신앙연륜이 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저의 신앙생활도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유혹과 공격에 넘어져서 헤매거나 죄 속에 빠져 살았던 시절이 제법 있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판단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지만 신앙적으로는 죄인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온 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이 아니었다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을 저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저 눈물이 앞을 가릴 따름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라라는 찬양은 뼛속 깊숙이까지 느껴지는 진리입니다.

  언제 부르심을 받고 천국에 갈지는 모르지만 남은 여정도 그렇게 은혜에 의해 완주하고 싶습니다. 물론 지금 이대로가 아니라 더 성숙하고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로 천국문에 도착하여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를 위해 예비한 천국 잔치에 참여하려라는 칭찬과 함께 예수님의 영접을 받는 영광을 누리고 싶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가게 되면 보통은 천사들이 데릴러 오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예수님이 직접 오신다고 하는데 저도 그런 영예로운 대접을 받고 싶네요. 욕심이 지나칠까요?

  지금도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은 왜 저입니까?“ 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봬면 꼭 여쭤보고 싶은 질문입니다. 저보다 더 잘나고 착하고 멋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그들이 아니고 저같이 못나고 악하며 별 볼일 없는 사람을 선택하셨습니까? 물론 성경을 통해 각종 강의나 설교를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매우 궁금하네요.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 하리라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시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로 할 수 없도다 /성령 감화 받은 영혼 /하늘 나라 갈 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 하셨네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 하셨네

 지금 이 순간에 떠오르는 찬송이 바로 이곡입니다. ”예수 인도 하시니“ ”예수 인도 하셨네그렇습니다. 예수 인도 하심이 저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입니다. 갓난 아이 같은 저를 한 걸음 한 걸음 이끌어 준 예수님이 인도하셨으니 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저는 뒤로 물러가거나 도망갈 것 같습니다. 원래 소심증 환자였던 제가 지금만큼이라도 믿음에 대담해 진 것도 그런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기도 응답? 제가 끌어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응답을 미리 준비하시고 저에게 시련을 주어 기도하도록 하신 후 그에 대한 응답을 주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기획하시고 실행하신 것이며 저는 그 분의 이끄심에 의해 완성된 작품이었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믿음도 역시 그 분의 작품일 뿐입니다.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분의 손에 이끌리어 따라왔습니다.

  그것은 순종이었다고요? 아닙니다. 습관입니다. 계속 그렇게 살다 보니 습관이 되어하게 된 것이 겉보기에는 순종처럼 보일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조금씩 스스로 순종하는 것을 실천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 자신이 조금은 대견스럽지만 자랑할 것은 절대 아닙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은 멀지만 그래도 마음은 평안합니다. 앞으로도 주님의 은혜가 저를 이끌어 주실 것이니 염려하지 않겠습니다. 염려와 불안은 주님께 만기고 앞으로는 더 담대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저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라며 애교 아닌 애교라도 부려보고 싶네요. 그래서 언젠가는 장성한 신앙으로 주님께 칭찬도 듣고 싶습니다. 그럴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이 여정을 하루하루 걸어가렵니다. 주님 손을 잡고. 저와 여러분이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의 기도 (양의모)

 

저를 못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난 사람으로 태어나서 주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하심이겠지요.

저를 시련 속에 놓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환란 날에 부르짖으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라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저를 외롭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 외로움이 주님에게 더 찾고 의존하게 만들었으니까요.

미래를 불안하게 만드신 것 감사드립니다.

불안하였기에 눈물로 기도하며 주님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요.

죄에서 바로 건져 주시지 않음을 감사드립니다.

죄 중에 빠지는 것이 결코 나를 진정한 행복을 주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도망가도 포기하시지 않고 기다려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에 이렇게 저를 사랑하시는 분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아름다운 찬양으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찬양은 산 제사이며 노래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것을 통해 제 신앙이 커가고 제 사랑이 깊어갔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으로도 저에게 더 많은 시련 고통을 주시옵소서

그로 인해 제가 주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올바른 게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일이 올바름의 기준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주님은 공의로우신 분이 아니라 주님이 곧 공의라고 인정하게 하소서.

주님이 사랑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곧 사랑임을 인정하게 하소서

주님이 저이고 제가 곧 주님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주님은 저의 삶의 알파요 오메가이십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오니 마음껏 사용하여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