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걱정을 기도로’

닥터 양 2021. 11. 29. 08:22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걱정을 기도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립보서 4장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24)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고 구하면 받은 것이라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된다고 하니 놀랍지 않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걱정할 일도 없고 염려할 일도 없습니다. 마치 마법의 지팡이를 갖게 된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여러분! 이 말을 그대로 믿고 따라 해 보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아 당혹스러웠던 적은 없습니까? 저는 어젯밤에 비슷한 설교를 듣고 그대로 해 보았는데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손선미 선교사께서 믿는 자들에게는 수호천사가 따라다니니까 천사에게 명령을 하면 그들이 따른다”라고” 하셨기에 그대로 해 보았습니다. 사소한 것부터 해 보자 해서 지금 잘 테니까 내일 아침 000분에 나를 깨워라고 천사에게 명령을 하고 잠을 잤지만 저는 그보다 30분이나 늦게 그것도 알람 소리에 깼습니다. 조금 실망했습니다. 선교사님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믿음이 없어서일까요?

  선교사님은 그것을 될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고 하셨으니 제가 믿지 못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는 했지만 마음에서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받은 줄 믿으라는 말을 지키지 못한 것이죠. 마음 어디선가 의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죠.

  예전에 한창 기도에 열중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기도가 삶의 중심이 되어 버릴 정도로 열심히 그리고 오래 기도하던 시절 저는 마법의 지팡이를 얻은 것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던 기억이 없을 정도입니다. “금 나와라 뚝딱하면 금이 나올 것 같은 마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아쉽게도 금을 달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많은 돈이 제게 주어졌습니다. 돈이 필요해 돈을 달라고 기도하면 그대로 되었고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면 어느덧 문제가 해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응답이 잘 안 된다고 할 정도입니다. 물론 지금도 응답은 대부분 되고 있지만.

그때도 비슷한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기도를 오래 할 시간이 없어 하나님 저 한 시간만 기도하게 해 주세요” “삼십 분만 기도하게 해 주세요한 시간 기도가 우습게 여겨질 정도로 기도가 즐거웠던 시절이었으니 이런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러면서 한 번도 알람을 맞춰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런 기도도 하지 않지만 설령 한다고 해도 알람을 맞춰 만약을 대비할 것입니다. 실제로 앞의 경우도 알람 덕에 일어났지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때 믿음이 지금보다 낫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은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더라도 기도로 시간을 맞춰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알람을 사용하죠. 그것은 기도를 알람 대신으로 사용할 믿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뭘 그런 걸로 기도를 하는가라는 생각이 저를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하지만 그 때는 그런 기도를 하면서 알람을 맞춰놓지 않을 정도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죠. ‘주님이 틀림없이 들어주실 거야라는 생각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요. 이 말씀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김하중 님의 명저 하나님의 대사에는 기도가 저금할 수 있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영력이 뛰어난 분에게 기도를 받았을 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대사님! 혹시 집안에 목회자나 순교자가 계신가요?” “아니요” “그런데 기도가 엄청나게 쌓여 있으시네요. 감히 누구도 대사님을 함부로 못할 정도입니다그의 뒤에는 기도가 폭포수처럼 쌓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 짐작에는 어머니가 기도를 많이 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말을 들은 이후 김하중 님은 기도에 힘쓰게 되었으니 그의 기도의 폭포는 마를 날이 없었겠지요.

  그렇다면 저의 경우는 어떨까요? 답은 이미 눈치채셨을 겁니다. 그 때 저는 하루에 최소 7시간 이상 기도를 했습니다. 물론 적게 한 날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한 날도 있으니 그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요? 놀고 있었던 것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엄연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프리랜서일이었기에 좀 더 용이하게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기도가 무조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예 백수 시절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있다고 기도를 그렇게 오래 하지는 않았습니다.

  기도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지 시간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지난해 가을부터 올봄까지 저는 사실상 백수였습니다. 글도 열심히 쓰고 책도 엄청 읽었지만 얽매인 적이 없으니 그렇게 봐야 하겠지요. 그렇다고 기도를 많이 했느냐? 전혀 아닙니다. 제가 결신 한 이래 가장 기도하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지만 간절함이 없으니 기도가 될 리가 없습니다. 집에서 편안히 걱정 없이 지내니 그런 것 아닐까요? 그런데 봄에 직장에 다니면서 다시 기도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직장을 다니니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생활화되어 오랜 시간 기도하던 시절 저는 그 기도의 축적으로 속된 말로 기도빨이 좋아진 것이고 지금은 반대로 기도의 축적을 죄다 까먹었기 때문에 기도빨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것이 아닐까요? 다시 말해 믿음이란 그저 믿어야지하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축적하고 성장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역으로 말해 그것이 없다면 믿는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해도 실제로는 마음 어디선가에 의심이 자리 잡게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물론 그것을 본인도 모른 채.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지만 그것이 그저 믿겠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축적과 성장이 있어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을 믿으려면 오랜 시간의 신뢰구축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마음 어딘가에 의심을 간직하게 되겠지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이고 그러니 의심을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손 선교사님은 그냥 믿으라고 역설하시지만 그것이 그냥 믿으려고 해서 믿어진다면 세상에 믿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손 선교사님이 무슨 사기를 친 것은 아니고 그런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건 제 주장이니 참고만 하십시오. 선교사님이 가진 믿음의 내공을 따라갈 정도의 믿음은 제게 없으니까요. 하지만 때론 구경꾼이 더 정확하게 사실을 집어낼 수도 있다는 점도 아셔야 합니다.

  제가 이 문제에 이렇게 열을 올리는 것은 오랜 시간 고민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하는 것 사이에는 갭이 있게 마련입니다. ‘난 이렇게 살거야하더라도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거나 아예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믿는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제가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말씀도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 열심히 하던 그 시절은 매일 집에 돌아가 성경을 상당히 많이 읽고 신앙서적도 열심히 읽었던 시절이기도 했죠) 찬양도) 열심히 부르던 시절에는 응답이 잘 오고 그렇지 않을 때는 응답이 더디오거나 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믿음이란 마음만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고 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것도 또 다른 측면에서 봐야 합니다. 손 선교사님은 중국에서 선교할 때 치유가 더 잘 일어났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이유로 사람들이 순수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저는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이것도 제가 선교사님의 설교 영상을 많이 보고 또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에 생긴 것이겠지요?) 믿음이 시간과 꼭 비례해서 커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중국에서 만난 분들이 신앙생활을 오랜 시간 했을 리가 없습니다. 초신자들이 대부분이니까요.

  그렇다면 이것은 탕자의 비유나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사실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나중 된 자가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가 된다는 법칙이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해도 마음속에 진정한 믿음을 키울 수 없었다면 (실제로 이런 경우가 제법 있죠)어린 아이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믿음을 접한 사람에게 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탕자나 포도원 품꾼 비유에 나오는 늦게 온 노동자들은 간절함으로 인해 선배들을 제치고 믿음의 성장을 거둔 초신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몇 십년 신앙생활해도 방언을 못 받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곧바로 받은 초신자도 있습니다. 그가 간절함을 가지고 순수한 마음으로 믿는다면 이런 현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쓰시고자 믿음을 마구잡이로 부어주셔서 믿음이 급성장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들은 간증입니다. 어느 분이 집에서 쉬고 있는데 자신을 부르는 큰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아무도 없어 이상하다고 해서 들어갔는데 다시 들려서 나가 보았습니다. 그 목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하나님을 믿지도 관심도 없던 분이니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분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택함을 받은 분이기에 그 후로 급속히 신앙이 성장해서 간증집회를 다닐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럴 경우는 따지지 마시고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를 통해 그분께 영광 돌리시면 됩니다. 

 대망교회 홍예숙 사모님의 경우도 비슷한 경우일지 모릅니다. 의사의 오진으로 장애를 안고 태어났고 그로 인해 기도원에 10살의 어린 나이에 맡겨져 그곳에서 놀랄 정도로 기도를 하였고 그래서 중학생 나이에 미국까지 가서 부흥집회를 인도한 것은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기적입니다. 그것이 사모님의 노력 때문이 아님을 누구나 납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분을 들어 쓰시고자 베푸신 은혜라고 하겠지요. 믿음이 전부 은혜의 결과이지만 좀 더 특별하게 은혜를 받는 경우가 있다고 할 수 있고 홍사모님도 그런 케이스라고 하겠습니다. 왜냐고요? 궁금하시면 하나님께 여쭤 보십시오. 제가 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걸 알면 지금 이러고 지내겠습니까? 저도 부흥 집회하고 다니겠지요. 아직까지는 제게 그런 특별 은혜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알 수 없으니 미래는 모르겠습니다. 

  결국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식의 가르침은 믿음이 마음에 얼마나 자리잡고 있느냐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유명한 평신도 사역자 박효진장로가 신앙의 연조가 아직 적을 때 축사를 하다가 귀신에게 혼쭐이 나거나 속았다는 말을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겠지요. ‘나 같은 사람이 하면 되겠어?’라는 의구심을 자신이 품었음을 그는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귀신이 그 사실을 귀신같이(?) 알고 덤벼든 것이지요. 함부로 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말 자체가 제게 믿음이 부족하다는 증거일까요? 그래서 아침에 알람에 의존해 일어난 것일까요? 오 주여! 저의 믿음없음을 용서하소서. ) 믿음이란 축적과 성장으로 커지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믿고자 하면 시간과 축적에 관계없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셨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필자는 불안해하지 말고 감사로 구하라고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는” 가르침을 실천하라고 합니다. 물론 훌륭한 가르침이며 우리는 그것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팩트이며 이를 부인하는 것이야말로 불신자들이 좋아하는 용어로 비과학적인 것입니다. 저 자신도 경험한 사실이니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할 생각으로 시도를 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믿음의 힘에 대한 의심을 품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기도가 무력하거나 하나님이 여러분을 외면하시거나 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믿음의 분량이 마음속에 쌓이지 않았거나 순수하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믿음대로 된다’ 거나거나 받은 것이라 믿어라는 그냥 마음만 먹으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저는 주장하고 싶습니다. 주관적 의지와 달리 그것을 가능하게 할 객관적 조건이 있다는 확신을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개나 소나 다 기적을 일으킬 것이고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이에게 마구잡이로 퍼주면 아이가 잘 될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사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게 목적이라면 다 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마음에 굳게 갖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 믿음이란 그저 기적을 경험하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관계에서도 퍼주기를 하면 사랑이 생길까요? 그것도 갑자기. 전혀 아닐 겁니다. 도리어 상대를 호 갱이로 보고 덤벼들 겁니다.. 마치 박효진 장로를 괴롭힌 귀신처럼.

  믿음은 물론 선물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믿음을 축적하고 키우는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손선교사님은 40일 금식기도도 하신 분입니다. 그 분이 그냥 믿으면 된다고 해서 우리도 같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본인은 극구 부인합니다.전 그저 주님의 능력을 빌릴 뿐입니다좋은 자세이지만 자신이 믿음을 축적하고 키워서 오늘에 이르렀음을 잊고 한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기도 많이 하던 시절과 지금을 비교해서(상대적입니다. 지금도 기도를 소홀히 하지는 않지만 그때에 비할바가 아니라는 것이죠) 지금) 응답이 더디고 또는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런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으시면 그냥 외우지 마시고 이걸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 저는 어떤 여성과 깊은 교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제가 하는 말이라면 다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제가 그녀와 교제를 소홀히 해서 거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지금 아무리 열심히 교제에 매달려도 과거처럼 그녀는 저를 믿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는 저의 정성을 보면서 믿음을 키워가게 되었습니다. 머지않아 과거의 수준 아니 그 이상으로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이죠. (여자분이라면 남자를 대입하시면 되겠지요. 연애경험이 없다면 친구를 대신해도 좋고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러니 함부로 믿지 마라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려는 의도 때문이 아닙니다. 결코. 그 반대로 저는 믿음의 힘을 믿고 있습니다. 다만 자신의 기도에 응답이 오지 않거나 늦어질 때 이런 점을 고려하여 불안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였는데 왜 안 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건가라는 식의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지 말라는 것이죠. ‘어쩌면 당신은 믿음이 그만큼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믿음을 키우려고 그런 것일지 모릅니다고 가르쳐드리고 싶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모두가 일시에 한꺼번에 성장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초신자인데도 급성장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십 년 신앙생활을 했는데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인생에서의 성장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이 먹었다고 똑똑한 것도 아니고 어린 나이에 큰 깨달음은 얻은 현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30살에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지구 상의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수준의 현자셨습니다. ‘창녀와 세리가 먼저 천국에 간다고 한 말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된 그들은 신앙 엘리트인 바리새파 사두개파 사람들을 앞서 갔습니다. 그런 것들이 그저 마음만 먹으면 저절로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해서 나타난 결과의 차이이겠지요. 저는 믿음의 총체적인 법칙을 완벽하게 말할 자신은 없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누구도 믿음의 크기를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홍예숙 사모님은 자신을 그저 하나님의 도구였다고 하며 자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극력 경계하십니다. 손 선교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믿음이 좋은 분들은 대체로 그렇지만 모두는 아닙니다. 은혜를 자신이 공로로 여기고 자랑하며 교만해져서 실족한 분들도 제법 있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지만 믿음은 크기에 관계없이 자신이 순수하게 노력해서 얻는 경우는 없습니다. 제 자신도 '내가 왜 이런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별 볼 일 없는 믿음을 가진 저도 그런데 큰 믿음을 가진 분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평범하게 살면서 믿음을 가지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부르짖게 하시는 것이니 은혜가 아니면 뭐겠습니까? 마치 이쁜 자식 매 한 대 때리는 것처럼 그분이 우리를 치시는 겁니다. 그게 없는 분들은 신앙의 성장이 더 디기 쉽습니다. 미운 자식이라 해야 할까요? 물론 이것도 함부로 판단할 일은 아닙니다. 모두가 스타가 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 키우시려는 분들에게 은혜를 좀 더 베푸는 것이니 자신이 받지 못함을 자책할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은혜론에 안주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으니 할 수 없지'라고 체념해서는 곤란하겠지요.   

  그러니 서두르지도 초조해하지도 마시고 은혜를 간구하십시오. 오직 필요한 것은 간절함입니다.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도 제자리 걸음인 것은 간절함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구하지 않았던 결과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분들은 구원의 감격도 간절함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판기나 자동응답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는 분이십니다. 마음에 믿음이 없이 의식적으로만 믿음으로 기도한다고 해봐야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간절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시간의 길이가 곧 신앙의 깊이라는 식의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시고. 문제는 질입니다. 간절함으로 인한 간구의 질 말이죠.저와 여러분이 간절함으로 신앙을 성장시켜 믿음대로 될 지어다라는 가르침을 제대로 경험할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