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환난날에 부르짖으라 내가 도우리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닥터 양 2021. 11. 27. 06:32

환난날에 부르짖으라 내가 도우리라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가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시편 14518-19)

 

  부흥회에 다녀온 날의 일입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은혜받은 것 응답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그 감동을 되새겼습니다. “어머니 어때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저는 당연히 어머니께서 공감해 주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비록 저와 달리 가톨릭을 믿고 계시지만 그래도 매일 저희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어머니에게 이렇고 저렇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만큼은 달랐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뜻 밖의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부흥회 따라다니면 인생이 달라지니? 노력을 해야지 노력을! 사람은 노력을 해야 성공을 하는거야” “저 노력 하잖아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이런 대화가 계속되자 저는 멘붕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저는 이런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셨는데 그럼 왜 기도하세요. 노력이 전부라면 왜 기도하세요? 어차피 들어 주실 거라고 믿지도 않는 기도는 왜 하시죠?” 말하고 나니 아차싶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평소에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자제해 온 저이지만 그 순간만은 알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 올랐기에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분노라기보다는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이었습니다. 그것은 서러움이기도 했습니다.

  믿음 생활을 하시는 분들중에 저의 어머니 같이 말씀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래서 불신자 뿐 아니라 믿음의 벗들과 이야기를 할 때 조심스럽습니다. “넌 지겹지도 않니?” “뭐가?” “왜 입만 떼면 하나님 타령이니..지겹다..” “???...” 분명 믿는 형제자매들인데 왜 이런 반응이 나올까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자 결국 저는 말조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제가 신앙이 좋다고 자랑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이 신앙의 기복이 심해 고민하던 제게 그런 자부심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꾸준히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이 부럽고 존경스러운 제게 자부심은 사치스러운 말입니다. 그저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혹시 제가 외식하는 자인 건가요?

  제가 그날 부흥회에서 기뻤던 것은 제가 원하는 응답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제가 원하지 않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부담을 덜어달라고 기도해 왔지만 주님은 제게 그 부담을 지라고 하십니다. ‘포기하자 마라가 그것이었습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그 부담을 내려놓게 해 주세요. 저 너무 힘들어요. 다 포기할래요’ ‘안 된다.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게 아니란다. 내가 도와주리라’ ‘아멘. 그럼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대화를 주님과 나누면서 버티지만 그래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기에 부흥회에서 내 뜻이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내가 제대로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은 것일까?’ 이렇게 의구심을 가지고. 응답이라면 일이 잘 풀리고 그래서 평안이 찾아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부담은 커지고 힘들기만 하니까 혹시 제가 사탄의 목소리를 주님의 응답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럴듯한 핑계를 생각해 낸 것이었습니다. ‘강사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당장 내려 놓아야지이런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상담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답도 주님의 응답과 같았습니다. 더 이상 도망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후로도 저는 다른 곳에서 기도를 받으면서 물었습니다. “정녕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까?” 기도자께서는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입니다이런 답을 해 주셨습니다.

  원하는 답이 아닌데 왜 기뻤을까요? 그것이 제가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분이 저의 삶에 간섭하시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들은 응답이 거짓이었다면 저는 주님의 보호와 사랑에서 멀어져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저를 비참하게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기도를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라는 안도감이 밀려들었기에 제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지만 기뻤습니다. 이렇게 연약한 신앙을 가진 제게 자부심이니 뭐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워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자 혹시라도 잘못된 것은 없을까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말한 것인데 자랑질로 여겨졌다면 그저 죄송할 뿐입니다. 믿음이 주님의 은혜라면 자랑할 대상은 주님뿐이겠지요.

  오늘의 필자도 그런 감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멀어졌다고 생각하여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응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출산을 할 때 힘이 되 준 간호사에게 자신이 힘들게 낳은 자녀를 보여주고 싶어 기도한 그녀의 앞에 생각하지도 않은 곳에서 생각하지도 않은 방법으로 그 간호사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역시 주님은 가장 좋을 때와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임을 필자도 저도 확인한 셈이비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얼마나 그 응답을 기대하고 있을까요? 혹시라도 기도 따로 생각 따로 움직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는 말씀을 그저 성경에 갇혀 있는 비현실적 가르침으로 여기고 기도하면서 여전히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한 채 살아가시지는 않으십니까? 물론 저도 그렇지 않다고 자부하지 못하겠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이렇게 찬양하면서도 여전히 나의 힘과 지혜 능력에 의존하는 것은 아닙니까? 물론 힘과 지혜 능력을 모두 버리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필요해도 결정권자이신 하나님의 결재가 없다면 모든 것이 헛됨을 믿으십니까? 아무리 좋은 기안도 최종결정권자이신 사장님의 결재가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교제를 할 때도 믿음이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남녀가 사랑을 해서 연애를 하고 가정을 이루어가면서도 상대에 대한 불신의 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과연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 라는 의구심이 늘 따라다닙니다. 그것을 하나하나 극복하면서 믿음은 굳건해지고 그래서 어느날 두 사람 사이에 견고한 믿음이 만들어진 것을 깨닫게 된다면 두 사람의 사랑은 풍성한 열매를 맺은 성공적인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엔 그런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살아가는 부부가 너무나 많습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로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과의 교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분이 아무리 우리에게 응답을 주시고 축복을 내리시더라도 우리의 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전적인 의존’ ‘절대순종의 경지에까지 이르러 주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의 연단이 필요할까요? 나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와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하려면 얼마나 많은 기도와 말씀 그리고 찬양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여야 할까요? 보이는 사람을 믿는 것도 쉽지 않은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조금만 응답이 늦어져도 하나님! 당신은 정말 살아계십니까?’ ‘주님!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의구심과 불만이 터져나오는 연약한 우리에게 그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표대를 향해 나아가는마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치는 자들은 썩어질 면류관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는데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달리는 우리가 그보다 못하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주님이 우리를 맞이하실 것은 믿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고난을 주의 은혜로 이겨내며 달려갑시다. 그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도우리라라고 약속하신 주님의 은혜로 완성되는 사명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믿고 달려가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말을 맞이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