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혼자가 아닌 나 ‘열린 마음’

닥터 양 2021. 11. 27. 08:06

혼자가 아닌 나 열린 마음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이사야 49장 16절)

 

  “삶이 무서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무서워 종교를 만들었다누가 말했는지 모르지만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읽은 말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를 생각하면 그럴듯한 문구입니다. 다만 종교가 죽음이 두려워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은 반만 지지하겠습니다. 다른 종교는 그럴지 모르나 기독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인간이 만들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짝퉁과 진짜를 구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혼자가 되면 불안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생존에 대한 위협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와 맨손으로 1대 1로 싸워서는 이기기 어렵습니다. 천하장사 임꺽정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다고 하는데 과연 진실일지 의심스럽습니다. 성경의 인물 삼손은 사자를 맨손으로 때려잡는데 그것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니까 엄밀히 말하면 맨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맹수가 아니더라도 혼자만 산다면 겪어야 어려움은 헤아릴 수 없겠지요.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는 그냥 소설이니까 액면 그대로 믿어서도 안 되지만 설령 믿는다고 해도 그렇게 살아남을 수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은 그냥 쓸쓸한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크겠지요.

  하지만 인간이 사회를 만들어 협력하며 지내면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는 물론 각종 자연재해 등에도 상당 수준 대처가 가능하게 됩니다. 백수의 왕 사자도 무리를 지어 지내는 것은 단독으로 사는 것에 비해 생존확률이 높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냥을 해도 혼자 하면 쉽지만 않지만 무리가 협력하여하면 사냥감을 잡을 확률은 훨씬 높아지겠지요. 실제로 사자의 먹이사냥은 유기적인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팀플레이의 모범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백수의 왕 사자도 그러한데 인간이야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더구나 인간에겐 사자에게 없는 지혜가 있으니 이를 활용하면 지구 상에서 당할 자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지요.

  약한 존재일수록 함께 있는 것을 선호합니다. 초식동물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지만 육식동물은 상대적으로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자보다 여자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경우가 많은 것은 결국 생존에 대한 불안이 크기 때문이죠. 그것이 평균수명을 높이는 장점이 있는 반면 창의성 자립심의 저해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학생들을 지도한 경험에 따르면 남자아이들은 목적이 생길 때 모이지만 여자아이들은 모이기 위해 목적을 만들더군요. 아니면 아무 목적 없이 모이고. 예를 들면 남자아이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만나지만 여자아이들은 만나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어차피 만났으니 영화를 본다고 해야 할까요?

  연봉 10억을 자랑하는 스타강사(유수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친구와 밥을 먹은 적이 없어요이해가 되지 않죠? 물론 스타강사가 되기 위해서는 또는 되었으니까 엄청나게 바쁠 수밖에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녀가 거느린 스텝도 여러 명이니 그 사람들 먹여 살리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삶을 살아야 할 겁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여성이지만 무리를 지어 다니는 삶에서 벗어나니까 스타강사라는 지위에 오른 것이니 친구와의 만남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심지어 가족과도(당시 미혼) 잘 만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가족들도 그것을 아니까 그녀의 역할은 입금 담당이 되었다고 합니다. (돈줄!)

  하지만 돈줄이 되면 생존이 보장될까요? 긍정적인 답을 하기 어렵습니다. 요즘 가정의 남편들 아버지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돈줄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 ATM이라고 하지요. 돈만 보내주고 가족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니 가족들은 그의 부재를 아쉬워하지 않게 됩니다. 심지어 아빠의 필요성을 모르는 자녀들조차 생겨납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빠와 남편의 퇴직은 그나마 남아 있던 필요성조차 말살시켜 그를 한낱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버리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가족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 점입니다. 아빠와 남편의 소외 말이지요. 하지만 황금만능 자식 중심이라는 이 사회의 풍토는 그런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주 5일제 근무에 가장 반대한 사람들은 기업주가 아니라 가정주부들이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남편의 수입이 줄고 일찍 들어오게 되니 귀찮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미 남편과 아빠가 인간 ATM이 되어 돈줄 노릇을 하고 또 해야 한다는 사실을 극명히 보여준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남편과 아빠가 퇴직해서 입금이라는 기능을 못하게 되면 퇴물 취급되고 그래서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이대로 좋은 것일까요?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있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서영은이라는 가수가 부른 혼자가 아닌 나라는 노래는 그러한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혼자가 아닌 나’ (서영은)

이제 다시 울지 않겠어 더는 슬퍼하지 않아 다신 외로움에 슬픔에 난 흔들리지 않겠어

더는 약해지지 않을게 많이 아파도 웃을 거야 그런 내가 더 슬퍼 보여도 날 위로하지 마

가끔 나 욕심이 많아서 울어야 했는지 몰라 행복은 늘 멀리 있을 때 커 보이는 걸

힘이 들 땐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비가 와도 모진 바람 불어도 다시 햇살은 비추니까 눈물 나게 아픈 날엔 크게 한 번만 소리를 질러봐

내게 오려던 연약한 슬픔이 또 달아날 수 있게

가끔 어제가 후회돼도 나 지금 사는 오늘이 내일 보면 어제가 되는 하루일 테니

(중략) 앞만 보고 걸어갈게 때론 혼자서 뛰어라도 갈게

내게 멈추던 조그만 슬픔도 날 따라오지 않게

  “눈물 나게 아픈 날엔 크게 한 번만 소리를 질러봐 내게 오려던 연약한 슬픔이 또 달아날 수 있게라는 구절에서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네요. 얼마나 혼자가 힘들면 이런 말을 할까요? 물론 이 노래의 주인공이 무인도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아닌 이상. 아니 히키코모리라도 완전히 혼자인 경우는 드물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어 이것을 이겨내야 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다잡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이죠.

  오늘의 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6학년을 진급하였는데 새로 배정된 반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답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죠. 반을 배정할 때 기존의 반 아이들이 몇 명은 함께 가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요? 아마 진짜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친한 사람이 없는 것이겠지요. 아니면 미국은 반배정 원칙이 우리와 다르거나. 오늘의 필자는 짐작컨대 여학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학생들이라면 모르는 아이들만 있어도 재빠르게 친구를 만들어낼 것이니까요. 6학년 정도의 여자아이들은 이미 자신들끼리 무리를 만들어 그것에 집중하니까 새로운 친구를 만들기는 어려울 겁니다. 아는 사람이 없어 힘들다고 하지만 친한 사람이 아니라면 있어도 큰 의미가 없는 것이죠.

  그런 필자에게 엄마는 하나님의 존재를 일깨워줬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필자는 마음을 열고 학교에 가게 되었고 친구가 두 명이나 생겼는데 그들은 장성한 지금까지 절친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친구가 어른이 되어도 남아 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어렵지만(인간관계의 폐쇄성) 학교에 가기 싫어 도망을 온 사람에겐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는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줘야 할 것입니다.

  필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녀가 고독한 상태에 있었기에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계획에 집중했다는 주장은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론 우리를 사방으로부터 고립하도록 하여 그 분과 더 가까워지도록 하십니다. 다윗은 왜 적이 이토록 많은가요? 사방에서 저를 공격합니다라는 식의 고백을 하는데 그로 인해 그는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고백하였지만 그것은 고립을 통해 더욱 확고해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의 많은 시 역시 사울에게 쫓기어 고립된 상황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인간적으로 보면 문제가 있다고 할지 모르나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점에서는 장점이 될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왕따와 괴롭힘에 시달렸기에 자라면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외로움을 이겨내야 하는 힘든 과정을 거쳐서 습관화된 것이었습니다. 좀 과장되게 말해 세상이 나를 왕따 시키니 나도 세상을 왕따 시킨다고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난 왕따 당한 게 아니야. 내가 세상을 외면한 거니 세상이 내게 왕따를 당한 거지. 두고 봐 니들이 내게 매달릴 날이 올 거야’ 이렇게 이를 악물었다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저를 왕따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여전히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나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만들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귀중한 시간을 위한 것이지 따돌림으로 인한 결과는 아니게 되었습니다. 역으로 말해 남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의존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니 긍정적인 평가를 해도 좋을 듯합니다. 혹시 이것이 자기 합리화일까요?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가르침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을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스  라엘 민족은 북방의 앗수르나 바벨론의 위협에 대하여 애굽을 의지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설령 나라를 지켰어도 각종 굴욕을 감내해야 했고 궁극적으로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애굽은 썩은 지팡이라는 성경 말씀은 애굽이 약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의지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말해줍니다.

  삼국시대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박쥐처럼 오가며 자신을 지키려고 했지만 그것은 신라를 허약한 나라로 만들어 뿐 아니라 각종 굴욕을 감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택한 것은 하지만 자립이 아니라 당나라에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데 성공했으나 결국 내부의 적에게 대항할 힘을 잃고 천년 역사의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싸움 한 번 못하고. 이것이 우리 민족을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어 오늘까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지킬 의지도 능력도 없게 만들었습니다. 과거에는 중국 오늘날에는 미국에 안보를 맡기고 의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굴욕을 감내하고 얻는 노예적인 혜택일 뿐입니다. 일본이 세계 최강 미국과 끝까지 싸워 그들을 존경을 받는 것가 너무나 대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애굽만이 아니라 인간은 썩은 막대기가 될 수 있는 연약하고 사악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겪는 고통의 대부분이 인간 때문이라는 점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기에는 용기가 없고 너무나 위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이라는 든든한 막대기에 의존해야 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니라라는 다윗의 고백은 그의 고난과 고립에서 비롯된 고백이겠지요. 그가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이라고 해서 정말 혼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천대받던 자들이 그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진정 의존해야 한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오늘의 필자가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의지하게 되었을 때 두 명의 친구가 생긴 것처럼 다윗은 마침내 이스라엘의 통일 군주로 등극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는 든든한 막대기에 의존함으로써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