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에너지가 필요해 ‘충전완료’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편 62장 5절)
1907년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이 나라 이 민족을 영적으로 각성시켰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부흥이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복음의 씨앗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땅에 발을 채들이기도 저에 순교한 그가 어떻게 이런 역할을 했을까요? 그가 뿌린 성경 때문입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이 가지고 온 한문 번역판 성경 수십 권을 뿌렸고 그것이 여러 사람들에게 전해져 그들의 회심을 가져왔고 그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가 만들어지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훗날 선교사들이 들어왔을 때 교회가 이미 만들어진 것에 놀랐는데 나아가 그들이 협력하여 한국어 성경이 번역되는 기적이 연출되었습니다. 이는 세계선교사에서 초유의 일이라고 합니다. 선교사가 들어가기 전에 교회가 생기고 게다가 그들이 자국어 번역 성경제작에 협조한 것은 전무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에 대하여 우리는 그저 불운한 복음전파자라고 기억하기 쉬운데 그는 1907년 대부흥의 밑밥을 깔아놓고 죽어간 위대한 선교사였던 것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이토록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1907년의 대부흥을 가져온 또 하나의 축은 바로 새벽기도였습니다. 새벽기도의 불길을 일으킨 길선주 목사 자신도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씨앗에서 믿음을 갖게 된 분입니다. 그를 전도한 친구는 토마스 선교사가 배포한 성경을 읽고 믿을 가지게 된 김종섭이라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시 기독교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법칙에 의해 전파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었든지 복음을 전하라는 가르침에 따라야 하는 것은 그렇게 뿌려진 씨앗이 언젠가 열매를 맺기 때문인 것입니다.
길선주 목사에 의해 시작된 새벽기도는 1907년의 대부흥은 물론 오늘날까지 한국교회의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전세계에서 새벽에 교회를 열고 모여서 그것도 일년 내내 기도를 하는 나라가 우리말고 또 있을까요? 어떤 목회자들은 새벽기도가 농경민족의 유산이니 하면서 새벽기도가 현대 도시인들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지만(사실은 자신들이 새벽기도를 인도하는 것이 부담스러워하는 말이지요) 예수님 자신이 새벽 또는 미명에 기도하신 기록이 있으니 새벽기도는 지극히 성경적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처럼 하루의 첫 시간을 주님과의 교제로 시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저 자신도 새벽기도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키워왔습니다. 새벽기도를 하기 전에는 ‘아니 무슨 새벽 5시에 교회를 가! 차라리 잠을 더 자거나 책이라도 읽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으로 새벽기도를 폄하 하곤 했지요. 실제로 아침형 인간인 저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공부를 할 때가 많았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전날의 피로가 가신 그 시간에 집중력이 높아질 때의 공부는 그 효과가 유달랐습니다. ‘영어실력기초’의 저자 안현필 선생은 새벽 2시(미명이네요 아니면 심야?)에 일어나셔서 공부와 집필로 많은 저서를 내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책을 보면서 새벽의 중요성을 깨달았지만 그것이 새벽기도로 이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새벽은 밤과 달리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밤은 갖가지 모임이나 교제가 이루어지는 시간이 되기 쉽습니다. 결코 신앙적인 시간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실한 기독인이라면 밤에 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 그러한 죄악의 근원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하게 된다면 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새벽에 눈을 떠야 하니 당연히 잠을 일찍 청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새벽의 적막은 밤의 적막과는 다릅니다. 심야에 흐르는 고용함은 우리를 감성적으로 만들기 쉽습니다. 실제로 밤에 쓴 글들을 보면 그런 성향이 농후합니다. 하지만 새벽의 적막은 보다 정결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속된 말로 ‘속세의 때’가 농후한 밤의 글과는 달리 잠을 통해 안식을 취한 후 차분해진 마음으로 쓴 글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의 필자는 영적인 충전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배터리가 다 되어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는 휴대용 CD플레이처럼 우리는 계속적인 활동을 통해 방전되어 버릴 수 있음을 경고하면서 기도와 예배 등을 통한 영혼의 재충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조차 새벽에 기도하심으로 영적 재충전을 하셨는데 우리 같은 인간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새벽은 매우 유용한 시간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술집이 문을 일찍 닫게 되자 편법을 쓰는 업소들이 생겼습니다. 새벽 5시인가부터 문을 여는 것입니다. 아마 그 시간이면 하루가 끝났고 새로운 날이 밝았으니 영업시간도 해금되는 모양입니다. 누가 새벽 5시에 술을 마시러 가겠느냐 하겠지만 그게 제법 먹힌 모양입니다. 맙소사! 새벽 5시의 음주라. 그들도 새벽을 깨우긴 했는데 음주로 채웠으니 차라리 잠이나 자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에게 새벽은 주님을 만나 교제하면서 영적 재충전을 하는 귀중한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새벽기도를 검색한 결과 놀라운 인물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익산 삼일교회 이태주 장로님입니다. 그는 27년간 일만번에 걸쳐 새벽제단을 쌓으면서 헌금을 해 교회로부터 기념패를 받게 되어 화제입니다. 서울에 공방을 하는 심현규 작가가 철로받침목에 1만개의 못을 박아 만든 이 기념패는 장로님의 믿음이 새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못의 개수를 세는데만 5시간이 걸렸다니 참으로 대단한 작품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보다는 장로님이 쌓은 새벽제단이 훨씬 위대할 것입니다. 가난으로 학교를 중학교에서 멈춰야 했던 그에게 교회는 소중한 배움터였고 그러기에 믿음으로 쌓은 새벽제단은 더욱더 빛나는 업적이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교제로 얻은 영적재충전이 가져온 열매가 얼마나 풍성할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쓰고 있는 글도 새벽이 가져온 선물입니다. 매일 새벽 다락방을 펼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시작하면서 주님이 주신 말씀을 붙잡고 묵상을 한 뒤에 자판을 두드리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과거에는 펜으로 직접 적으면서 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자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형제자매들과 함께 저의 묵상의 열매를 나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변화였습니다. 수북히 쌓인 묵상노트들도 언젠가 함께 나눌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입니다. 새벽에 소박하게 작성하던 짧은 메모가 이토록 쌓여 있다는 것을 보면 제 자신의 영적인 여정을 한눈에 보는 것 같아 흐믓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라는 유명한 책이 있지요. 빌 하이벨스라는 목사님이 쓴 이 베스트셀러를 저는 최근에야 읽었습니다. ‘너무 바쁘지만 기도합니다’가 아니라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것이 눈길을 끌지요. 바쁘니까 영적으로 지치고 그러니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에 크게 공감합니다. 저 역시 매우 바쁜 삶 속에서 기도의 필요를 더욱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너무 바빠서 기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살고 계시는 것은 아닐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쁘셔도 세끼 식사는 챙겨 드시고 계시겠지요. 그렇다면 영의 양식도 챙겨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이 지치는 것은 육체의 피로 대문이 아니라 마음의 피로 때문임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습니다. ‘무릇 지킬 것 중에 으뜸은 마음이나니 이는 생명의 근원이라’는 잠언 말씀을 아실겁니다. 자살하는 사람의 대부분(사실상 전부)은 병이나 가난같은 물질적이고 외적인 것이 아니라 고립에서 오는 마음의 공허함으로 그런 선택을 한다고 합니다. 결국 영적인 문제라하겠습니다. 지금 삶이 고달프다면 배터리가 다 되어 이상한 소리를 낸 휴대용 CD플레이어처럼 여러분의 영적 배터리가 비어 있기 때문이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몇 년 전에 ‘행복전도사’라고 불리던 분이 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하신 말씀이 ‘마치 배터리가 방전된 것같이 자신도 방전이 되어 힘들었다’이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힘들면 활동을 좀 줄이고 재충전을 하시지 왜 그렇게 자신을 혹사시켜 화를 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명성을 이어가서 더 많은 강연을 하여 얻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돈일까요? 아니면 자기 만족일까요? 돌아가신 분이 답을 하실 수는 없으니 우리가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바쁘니까 영적재충전이 더 필요하다는 교훈이 아닐까요? 저와 여러분이 그런 교훈을 새기고 영적 재충전의 시간을 통해 주님과의 교제를 이어가실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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