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치유가 인간을 구원한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과거에 대한 생각은 바꿀 수 있다” 누군가 말했을 법한 명언입니다. 어느 날 저는 이 말을 떠올리고 감동을 했습니다. 너무나 가슴에 와닿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일로 현재와 미래의 삶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과거가 화려할수록 그 정도는 더욱 심할 것입니다. 아니면 현재의 어려움을 모두 과거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경우도 과거에 사로잡히기 쉬울 것입니다.
‘네 멋대로 해라’ 라는 드라마에서 배우 윤여정이 연기한 캐릭터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아카데미상 수상으로 일약 세계적인 배우라는 송을 받고 있지만 그저 그런 배우로서 살던 시절이었던 윤여정 하지만 그녀의 연기는 그곳에서도 빛나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현재를 불행하게 살고 있는 불행한 캐릭터를 너무나도 실감 나게 표현했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전남편으로 등장하는 신구를 향해 “전 그래도 당신은 사랑했어요”라고 절규하며 그를 때리는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그렇게 사랑했는데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듯한 모습에서 과거의 상처가 그녀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알 수 있었기에 제 가슴도 아파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봐야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인데 왜 저토록 집착하는가 하는 생각과 어쩌면 나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현재와 미래를 희생시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의미 없는 염려로 고통받고 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고 있는 염려의 92%는 염려가 상황을 바꿀 수 없는 경우라고 합니다. 심지어 우주인이 쳐들어와서 우리를 해치면 어떻하지 라는 황당한 염려도 제법 있다고 합니다. 이거 실화인가요?
결국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사고방식이 삶의 행불행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네 멋대로 해라’에 등장하는 또 다른 캐릭터인 전경(이나영분)은 윤여정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을 보입니다. 그녀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오로지 현재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소매치기 전과자이지만 마음이 따듯한 고복수(양동근 분)의 과거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미래도 염려하지 않고 오로지 그와의 사랑이라는 현재에 충실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녀가 안고 있는 현실이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지만 마냥 행복해하는 전경이라는 캐릭터에서 저는 행복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 4장 6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마태복음 6장25절) 우리는 이런 성경구절을 달달 외다시피 알고 있지만 실제로 이것을 믿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실제로 어려움을 닥치면 염려로 가득 차게 되는 일이 크리스천에게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믿음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모래 위에 세워진 것임을 여지없이 드러내곤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마태복음11장28절)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알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짐을 주님께 맡기지 못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님 그냥 제가 짐을 지고 갈게요”라며 주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 이유는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전적인 의지란 있을 수 없고 절대 순종도 있을 수 없겠지요. “어린아이 같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라고” 하신 말씀은 이래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주님의 말씀을 무시한 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명에를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장29-30절) 우리는 앞의 구절에는 주목하면서 이어지는 말씀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우리 짐과 멍에를 대신 짊어지니 예수만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편안하게 살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막상 예수를 믿어도 고난은 계속되고 삶의 무게는 여전히 우리를 억누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절규하죠. “하나님! 왜요?”라고. 오늘의 필자처럼.
하지만 그 해답은 바로 뒤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멍에와 짐을 다 들어준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라고” 하셨죠. 멍에와 짐은 여전하나 “쉽고 가볍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훨씬 약해질 뿐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그렇게 될까요? 그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주고 또 우리의 기도와 간구가 우리의 짐을 덜어주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기도와 간구로 문제를 해결 받은 경우는 물론이지만 우리의 생각이 바뀜으로써 쓸데없는 염려를 내려놓게 되니 문제로 인한 고통이 훨씬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고통에 대한 생각이 바뀌니 고통 자체도 줄어든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진리가 자유롭게 한다”(요한복음 8장32절)의 말씀처럼 진리를 깨달으니 쓸데없는 염려와 좌절감이 사라진다는 것도 예수를 믿는 자들의 특권이겠지요. 이래저래 짐은 가벼워지고 멍에는 쉬워 지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삶에 보다 가까워질 것입니다.
오늘의 필자는 그런 하나님의 깊은 의중을 깨달았는지 육신의 치유가 아닌 마음의 치유를 간구하여 평안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필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고 또 그래야 합니다. 초신자라면 모를까 하나님께서 우리 문제를 다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염려와 걱정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가짐으로써 –그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을 통해 얻어집니다- 짐과 멍에를 가볍고 쉬운 것으로 만드는 것에 의해 ‘수고하고 짐진’삶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의 현실버전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믿고 거듭났다고 하면서 아직도 염려와 근심으로 살아가십니까? 그렇다면 말씀과 기도 찬양 등을 통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십시오. 기도와 말씀으로 우리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찬양으로 우리는 삶의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성이 높아져 세상 사람처럼 살지 않게 되는 단계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무거운 짐과 멍에를 내려놓고 살아가는 자유인이 되지 않겠습니까?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의 짐! 벗으십시오. 여러분의 멍에! 그리고 예수님의 짐을 지시고 예수님의 멍에를 새롭게 쓰십시오. 저와 여러분이 진리 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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