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야말로 과학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마태복음 8장 8졀)
일본의 작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라고. 제한받는다는 것은 그것이 가진 힘이 약하기 때문이겠지요. 계속적으로 자극을 받아야 유지되는 사랑이라면 진실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노르웨이의 작곡가 그리고의 ‘‘페리 퀸트 조곡’에 등장하느 페리 퀸트와 그의 영원한 연인 솔베이지의 사랑이 수십 년간의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 유지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사랑은 오늘날처럼 인스턴트 사랑이 대세인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핸드폰 문자메시지에 즉시 답하지 않는 것이 이별의 이유가 되는 시대 아닙니까? 끊임없이 자극을 제공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식어버리는 사랑에 익숙한 사람들이 수십 년을 만나지도 못한 채 사랑을 유지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아니라 종교에 대하여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면 믿지 않으려는 자극의 시대에 종교란 황당하고 해괴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에도 모든 것을 이성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시대에 종교란 박물관에나 보내야 할 시대착오적인 유물이라고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알량한 지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것이 아닐까요? 소크라테스가 위대한 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갔기 때문인데 오늘날 우리는 왜 그렇게 교만한지 모르겠습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 한 마디로 바라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말이 아 니겠습니까? 하지만 즉각적인 반응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이런 믿음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믿음을 논하는 것이 황당하게만 느껴지는 시대에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모험이 되어 버린 느낌이 듭니다.
사람들이 믿음을 거부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믿음이 실재한다면 그들에게는 그것이 불편한 진실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멋대로 살기를 원하는데 믿음이 실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곧 자신들의 자유를 어느 정도 구속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실재하고 최후의 심판이 사실이라면 지금 자신들이 누리는 즐거움이 죄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직감적으로 알기에 현실을 부정해가면서까지도 믿음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지요.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암으로 죽어가던 사람들이 안수기도로 기적적으로 치유 되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납니다. 십일조의 축복은 픽션이 아니라 팩트입니다. 이토록 많은 ‘합리적’인 증거가 제시되건만 믿으려고 하지 않은 ‘불합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합리주의’니 ‘과학적’이니 하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이야말로 ‘비과학적 사고’의 극치가 아닌가요?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믿음이라는 것의 본질일지 모르겠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 마음의 문을 열어야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과학적 증거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무릎이 아파 고생하시는 어머니에게 치유의 은사를 가진 분에게 안수기도를 받으시라고 하였지만 돌아온 답은 ‘노’였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의 영상을 보여주었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닫혀 있는데 ‘과학적’ 진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라고 자신의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어떠한 ‘과학적 진실’도 무용지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필자가 언급한 백부장의 믿음은 놀랍기만 합니다. 로마인인 그는 유대인처럼 믿음을 입에 달고 사는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고 그러한 교육도 받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갖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아마도 그에겐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메시아는 인류의 구세주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해방자이어야 하는데 예수가 말하는 구세주는 인류의 구세주이니 마음에 들 리가 없겠지요. 그러니 부인하고 싶은 겁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념에 사로잡혀 예수를 부인하는 것과 같은 극히 ‘불합리’하고 ‘비과학적’인 태도처럼. 하지만 백부장은 합리주의적 사고 덕에 그러한 선입견이나 편견을 배제하고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예수의 기적과 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백 부장과 같이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듣고자 하는 열린 마음을 갖도록 하라는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야말로 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의 ‘비과학’적 선입견에 사로잡혀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음에 대한 ‘비과학적’편견이나 선입견에서 완전히 벗어나 ‘과학적’인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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