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은 신앙의 수단이다. - 신앙의 성숙을 바라며
우리는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가슴을 졸일 때가 있습니다. 드라마에는 즐거움 기쁨만이 필수요소가 아닙니다. 반드시 시련과 위기 안타까움이 동반되어야 드라마라 할 수 있죠. 사랑하는 남녀가 아무런 위기나 고난 없이 사랑을 이룬다면 그것이 드라마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평범한 사랑이라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맺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드라마라면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슴 졸이다가 해피엔딩으로 매듭 어질 때 우리는 박수를 치거나 눈물을 흘리며 큰 기쁨을 느낍니다.. 심지어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거나 감동을 음미하며 한동안 퇴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요.
예전에 기숙학원에서 생활교사로 일할 때 어느 청년으로부터 “저는 진짜 사랑을 한 적이 없습니다”라는 충격적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는 누가 봐도 멋진 외모와 화려한 언변의 소유자였기에 여성들에게 제법 인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을까요? “우리는 육체적 욕망을 채우느라 사랑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현대 젊은이들의 고민이라고 해야 할까요? 만나서 얼마 되지 않아 육체적인 결합을 하는 개방적 시대의 산물일까요? 그것이 진저한 마음의 사랑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행복을 가져오기보다는 잠시의 쾌락과 함께 마음의 공허함만을 남긴 것입니다.
“교수님! 저 욕심 냈습니다. 남자친구 생겼습니다” 어느 날 새벽 제자에게 날아온 문자입니다. (카톡이 없던 시절) 배경을 모르시는 분이 읽으시면 무슨 암호 같겠죠? 그녀는 대학생 제자였습니다. 그녀가 마음에 두고 있던 선배가 군 생활 중에 자신에게 고백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받아들여 둘은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욕심 냈습니다’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을 쓴 것일까요?
사실은 제가 그녀에게 한 말 때문에 그런 표현을 쓴 것입니다. 그 선배가 자신에게 고백을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기에 제가 ““군대생활할 때 남자들은 배가 너무 고파 (사랑의 배) 아무에게나 고백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한 고백이 아니라 다급함에 의한 것일지 모르나 일단 거절해라. 그래도 계속 대시를 해 오면 그때는 생각해 보라”라고 조언을 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제 조언을 듣지 않고 곧바로 그의 고백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둘이 그래서 잘 지내고 사랑이 결실을 맺었거나 최소한 일정 기간이라도 행복한 사랑을 나눴다면 좋았겠지요. 하지만 결과는 비극에 가까웠습니다. 제대를 하자 둘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결국 그녀의 선배는 “잠시 쉴 곳”을 찾았던 것이고 휴식이 끝나자 그곳을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제가 판단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에겐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구나 ..” 저는 그렇게 염려를 표했습니다. 남자니까 남자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기에 한 말이었는데... 아쉬웠습니다....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잘 되기를 빌었는데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참다운 사랑이란 그렇게 쉽게 오지도 만들어지지도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한 땀 한 땀 인내와 눈물 그리고 기도로 이룬 사랑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사랑 그 자체를 떠나 인간을 성장시켜 보다 성숙한 단계로 끌어올려주는 힘을 가집니다. 비단 사랑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도 마찬가지이겠지요. 뭔가 꿈이나 목표를 위해 오랜 세월을 인내하고 절제하며 나아간 경험이 있다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높은 단계의 성숙을 통해 자신이 놀랄 만큼 성장한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로또와 같은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은 오래오래 행복했을까요? 답은 그렇다도 되고 아니다도 됩니다. 문제는 그가 그 행운을 감당할 정도의 성실함과 성숙함을 가지고 있느냐입니다. 실제로 평소에 성실하게 살면서 성숙한 삶을 살던 사람들은 당첨이 그의 삶에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어린 나이에 또는 평소에 성실하지 못한 삶을 살던 사람의 경우 대부분 그것이 재앙이 되어 버렸답니다. 어떤 사람은 200억의 당첨금을 받았으나 2년 후에 사기사건의 피의자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당첨금을 모두 날리고 당첨증을 미끼로 투자를 유도해 사기를 치려고 했다고 합니다. 200억이면 은행에 예금만 해도 연간 1억이상의 이자가 나올 텐데 왜 그는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그것은 평소의 삶이 가져온 결과가 아닐까요?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제법 큰돈을 손에 쥔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에겐 독이 되었습니다. 흥청망청 쓴 것은 물론 한 번 잘못된 소비습관이 몸에 배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빚까지 끌어 쓰고 말아 결국 나중엔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빚도 남았고요. 그것은 제 인생에서 엄청난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오랜 세월 고통을 감내하게 되었고 그것이 저의 신앙을 성숙시키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무조건 축복을 달라던 마음이 이제는 주님의 뜻에 맡기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바뀐 것입니다. 아마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미숙한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물질의 축복을 잠시 주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진정 바라시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축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사는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야 합니까? 그것인 이방인 세상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지 “잘 먹고 잘 살거라”는 가르침을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하게 했지 “넘치도록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어떤 과제나 목표를 위해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보다 높은 수준의 신앙을 갖게 되는 ‘성숙’이 아니겠습니까?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을 위해서는 정욕을 이겨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은 탐욕을 이겨내고 그것을 삶의 일부로 만드는 것에 성숙합니다. “주님과 동행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으로 인한 고통의 잔도 함께 마셔야 합니다. 동행인이라면 상대와의 동행에서 생기는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힘들다고 바로 떠나버리면 동행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오늘의 필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고난에서 건져 주신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건져 주시는 순간까지 우리는 견뎌야 할 것입니다. 포기하면 구원은 없겠지요. 이겨낼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고난이 결코 그저 견뎌야 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로 인해 자신이 성숙해져 보다 차원 높은 신앙인이 될 수 있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진짜 바라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요? 한 마디로 ‘개고생’이 아니라 ‘값어치 있는 영광의 고난’임을 안다면 고난을 달게 받을 각오가 생기겠지요?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성숙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축복을 누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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