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구원이 어디서 오나? 사울과 다윗의 갈림길
목 차
1. 무당은 여성 목회자는 남성이 많은 이유 - 하나님과 귀신의 차이
2. 절대적 순종이 필요한 이유 – 인간에겐 은혜가 필요하다.
3. 주님과 동행하는 삶= 절대 순종의 삶-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1. 무당은 여성 목회자는 남성이 많은 이유 - 하나님과 귀신의 차이
무당의 대부분은 여성입니다. 아마 다 아실 겁니다. 그런데 목사나 신부는 대부분 남성이거나 전부 남성입니다. 신부는 제도적으로 여성에게 될 수 없는 직분이고 (대신 수녀라는 직분이 있지만) 목사의 경우는 최근 들어 많이 개방되었지만 그래도 남성이 다수입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하여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저 우연일까요? 참고로 유대교의 랍비나 이슬람의 지도자들도 전부 남성이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왜 나타날까요? 물론 제가 정답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측이라고 해도 객관적 팩트를 전혀 모르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듣고 보고 배운 사실에 바탕을 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여성과 남성이 갖는 타고난 특징과 사회적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은 많이 변하고 있지만 여성은 사회활동이 금지되거나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순종 성이 비교적 남성보다 강합니다. 왜냐하면 약자가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해야 하니까요. 어린아이가 과거에는 어른들의 말을 잘 들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야 뭐라도 얻어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당이 대부분 여성인 것은 그들을 지배하는 귀신이 순종적인 특징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제 의견으로는 귀신과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존재입니다. 인간을 통해 영광을 받고 그 대가로 은혜를 베풀어준다는 점에서. 다른 점은 그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시고 그러기 위해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시지만 귀신은 오롯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귀신이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 들에게 인간사회의 발전과 행복 따위에 대한 관심은 애당초 없으니까요.
그럼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아니면 전부가 남성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무당은 사회의 주류가 아니지만 이들 지도자들은 주류입니다. 하나님은 무당처럼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주류의 지도자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주류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공의를 실천해야 하는데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무당을 부리는 귀신은 도리어 사악한 이익을 추구하니까 주류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그동안 우리 사회가 남성중심적이었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여성 목회자가 늘어나는 것은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겠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변화를 굳이 거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추구하는 목적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브라함이나 다윗왕은 아내를 여럿 두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유로 그들을 처벌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그것을 금하십니다. 이유는 인간 사회의 변화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 규칙을 무조건 강요하는 고집불통의 신이 아님을 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일부일처제가 맞냐 일부다처제가 맞냐 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유동적이라는 것입니다. 여성 목회자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유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무당도 원해서 되는 경우가 거의 없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원해서 믿는 경우는 없습니다. 겉으로는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된 것처럼 보이는 경우라도 실제로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택하시어 부르시는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는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라”라는 찬양은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언급한 대로 그 목적은 천양지차입니다. 귀신은 무당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극대화하는 것이기에 공의에 관심이 없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사회가 올바르게 돌아가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며 그것을 기쁘게 여기십니다. 그의 영광은 그러한 공의의 실현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도다”라고 하는 시편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천명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무당이 주류가 될 수 없고 목회자가 주류가 될 수 있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치 마피아가 주류가 될 수 없고 경찰은 주류가 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2. 절대적 순종이 필요한 이유 – 인간에겐 은혜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귀신도 하나님도 순종을 거부하는 무당이나 목회자를 징벌합니다. 귀신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은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이유지만 목적이 다른 거죠. 귀신은 애당초부터 공의에 관심이 없으니 그것을 추구할 이유가 없고 하나님은 반대로 궁극적으로 공의를 추구하시는 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선악과를 금하고 홍수를 내려 세상을 쓸어버리고(당신께서 만든 작품을 부수면서까지 공의를 추구하셨지요)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를 통해 인간 사회를 바르게 세우시려는 분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택함 받은 백성으로 그분에게 순종해야 할 절대적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마음대로 살아가는 인간이 죄에 빠지는 것은 공식입니다. ‘법 없이 살 사람’이라는 말은 허구입니다. 법이 있으니 그가 선하게 살지 법이 없다면 과연 그렇게 살까요? “있을 때 잘해!! 나는 봉이야”라는 농담이 있지요. 있을 때는 고마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뉴욕에서 잠시 정전이 일어났을 때 무법천지가 된 사실을 아시지요? 우리의 자체적 제어능력은 고작 그 정도입니다. 저라도 만일 하나님이 안 계시고 법이 저를 제어하지 않는다는 것이 100%100% 확실하다면 어떤 삶을 살지 장담 못 합니다. 아니 누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바로 ‘법 없이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우리는 성화되어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만.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과 이제는 죄짓지 않게 해 달라고..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그것은 불가능한 미션이니까요.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신 겁니다. 순종이 없이 우리는 결코 성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다윗 비슷하면서 다른 삶을 산 두 사람의 차이는 단 하나 하나님께 순종하였느냐 아니냐입니다. 다윗도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밧세바와 간통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살해한 것입니다. 사실 죄의 질로 치면 (인간적으로)사울의 죄보다 클지 모릅니다. 사울은 영적인 죄를 지었지만 그런 명백한 범죄를 지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물론 그가 계속 죄에 빠져가면 많은 죄를 짓게 되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제사를 멋대로 지내고 하나님의 지시를 자기 편할 데로 바꾼 그의 죄는 다윗의 모든 죄보다 무겁습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선악과의 죄처럼 인간이 자신을 지은 하나님을 떠나 멋대로 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요.. 네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영원히 사랑함이라”.. 다윗도”.. 사울도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이지 완벽하여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을 수없이 배신했고 다윗을 죄를 질지라도 하나님을 저 버러지 않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신이 되라 하시지 않으시고 또 그렇게 기대하시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지요. 육신의 몸을 가진 인간의 한계라고 할까요? 그렇기에 ‘내 안에 머물러라! 그래야 네가 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지 않겠니?’라고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만들어진 천사조차 자신의 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순간 사탄이 되었음을 잊지 맙시다.
오늘의 필자도 하나님의 존재를 잊고 자신의 목표에만 매달렸던 것을 회개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고등학생이 사업을 운영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성공이죠?)은 결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그는 잊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빠질 수 있는 함정입니다. 사울이 그렇듯이. 하나님은 그를 아픔을 주어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매를 드는 부모의 심정으로. 필자는 그것을 깨닫고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기본자세 신앙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3. 주님과 동행하는 삶= 절대 순종의 삶-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저는 다윗의 삶을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것은 그가 거인 골리앗을 때려 눕혀서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계기가 되지만.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도 아닙니다. 그보다 그가 보여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저를 감동시킵니다.. 그가 골리앗을 때려눕히기 전에 한 신앙고백은 저로 하여금 눈물을 쏟아내게 하였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그것이 그 신앙고백의 핵심입니다. “난 이러니까 널 이길 수 있어”라는 자기 과시는 정말 1도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시고 역사하심을 똑똑히 보아라! 바로 이것입니다.
사울을 여러 번 죽일 수 있었음에도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를 내가 죽일 수 없다.”며 하나님께 주권을 맡긴 그의 순종 또한 놀라움과 감동을 안겨줍니다. 심지어 사울과 그의 아들 무 비보 세을 죽인 공신(?)을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를 죽인 죄”로 사형시키기 조차 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잘 하였도다”며 온갖 상급을 주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는 믿음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이런 그의 중심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합당한 자” “영원히 그의 왕국을 유지시키겠다” 고 하셨고 실제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그의 가게에서 나옴으로써 실현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놀랄 뿐입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립니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권력을 비호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반쪽만 본 것입니다. 여기서 권세란 특정 권력이나 정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유지하는 질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울 왕을 비롯하여 불의한 권력자들을 치셨습니다. 공의롭지 못한 권력은 내쳐져도 좋다는 의미이지요. 맹자가 말한 ‘역성혁명’도 비슷한 의미를 갖습니다.
문제는 권세이지 권력자가 아닙니다. 권력자가 바뀌어도 세상을 다스릴 질서로서의 권세는 절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질서가 무너진 세상에서 여러분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절대 불가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군가에게 약탈과 살인 강간 등의 피해를 입을지 모르는 무서운 환경에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나요? 그래서? 질서는 절대적인 것이고 바울은 그것에 순종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귀신의 차이를 다시 한번 상기해 봅시다. 귀신은 자신의 이익 영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렇게 지시합니다. 마피아와 같은 존재이지요. 마피아가 법을 지킨다면 그 역시 자신들의 이익 때문이지 공의 때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세우셔서 인간사회가 질서 있게 유지됨으로써 모두가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지시나 명령에 사된 것이 있었나요? 절대 없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우리는 오늘 살아 있지도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만을 따르는 자들만 남기고 다 죽여 없애셨을 겁니다. (적어도 저라면 그렇게 할 것 같습니다. 으흠..뭐라고요? 자신의 생각을 남의 생각과 동일시 말라고요?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요? 제가 보기에는 선인이나 악인이나 도킨 개킨 같은데요..)
‘주여 우린 연약합니다’
“주여 우린 연약합니다/우린 오늘을 힘겨워합니다/주 뜻 이루며 살기엔 부족합니다/우린 연약합니다/주여 우린 넘어집니다/오늘 하루 또 실수합니다/주의 긍훌을 구하는 죄인입니다
우린 주만 바라봅니다/한없는 주님의 은혜/온 세상 위에 넘칩니다/가릴 수 없는 주 영광/온 땅위에 충만합니다/주님만이 길이오니/우린 그 길 따라갑니다/그날에 우릴 이루실
주는 완전합니다”
자만하지 마십시오. 자랑하지 마십시오. 주님 없이 우린 바르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울이 되지 마시고 다윗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죄를 짓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다만 그곳에 머물지 말고 나오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렇게 노력하시는 모습을 주님은 어여삐 여기십니다.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 여러분을 이끄십니다. 더 나은 모습으로 바뀌도록 말입니다.
저는 과거에 술을 너무 좋아했고 그래서 술 없는 삶은 생각도 못 했지만 주님께서 끊게 해 주셨습니다. 그 외에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주님께서 하나하나 멀리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은혜를 사모하여 몸부림치는 저의 모습을 어여삐 여기신 주님이 주신 은혜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울이 회개하고 몸부림치며 노력했다면 그는 버림받지 않았겠지요. 완벽함이 아니라 그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시면 됩니다. 오늘 쓰러져도 내일 일어나시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일곱에 칠십 번이라도 용서해주시는 분이시니까요.
(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잘 기록되어 있으니 이해하기 어려우시면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가 왜 진리인지를 너무나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C.S. 루이스가 왜 기독교 변증가로 명성을 떨쳤은 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책입니다.)
간음한 여성에게 하신 말씀은 그것을 상징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그러니 가서 다시는 죄짓지 마라”. 죄는 묻지 않지만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써라 이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힘으로 불가능한 미션입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도우시면 됩니다. 제가 술을 끊고 다른 죄에서 떠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오롯이 하나님께 순종의 길이 되어 그 은혜 가운데 거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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