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출판시장- 규제 완화가 가져온 시장의 실패

닥터 양 2020. 12. 22. 02:36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출판시장- 규제 완화가 가져온 시장의 실패

 

 일본에는 전통을 자랑하는 출판대기업이 많지만 그 중에서 이와나미출판(岩波書店)를 빼놓을 수 없다. 1913년 이와나미 시게오에 의해 직원 4명의 헌책방으로 시작된 이와나미서점은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출판사로 성장하였다. 필자도 유학 시절 이와나미의 각종 서적을 통해 지식의 세계를 넓힐 수 있었고 자신의 논문이 실린 책도 출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을 정도로 이와나미 서점의 존재감은 크다. 지금도 필자의 서재에는 이와나미의 서적들이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중에 일부는 여전히 책상 위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이와나미의 대표 상품인 코지엔(広辞苑)이라는 일본국어사전도도 그 중의 한 권이다.

  이와나미가 자랑하는 것이 잡지 세계와 이와나미 문고 시리즈이다. ‘세계1946년에 창간되어 일본의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영향력을 가진 잡지인데 특히 유신독재시절에 한국에서 온 통신이라는 이름으로 TK’(지명관 교수)의 글을 올린 것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졌다. 이와나미 문고는 연 매출 16천억원 정도를 자랑하는데 이는 우리나라 출판계 전체의 매출 6조원의 1/4에 해당되는 거액이다. 예전에 일본 NTT주가총액이 우리나라 상장기업 주가총액을 능가한 적이 있는데 일개 출판사의 그것도 전체가 아니라 문고만의 매출이 우리나라 전체의 1/4이라니(주가총액은 외환위기로 인하 주가 급락이라는 사정도 작용)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와나미 문고의 목록을 보면 그야말로 흥미롭고 기발한 제목의 책들이 이름을 올려 놓고 있다. 2018년판 이와나미 문고의 빈곤대국 아메리카’(츠즈미 미카)에 실린 목록에는 이길 수 없는 미국’ ‘새우와 일본인2’ ‘동아시아공동체’ ‘르포 보육체계의 붕괴’ ‘전기요금은 왜 오르는가?’ 등의 타이틀이 실려 있다. 국내에는 과거에 존재했던 문고판들이 거의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과 매우 대조적으로 이러한 문고가 이와나미의 간판상품이다. 요즘도 일본에 가면 이와나미 문고의 서적을 몇 권씩 구입해 오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믿고 읽는이와나미!

  이와나미의 가치는 이러한 화려한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상업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학술서적과 같은 책들을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출판해 주어 일본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높게 평가된다. 필자가 구입한 학술서적들은 이와나미 같은 출판사의 사명감없이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서점에서 학술서적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궁금하면 지금이라도 대형서점에 가서 확인해 보라. 학술서적은 아니지만 상업성이 없는 잡지나 서적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서점의 점두에는 말랑말랑하고 자극적인 책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성공서적 힐링서적 단순한 지식위주의 서적 등이 독자의 눈길을 끄는 가운데 좀 더 문제의식을 가진 서적들은 깊숙한 곳 아니면 독자의 눈이 닿기 어려운 서고에 겨우 자리잡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체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힌트를 필자는 얼마 전에 얻을 수 있었다. 과거 출판업에 종사했던 분과의 만남에서 그 때는 출판업이 허가제라 쉽게 할 수가 없었죠..”라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 번개 같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우리 나라에 출판사가 난립해 있다는 사실이다. 허가제가 신고제로 바뀌면서 출판사가 난립했고 그것이 오히려 출판의 생태계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가하게 되었다. 좋은 책이 사라지고 재미있는 책만이 살아남는 이른바 악화가 양화를 구축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건강한 식품 대신 자극적이고 맛있는 식품만 남는 것처럼.

  우리에게 이와나미 같은 출판사가 없는 것은 출판사의 난립과 그로 인한 영세성 때문이라는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릴 수 있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 출판사 숫자는 5만을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중에서 신간서적을 국립도서관에 납본한 출판사는 6%2800여개 사에 불과하며 그 가운데에서 80%가량이 연간 20종 이하의 책을 발간하는 영세업자들이다. 이것은 출판시장의 과포화가 가져온 결과가 아닐까 싶다. 이런 상황에서 이와나미 같은 역사 깊고 규모가 커서 좋은 서적을 출혈을 감수하고서라도 낼 수 있는 출판사가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허가제를 신고제로 바꾼 것이라 할 수 있다. 80년대 필자가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에 서점에는 많은 문고판 서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수준도 제법 높았다. 하지만 지금은 문고판도 수준 높은 서적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글자를 읽을 정도의 지적 능력이 있으면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물론 그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독서 대중화는 국민의 지적 수준을 높인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차라리 대기업이 나서주거나 출판사 간의 흡수합병을 통해 대규모 출판사가 출현한다면 어떨까 싶다. 교보문고는 교보생명이 만든 대형서점이며 출판사이다. 교보문고의 서점은 특히 본점인 광화문 점은 큰 적자를 내고 있는데 만일 그 자리를 대여를 할 경우에 생기는 수익이라는 기회비용까지 감안하면 실질적인 손실은 더욱 커질 것이다. 애초에 서점을 만들겠다는 교보생명 창업자의 의견은 사내에서 큰 반발을 샀지만 이를 밀어부쳐 교보문고가 탄생한 것이다. 전통을 자랑하던 종로서적이 도산한 뒤에도 교보문고는 대형서점으로서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음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슷한 대기업의 참가나 흡수합병이 일어나 이와나미 같은 역할을 해 준다면 우리 나라 출판시장도 활성화 되지 않을까 싶다.

  출판업계의 문제는 곧 규제 완화가 가져올 수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경쟁이 최선의 재화나 서비스의 공급을 가져오기는커녕 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온라인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출판시장 자체가 위축되는 상황까지 겹쳐 우리의 출판시장은 더욱 왜곡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규제완화만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시장지상주의자들에게 이것이 경고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