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섬김은 귀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닥터 양 2022. 8. 9. 11:45

섬김은 귀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44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누가복음 744-46)

 

  사람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상대에게 정성을 다하게 마련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부모의 자식에 대한 태도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희생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가끔 듣죠. 자녀들이 나이가 들어 어머니가 고기를 잘 드시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엄마 고기 안 좋아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왜 고기를 안 좋아해? 니들 먹으라고 일부러 싫어하는 척 했지라고. 좋아하는 것을 아닌 척하면서까지 엄마는 자녀들에게 고기를 먹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도 엄마는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고기를 먹고 잘 커가는 모습이 그녀에게는 자신이 먹는 것 보다 큰 행복이기 때문이죠.

  역으로 말하면 상대가 소중하지 않다면 귀하지 않다면 그 반대의 행동을 하겠지요. 어떤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상대가 미워지면 밥 먹는 모습도 보기 싫다. 먹을 것을 빼앗아 버리고 싶다라고. 저는 물론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지만 이해는 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차이에 대하여 바리새파인 시몬과 죄 많은 여성을 비교하여 설명하십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하여 식사 대접을 하였지만 여러모로 예수님에 대하여 소홀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손님이 들어오면 해 줘야 할 기본적인 것 조차 전혀 해 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발을 씻는 물도 주지 않고 감람유도 부어주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런 것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행해지던 손님맞이의 예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시몬은 예수님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죄많은 여인-아마 마르다와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일 것입니다-은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그녀는 300데나리온이나 하는 옥합을 깨고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고 예수님의 발에 입을 쉴새 없이 맞추어줬습니다. 그녀로서 할 수 있는 최상의 대접을 한 셈입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시몬은 예수님이 그녀가 죄인임을 알 수 있나 시험하고 있었죠.

  그때 예수님은 둘의 차이가 왜 나왔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시몬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41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누가복음 741-42)이렇게 말이죠. 물론 답이야 뻔한 것이니 시몬은 어렵지 않게 대답했습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누가복음 743) 우리로 치면 1억 빚진 사람과 1천만원 빚진 사람이 동시에 빚을 탕감받았을 때 누가 더 탕감해 준 사람을 사랑하겠느냐 인데 상식적으로 봐서 당연히 1억을 탕감받은 사람이 더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그러한 차이가 너와 마리아의 태도의 차이를 결정했다고 하십니다. 자신에게 손님에 대한 기본적인 대접조차 하지 않은 시몬의 무례함에 비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정성을 다한 마리아의 태도를 비교하시며 죄가 많은 것으로 인해 마리아에게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졌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역으로 말하면 시몬의 무례함은 곧 상대적으로 예수님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그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마음은 그의 태도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아닌데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습니다. 이것은 마음으로는 당신을 소중히 여기지만 사정이 여의지 않아서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것은 누가 봐도 거짓말입니다. 물론 정말 최악의 상황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상대에게 마음이 없기에 그렇게 하는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 일화는 다른 버전으로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린 것은 같으나 이에 대하여 가롯 유다가 왜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지 않느냐고 큰 소리로 마리아를 꾸짖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4복음서 중 누가 복음을 제외하면 그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300데나리온이면 노동자의 거의 연봉에 해당되니 그럴 수도 있겠죠.

  과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의 말대로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줘야 더 좋았을까요?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가복음 147)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분명히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매우 유익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최고의 계명이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고 염소와 양의 비유 등에서도 그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삭개오가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쓴다고 하자 구원이 오늘 이 집에 있다고 기뻐하셨고 부자 관원에게는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이것은 동일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이신 예수님 자체보다 계명이 앞설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계명이 있지 계명이 있고 예수님이 계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역으로 말해 예수님을 무시한 계명의 준수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존재는 소중합니다.

  그런 소중한 분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인 옥합을 깨드린 행위는 우선순위를 놓고 볼 때 당연한 선택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소중히 여기기에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목숨조차도! 마리아는 그런 우선순위를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옥합을 깨뜨릴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 말씀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함께 있기에 지금 이 순간에는 예수님을 위해 옥합을 깨뜨리는 것이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겠습니다. 가정에서도 소중한 손님이 오면 평소에 먹지 못한 귀한 음식을 일부러 대접하지 않습니까?

  가롯 유다의 말은 결코 가난한 사람을 소중히 여겨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치를 못 알아보고 있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상대가 세상을 구하실 구세주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적에게 넘길 때 랍비여라고 한 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저 한 명의 선생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그 분을 위해 가장 귀한 옥합을 깨뜨리는 마리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 성도들이 교회 사역을 위해 그토록 헌신하는지. 그럴 때 늘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럴 돈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이나 돕지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얼마나 자신의 것을 내놓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무엇보다 복음전파라는 사업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도 모르고 있으니 그런 말을 하겠지요.

  가난한 사람들은 돕는 것은 중요하지만 세상을 구원하는 사업보다 우선일 수는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고 해서 세상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복음전파 사업은 결국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고 만민을 모든 문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됩니다. 그러기에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임을 믿는 자들은 알기 때문에 성도들이 그것에 힘쓰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시몬과 가롯 유다 마리아 세 사람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 못하는 시몬과 가롯 유다에게 예수님은 최상의 대우를 해 드려야 할 분이 아니었으나 마리아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행동의 차이로 드러난 것입니다. 마음이 곧 행동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행동이 곧 마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215-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을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식을 사랑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부모가 있습니까? 필요에 따라 자녀가 이미 자립해서 부족함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아닙니다. 그렇듯 우리의 믿음은 갖가지 방법으로 반드시 행함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이어지게 마련임을 이 구절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있습니다.

  비슷한 사례는 성경에 수도 없이 나타납니다. 사르밧의 과부는 마지막 남은 기름과 밀가루를 가지고 만든 음식을 먼저 엘리야에게 대접함으로서 끊임없이 기름과 밀가루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열왕기상 1716) 수넴의 여인은 그의 집에 엘리사를 위하여 방을 마련하여 마음대로 사용하게 하였더니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낳게 됩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하니 여인이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엘리사가 여인에게 말한 대로 아들을 낳았더라“(열왕기하 416-17)

  사도 바울에게도 그를 소중히 여기고 헌신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헌신이 구원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로마서 163) ”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사도행전 1614-15)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의 사역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특히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이 택하신 사역자와 그의 가치를 알고 따르는 많은 동역자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결코 마음으로 응원하거나 기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고 그들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조차 아낌없이 드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입으로는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 소중한 것을 드릴 줄 모른 채 외형적으로 헌신의 흉내만 낸 사람들은 큰 기여를 하기는 커녕 때로는 방해가 되기조차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역자들이 하나님에 의해 움직이는 헌신적 동역자들의 헌신에 힘입어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바로 그러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지난 역사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가난하던 시절에도 옥합을 깨뜨리는 마음으로 드린 정성이 기적을 낳은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사역자들을 섬기고 그들을 부족함이 없도록 대접하는 귀한 손길이야말로 우리 한국교회의 자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 가치를 아는 성도들은 사역자들을 위해 소중한 것을 드리고 있습니다. 각종 부흥회나 집회 때 쏟아지는 사역자에 대한 뜨거운 마음 평소에도 손대접을 아끼지 않는 마음 그런 것들이 사역자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들로 하여금 더욱 사역에 헌신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신들이 신세진 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데 교회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겠지요. 그것이 한국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싶고 그렇기에 한국 교회의 사역자들은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제가 살던 일본의 경우 그런 미풍양속을 찾아보기 어려워 사역자들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 교회에서 실시하는 군사훈련 프로그램에 6개월간 다니면서 제대로 된 마음의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교회나 목회자들을 위해 각종 식사 대접 선물 등을 아낌없이 하면서도 정작 아무런 대가도 없이 수고하는 그 교회와 사역자들을 위해서는 이렇다 할 손대접 한 번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치 자신은 당연히 대접을 받아야 하고 그들은 당연히 섬겨야 하는 것처럼 생각해 온 것입니다.

  섬김받는 것이 당연시되어 버린 오늘이야말로 섬김받는 것에 대한 감사와 그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 절실합니다. 믿음이 힘을 잃고 신앙의 기반이 척박해지는 이 시대에 사역자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힘들게 자신들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이 그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시대이기에 사역자들의 소중함을 느끼고 그들에게 옥합을 깨는 마음으로 더욱 더 정성을 다함으로써 이 땅은 물론 전세계에 복음전파라는 사명이 더 훌륭하게 수행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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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나님! 저희가 사역자들에게 보다 더 소중한 것을 드리는 마음으로 그들의 섬김에 대 한 헌신을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힘을 보탤 수 있도록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