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이 글은 경기도에 있는 모 대안학교에 지원하기 위하여 쓴 지원서에 있는
질문 당신의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가치 세 가지에 대한 답으로 작성된 글임을 밝힙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세가지 가치 - 믿음 소망 사랑
(1) 우리는 왜 믿음이 필요한가? 삶의 가치 기준으로서의 믿음
(2) 믿음에 기반을 둔 소망이 세상을 구한다. - 꿈의 진정한 가치
(3)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 그것은 사랑의 완성! 사랑이 전부다.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인가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각자의 소중한 가치를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답이 없는 것조차 답이 됩니다. 노답이라는 하나의 답을 내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그에겐 인생이란 그저 사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허무주의가 마음에 자리잡고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날 이런 허무주의자들이 우리 사회에 넘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바로 오늘을 즐기자 하는 이른바 ‘쾌락주의’가 아닐까요? 그런 허무주의와 쾌락주의의 뒤에는 삶에 대한 어떠한 가치도 부정하는 철두철미한 무신론적 인본주의가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이 바로 우리 사회의 갖가지 문제를-혐오, 갈등, 흉악범죄, 사랑의 부재 등- 가져오는 원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세워줄 어떠한 기준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는가를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87 민주화 시대를 거치고 독재정권의 몰락을 이루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자유와 권리에 대한 과잉의식만 남았고 보편적 가치에 의거한 삶의 기준은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우리는 그러한 공백을 쾌락으로 채우려고 하고 있고 그것은 극단적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를 통한 갖가지 혼란과 죄악을 가져왔습니다.
그러기에 새삼 가치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던진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이 혼란한 사회를 바로 세울 유일한 해결책은 아닐까?
성경에는 귀신이 나갔다가 갈 곳이 없어 원래의 사람에게 돌아왔더니 깨끗이 청소되어 있길래 자기보다 더 나쁜 일곱 귀신을 데려와 그 사람의 상태가 원래보다 상태가 더 나빠졌다는 예화가 나옵니다. 가치의 공백으로 무너져가는 우리 사회 가치의 회복으로 다시 세웁시다.
(1) 우리는 왜 믿음이 필요한가? 삶의 가치 기준으로서의 믿음
피터 터친이라는 러시아 출신의 역사학자는 고대제국의 탄생을 평화를 인류에게 선사한 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인류가 각각 씨족이나 부족단위로 살아간 그 시절에 우리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홉스의 주장의 실사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약탈과 살육이 야만의 시대의 특징이었음은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300명의 전사를 데리고 출동한 장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오직 물리적인 힘과 재력만이 자신들을 보호할 유일한 수단이었던 시대를 종식시킨 고대 제국은 법과 도덕 문화를 통해 인류를 문명사회로 이끈 고대사회 최고의 산물이었다는 피터 터친의 주장은 이러한 의미에서 공감이 갑니다.
그 고대제국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요소 중에 하나가 종교라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역사적 시기를 살펴보면 고대제국과 고대의 고등종교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발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기독교와 중국의 진한제국은 유교(+도교)와 인도제국은 브라만교 및 불교와 이슬람제국은 말할 것도 없이 이슬람교와 함께 성장발전했습니다. “마상에서 정복은 할 수 있으나 통치는 할 수 없다‘라는 말처럼 제국의 형성은 군사력으로 가능하나 그 유지에는 문명과 문화가 필요하고 종교는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훌륭한 수단이었음을 역사는 명확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종교없는 제국의 운명은 결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고대 앗시리아 제국의 이른 멸망에서 현대 소련제국의 붕괴까지 종교적 버팀목이 없는 무신론적 사회의 운명은 비참했습니다. 북한 정권이 그나마 버티고 있는 것은 김일성교라는 사이비 종교를 통해 주민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때문이고 3대 세습은 그러한 종교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김씨 왕조의 붕괴는 곧 그러한 종교의 붕괴이고 곧 북한 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들 개개인이 삶에도 비슷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에 있어 스스로를 지탱해 줄 종교적인 버팀목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닥쳐올 삶의 위기에 무방비 상태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은 하버드대학교가 75년의 관찰과 연구로 얻어낸 ’행복의 조건‘에서도 명확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종교가 주는 믿음은 우리의 삶의 나침반이고 방파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최대의 비극은 바로 이러한 종교를 바탕으로 한 믿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교‘라는 종교를 믿고 있습니다. 이는 곧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래가사처럼 (물론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 그 누구의 간섭도 가르침도 거부하고 오직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 판단 기준은 오직 하나 바로 나에게 좋은 것 유익한 것 즐겁고 재미있는 것인가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인간을 진정 행복하게 해 줄까요? 쾌락의 끝은 허무이며 그 허무를 메우고자 또 다시 쾌락에 매달리는 악순환을 가져옵니다. 더 강한 자극을 구하다 보니 불법도 서슴지 않게 되는 것이죠. 이른바 분노범죄는 그것을 극단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지수가 세계적으로 최하위수준이고 자살률이 선진국에서 1,2위를 다투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자신교적 쾌락주의가 얼마나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의 지침이요 나침반이며 설명서입니다. 그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 검증된 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인류의 지혜의 보고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설명을 ’갑질‘ ’꼰대질‘ ’라떼 말이야‘라고 하며 거부하지만 인류가 오늘날까지 발전한 원동력은 그러한 계승에 의해 인류의 지혜를 활용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인류의 지혜를 삶의 관점에서 집대성한 종교를 바탕으로 한 믿음은 결코 인류의 삶에서 사라지지도 사라져서도 안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제 삶을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믿음을 거부하고 제 생각대로 살아간 것은 결국 저의 삶을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어 갔고 그 결과는 매우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가 아무리 타락하고 부패했어도 유교의 기반이 조선을 세계적인 문명국가로 만들었듯이 한 개인 사회도 그러한 종교적 기반을 둔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믿음이 어떤 종교에 기반한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이며 저에겐 그것이 기독교였습니다. 문제는 종교가 없어 삶이 불안정한 것이지 종교의 종류는 아닙니다. 물론 기독교인 저로서는 기독교를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만일 그가 올바른 종교를 제대로 믿고 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기독교의 이미지가 최근 나빠져 기독교의 이야기에 저항이 심하여 종교를 놓고 대화가 힘듭니다. 이것은 자신교에 바탕한 사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타개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2) 믿음에 기반을 둔 소망이 세상을 구한다. - 꿈의 진정한 가치
요즘 젊은이들 아이들은 꿈이 없다고 합니다. 현실적인 조건을 보면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도 왜 그들이 꿈을 가지지 못하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역으로 말해 왜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을 보낸 우리에게는 꿈이 그토록 많았을까요? 언 듯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꿈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현실에서 모자란 것을 느끼고 그것을 채우고 싶어 하는 욕망이 만들어내는 목표가 아닐까요? 현대그룹을 창설한 정주영 회장님은 지독하게 가난하던 시절에 그것을 이겨내고 배부르게 먹고 살고 싶다는 생각에 도시로 가서 새로운 삶을 꿈꾸었습니다. 농촌에서 아무리 고생을 하며 살아도 미래가 나아질 것 같지 않은데 신문과 신학문 등을 통해 어쩌면 지금보다 나은 삶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그의 꿈이 만들어진 배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에게는 청년들에게는 꿈을 가지게 하는 강력한 동기가 부족합니다. 너무나 잘 갖춰진 집에서 부족한 것이 없이 살아가니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어떠한 동기도 없는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에게 꿈이 생길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게다가 더 문제는 꿈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부모에 의핸 잘 짜여진 계획과 정해진 목표를 강요당하는 그들에게 꿈이란 사치일 뿐입니다. ’생각보다 암기‘ ’비판보다 이해‘ 가 앞서야 하는 교육 환경에서 기존 질서에 대한 의문부호를 출발점으로 하는 꿈이 생긴다며 그것이 이상하겠지요. 그저 주는 대로 잘 받아먹고 소화해 그것을 다시 재생할 능력이 있으면 되고 그 이상은 필요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삶을 십 수년 살다보면 그 사람의 삶에서 그러한 틀을 벗어날 생각을 하기는 것조차 불가능해집니다.
대학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보니 느낀 점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기술적으로는 매우 뛰어나나 틀에서 벗어난 것을 생각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자주 접합니다. 발표 수업 시간이 되어도 질문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뻔한 이야기로 일관하는 것도 그들이 오랫동안 적응하는 훈련만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신과 수행평가가 교사의 성향이나 생각을 읽어내어 그에 맞는 내용으로 과제를 작성하게 만들었기 때문일까요?
그들이 생각하는 미래도 너무나 획일적이었습니다. 공무원 대기업 정규직 등 수입이 좋고 안정된 직업을 골라 오래 일하면서 노후를 잘 대비해 재산을 모으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삶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그런 삶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왜 모두가 그런 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왜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나은 환경에서 자란 그들이 그토록 경제적인 조건에 자신의 삶을 속박시키는 것일까요?
아마도 어려서부터 받은 적응훈련 때문이겠지요. 그들의 부모는 물론 교사들까지 아마도 그러한 삶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끊임없이 가르치며 주입해 온 것이 아닐까요? 위로는 의사에서 공무원 교사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이렇게 정해진 서열 속에서 자신을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하게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을 그들 스스로 가지게 된 것은 아닐 겁니다.
저와 친하게 지내던 학생에게 정치에 입문해 보라고 권유하였지만 그는 끝내 거부하고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인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평소 사회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입에 달고 살아 제법 저와 통하던 젊은이지만 그의 최종적 선택은 가장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이단아였습니다. 이미 고등학교 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아 제 수업에서 제 질문에 많은 답변을 하여 주목을 끌었지만 그가 처한 환경을 극복하는데에는 실패했던 것 같습니다. 공무원이 된 후 날이 갈수록 ’친사회적‘으로 변하여 불만 대신 이해에 노력하는 그의 모습에 씁쓸함을 느꼈습니다. ’아! 000 너 마저?‘라는 심정이었죠.
이러한 사실들이 절대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저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획일적 기준을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누리도록 아이들을 이끄는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의 통속적인 가치관을 따르는 것은 결코 그들의 의지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컴퓨터 게임에 열중하는 십대가 컴퓨터 게임을 개발한 것이 아닌 것처럼 그들이 열심히 따라 하는 것들이 결국은 어른들의 창작품인 것이라는 사실을 뒤집으면 우리는 그들을 바꿀 가능성을 찾을 것입니다. 아니 적어도 아직 그러한 가치관에 물들기 전에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가져 봅시다.
그들에게 보다 아름다운 소망을 갖게 하는 길은 명백합니다. 그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게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믿음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왜 태어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전제로 꿈을 꾼다면 아마도 허무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져서 인생의 가치를 오로지 물질과 쾌락에 두고 사는 사람들의 획일적 성공주의의 희생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릭 워렌이라는 걸출한 기독교 목사의 저서 ’목적이 이끄는 삶‘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란 곧 공의 정의 평화 사랑 등의 보편적 가치를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그러한 가치를 실현하는 것에 의해 드러나게 되어 있죠. 그것은 인류의 평화와 행복이라는 가장 숭고한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갖는 위력입니다.
”너는 사회를 위해 어떤 것을 하고 싶니?’ 이런 질문을 하는 부모가 있을까요? ‘사회를 어떻게 이용하면 너의 삶이 좋아진단다’는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부모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질문이지요. 어느 부모가 자신의 자식을 남과 다르게 고난이 따를 수 있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려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종교가 그에 따른 믿음은 그러한 삶을 살도록 하게 합니다. 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그렇게 해서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의 평화와 행복에 헌신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는 종교적 믿음에 기초하여 세계 평화를 실현하고자 살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본회퍼라는 목사도 종교적 믿음에 기반하여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습니다. 곽재우 장군은 유교의 보국안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붓 대신 칼과 총을 들고 아낌없이 자신의 삶을 바친 것입니다. 그들이 꿈꾸던 것은 모두 하나 인류의 평화와 행복의 실현이며 그것을 각자의 삶의 장소에서 각자에게 맞는 방법으로 실현하려고 애쓴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꿈을 가지게 하기 이전에 어떤 꿈을 가질지를 믿음을 통해 가르칩시다. 보편적 가치를 가르치는 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가장 아름다운 꿈을 꿈니다.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가능하지 않는 꿈을 꾸는 아이들이 이 세상에 넘칠 때 전쟁과 살육 착취 억압이 사라진 아름다운 세상이 실현될 것입니다.
제 나이 60세! 하지만 제겐 그러한 꿈을 위한 중단없는 전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이 저를 부르시는 그날까지 이어질 작은 몸부림일 것입니다. 누군가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하지만 그러한 꿈을 실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루고자 하는 몸부림이 나를 그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루기 위해 애쓰면서 아름답고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수행하는 것으로 진정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꿈은 그러한 삶을 위한 목표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꿈이 없는 인생은 결코 값진 의미를 가질 수 없으며 그러기에 꿈을 꾸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꿈을 소망을 가지고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 그것은 사랑의 완성! 사랑이 전부다.
기독교의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둘만 꼽으라면 바울과 예수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인물로서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여기지만 기독교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서 바울도 그에 못지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심지어 바울을 진정한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예수의 기독교가 기껏해야 유대사회에 한정된 것이었다면 바울의 기독교는 그것을 세계화하도록 확대시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스스로가 ‘이방인(비유대인)의 사도’라고 한 것처럼 바울의 최대 공로는 유대인의 기독교를 세계인의 기독교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그리스의 고린도 지역에 세운 교회에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이른바 ‘고린도 전서’와 ‘고린도 후서’라는 것인데 두 번에 걸쳐 써 보냈기 때문에 전서와 후서로 나뉘어집니다. 이 편지에는 기독교의 교리가 되는 내용이 자세히 쓰여져 있어 오늘날 그의 또 다른 편지인 로마서와 함께 대표적 저작물입니다. 로마서가 교리를 제대로 설명한 것이라면 고린도 전후서는 그것을 실제 적용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서술하는 고린도 전서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아마 기독교를 믿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일지라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과거에는 결혼식에서 자주 불리웠던 노래 가사이기도 하죠.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어떻습니까? 제가 결혼을 할 때도 후배가 이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결혼식에 부를만한 내용이 아닙니다. 물론 사랑이 가지는 보편적 이상을 그린 것이니 아주 틀린 것은 아니나 결코 남녀의 달콤한 사랑을 그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절을 잘 살펴보면 도저히 남녀의 사랑에서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것을 지킬 수 있는 남녀가 있다면 그들의 가정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아름다운 것이겠지요.
바울이 그 구절에서 말하는 사랑은 바로 아가페의 사랑을 말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이란 하나님 신의 사랑이고 그러기에 욕심을 넘어선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모든 사랑의 교과서처럼 여겨진다면 좋을 듯합니다. 아무리 이상이 비현실적이라도 이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토록 혼란스러운 것은 이상이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현실적인 이익과 즐거움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남녀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노골적으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남녀의 사랑의 현실인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가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요? 반대로 말해야 하겠지요. ‘자기의 유익을 열심히 구하고’라고. 사랑조차 자기의 유익의 수단이 된 그런 사회에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라’고 하면 ‘됐어. 그런 사랑을 왜 해? 다 나 좋으라고 하는 것이 사랑인데’라고 외면을 당할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그런 바울이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랑 소망 믿음이 영원하지만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이 구절을 읽거나 듣는 사람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아집니다. 왜냐고요? 각자 자기식으로 해석하니까요. 청춘 남녀는 남녀의 사랑을 결혼한 사람들은 자녀에 대한 사랑을 떠올리며 흐믓해 합니다.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이른바 에로스의 사랑에 가까운 것이니 바울이 말한 아가페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겠지요. 바울은 청춘남녀의 로맨스도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도 아닌 아가페의 사랑을 말한 것인데.
이 구절에 놀란 사람들은 의외로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대부분 기독교 신자들이겠지요. 저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그가 왜 믿음이 아닌 사랑을 으뜸으로 여겼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성경이란 엄연히 믿음을 가르치고 고양하기 위한 종교적 경전인데 왜 사랑을 으뜸으로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을 으뜸으로 여긴 것은 예수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는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믿음의 최종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은 그가 독단적으로 발명해 낸 교리는 아니고 구약에도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구약에서 유명한 가르침인 십계명의 내용을 봐도 짐작이 갑니다. 1-4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5-10계명까지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에 두 가지 큰 가르침이 기독교는 물론 기독교의 전신인 유대교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는 율법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 율법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율입니다. 율법은 구약성경에서 꾸준히 등장하고 강조됩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라는 것이 구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그에 비하여 신약은 예수를 믿고 그의 말을 따르면 구원받는다고 하고 있으니 율법 대신 믿음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구약과 신약을 별개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가 여호와라는 구약의 하나님의 아들을 참칭하여 사람들을 속인 거라고.
하지만 구약의 하나님이나 신약의 예수님이나 강조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지만 그것은 창조주에 대한 예의와 인간이 가진 죄에 대한 속성을 억제하려는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우리의 긍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인간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의 최종적 목표라는 것이죠.
“6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야서 58장 6-7장)
이 문구는 오해되고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을 주어로 보고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이하를 보어로 보는 것은 맞는데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것과. 여기서는 금식의 효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금식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설명하는 것인데 자꾸 금식의 효과를 말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금식을 하면 흉악한 결박이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흉악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밥을 굶는 금식보다 선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자녀들끼리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는 부모는 흡족하지만 서로 아귀다툼하며 죽이니 살리니 하면 산다면 가슴이 아플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님의 마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도와야 한다는 가르침은 신약은 물론 구약에서도 주구장창 등장하는데 이는 곧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는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약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돕는 것은 곧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의 기독교는 이웃 사랑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종교 행위에 열중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기도 하기는 합니다. 기독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 즉 구세주라는 의미이고 구세주인 예수와 그의 아버지이자 최고의 신인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러한 경배를 통해 우리가 이루어야 할 것은 바로 이웃사랑이라는 사실을 현실의 기독교에서는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금식에 대한 구절을 원래의 의미인 이웃 사랑을 무시한 채 금식의 효과로 해석하고 금식을 장려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교회나 기독교도들에게 이웃사랑이란 그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웃 사랑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의 기독교의 사랑은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남녀의 사랑이나 부모의 자녀 사랑을 굳이 경전까지 써가며 가르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사랑은 하지 말라고 해도 심지어 죽인다고 해도 합니다. 발렌타인데이가 결혼을 금한 법을 어기고 남녀를 맺어준 발렌타인 사제가 처형당한 날인 것을 아시지요? 그만이 아니라 결혼한 남녀들도 죽음을 당했을텐데 그럼에도 그들은 결혼을 합니다. 부모 자식의 사랑이야 말할 나위도 없고요.
우리 인간은 세상에서 성공이나 출세 부귀영화를 위해 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것은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고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를 대하여 세상이 아름답고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모든 종교가 이웃사랑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야만의 시대를 끝내고 문명의 시대를 열어간 제국들이 그러한 가르침을 가지고 피와 투쟁의 시대를 종식시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러한 사랑을 잊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모의 자녀 사랑 남녀의 사랑조차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것이 되어 가는 실정이니 이웃 사랑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사랑에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랑 특히 이웃사랑이 더욱 더 절실해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혼란한 것은 바로 이웃 사랑의 상실 때문입니다. 하고 싶은 사랑 우리만의 사랑에 갇혀 이웃을 외면하며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세월호 유족에 대한 악의적 비난 – 지겹다 그만 해라 시체팔이 하지 말라 등- 코로나로 고통받는 자연업자들에 대한 비난 – 자영업자가 벼슬이냐? 자엽업자만 국민입니까 등등- 들은 외환위기 시절에 금모으기로 하나가 되었던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국민적 유대감이 사라지고 그로 인해 이웃사랑이 발을 붙이지 못하고 오로지 끼리끼리의 사랑 (우리만의 사랑) 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때로 자기들의 집단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다른 집단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사랑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랑이 믿음보다 위라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죠.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구약의 하나님도 부처님도 공자님도 비슷하게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그 사랑은 이름 모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될 때 가장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 우리 인류가 그러한 사랑을 지향한다면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비참한 결과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일부의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은 사랑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는 일입니다.
저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도 사랑의 실천입니다. 비록 저에게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지만 그것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자 합니다. 모든 교육기관과 종교단체 등에서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매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2세들에게도 그러한 사랑이 전해져 보다 나은 미래가 열리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는 그러한 꿈을 실천하는 것에 남은 삶을 다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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