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나는 나이다 ‘나의 특별한 역할’

닥터 양 2022. 3. 22. 15:08

 

나는 나이다 나의 특별한 역할

내가 주께 감사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하심이라(시편 13914)

 

  나이가 들어도 피는 사람들의 조건 중의 하나는 비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경력 지위 재산 명성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초등학교 때는 그다지 차이가 없지만 대학만 가도 어느 대학에 다니느냐에 따라 다른 평가를 받고 취업을 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느 기업 어떤 직장을 다니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집니다. 명문대를 나와 고액연봉을 받는 직장을 다니고 있으면 이성들이 다가고자 안달을 하지만 삼류대학을 나와 저액연봉의 직장에 다니면 다가가기는커녕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나이가 더 들수록 이러한 격차는 더 커집니다. 얼마 전 대통령 선거가 끝났는데 당선자의 주변에는 구름떼같이 사람이 몰려들고 낙선자 주변에서는 있던 사람들도 썰물 빠지듯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누군가 성공을 하면 그 영향력이 학생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으니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게 되고 그렇지 못 한 사람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어느 사역자는 명예에 매달리는 목회자를 비난했는데 그것은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명예에 집착하는 것은 그들이 살아온 역사가 명예를 중시하게 만들었고 반면 여성들은 사회생활을 그다지 하지 못했기 때문에 명예보다는 실속을 더 챙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명예란 겉보기에는 무의미하게 보일지 모르나 그것이 있으면 실속을 더 많이 챙길 수 있다는 사실을 남성들은 잘 알고 있고 여성들은 그렇지 못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명예나 부 권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나 가질 수 있다면 갖고 싶은 마음도 없겠지요. 예전에는 자동차가 귀중품이라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남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껴게 되었습니다. 또 갖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수준의 차를 갖고 있는가에 따라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하고 명예를 누리기도 합니다. ‘경차를 타고 오는 남자 친구를 보면 민망하다는 이야기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바로 이러한 면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남과의 비교에 열을 올리기 마련입니다. 젊어서의 가난은 흉이 덜 되나 나이 들어서의 가난은 모욕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재산을 가질 근거가 적으니 가난이 용서되나 나이가 들면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회적 지위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는 처지이니 그에 대한 비교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자녀들의 학업성적과 직장 결혼 여부와 그 내용 등에서도 비교가 이루어지니 머리가 아플 정도입니다. 이 모든 기준에서 자유롭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비교는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제가 친하게 지내던 후배 한 명은 여러 대학에 재학 중이라고 하는 하소연을 했습니다. 물론 실제로 여러 대학을 다니지는 않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두 개의 대학교 적을 두는 것 말이죠. (혹시 아시는 분이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그런데 왜 이런 상황에 빠졌을까요? 바로 부모님들의 허영심 때문입니다. 그는 제법 이름있는 대학에 합격하였으나 학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른바 반수를 하고 다른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물론 다니던 학교는 자퇴를 했지요. 문제는 새로 입학한 대학이 이전의 대학보다 세상적으로는 덜 유명한 대학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은 그에게 여전히 그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말하라고 부탁했고 그래서 비교적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말로는 전화가 오면 대처를 잘 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A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해야 하고 어떤 이에게는 B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그걸 혼동하지 말아야 부모님의 체면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지요? 아이의 학교가 부모의 명예와 직결되는 사회에서 생긴 해프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울대에 자녀를 보낸 부모는 비록 재산이 별로 없어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재벌 부모라도 삼류대를 다니는 자녀가 있다면 어깨에 힘이 빠진다는 농담이 이래서 나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가 들어도 피기 위해서는 비교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마음에 와 닿습니다. 비교를 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자족하여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결국엔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비교를 통해 스스로를 낮추거나 높이는 사람들은 어느 쪽이나 더 높은 곳을 향한 노력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낮은 사람은 열등감으로 인해 높은 사람은 자만심 때문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비교를 하지 않게 되면 스스로가 비교 대상이 되기 때문에 보다 나은 나를 만들려고 노력할 가능성이 매우 크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비교를 떠나 자신을 독특하게 만들어준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표현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걸작 중의 걸작이라고 한 어느 목사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도 기억나고요. 비교를 하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사랑하고 존중한다면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세상에는 개성을 살려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비교가 아니라 나의 특징에 집중한다면 누구나가 성공한 사람이 되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반대로 비교의 하정에 빠지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열등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성공을 했어도 약점은 누구나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제 둘째 딸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아빠 나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대 의대 갈거야. 그럼 아빠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겠지?” 저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 아이로 하여금 비교에 의한 압박을 받게 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00! 난 네가 전교 꼴등을 해도 지잡대에 별볼일 없는 학과를 가도 내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무나 자랑스럽단다라고. 그것은 위로의 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서울대 의대를 다니는 남의 집 아들딸보다 지잡대를 다니는 제 아들딸이 더 자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비교를 통해 우리를 낮추고 우울한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아이들의 성적 직업 자신들의 직업 소득 집의 크기 자동차의 수준 직위 명예 등으로. 그것은 누군가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필요 없는 걱정과 염려를 하게 되기도 합니다. 결국 그러한 비교는 좋은 점도 있지만 (건강한 비교를 통한 경재력 강화)오히려 해로운 것도 많습니다. 여러 조사에 의하면 경쟁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성취도가 떨어진다고 합니다. 경쟁은 반드시 좋은 결과만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경쟁을 일으키는 것이 비교라고 한다면 결국 비교는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교육수준이 높다는 핀란드의 사례는 그것을 증명합니다. 핀란드에서는 중학교때까지 등수를 결정하는 시험이 없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해서 학생들이 제대로 공부하겠느냐 하겠지만 핀란드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오랫동안 최상위에 올라 있습니다. 더구나 공부시간은 선진국 중에서 최하위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놀랍습니다. 비교를 하지 않고 자신의 향상을 위해 애쓰는 것이 결국 경쟁력도 갖는다는 산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장단점이 무엇이든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비교를 통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은 인간적으로도 그리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럴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자신에게 더 투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여러분을 당신의 목적을 위해 쓰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특이한 점을 살려 하나님에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자녀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