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미리 알면 재미없어요 ‘미로 걷기’

닥터 양 2022. 3. 25. 08:20

미리 알면 재미없어요 미로 걷기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으니라

      (요한복음 146)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관심이 많습니다. 길을 걷다가 보면 점을 치는 집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점쟁이들은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이용하여 때론 큰 돈을 벌기도 합니다.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은 그들에게 좋은 먹이감이 됩니다. 사업이 잘 되는가를 묻는 것은 기본이고 사업체의 이름 개업 일자 등을 두고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돈을 뜯어냅니다. 업체의 이름을 짓는데 얼마 개업 일자를 정해주는 데 얼마 이렇게 말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그런 점쟁이들 자신이 잘 사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은 60이 넘도록 결혼도 못하고 고생만 하며 살지만 모아둔 돈도 거의 없어 힘들게 사십니다. 그분의 경우는 영적인 능력이 아니라 역학을 공부해서 점을 치시지만 영적인 능력으로 점을 치는 사람들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귀신을 섬겨 점을 치니 당장은 잘 될지 모르나 언젠가는 귀신에게 다 털리고 말아 궁핍하게 살게 된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귀신은 일단 의도가 악하    게다가 하나님처럼 축복을 내릴 능력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미래를 미리 아는 것에 무슨 유익이 있는지.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알아봐야 소용이 없고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해서 미래가 바뀐다면 그게 점을 본다고 정말 달라질까요? 오이도프스 컴플렉스를 탄생시킨 오이도프스 이야기에 따르면 미리 정해진 미래는 결코 바뀌지 않고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묘하게도 미리 안 것이 화근입니다. 왕은 아들을 죽일 것을 명하였으나 불쌍히 여긴 신하가 몰래 살려둡니다. 만일 왕이 미래에 아들이 자신을 해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 아들이 훗날 왕이 친부인 줄 모르고 해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알고 고친다면 그것이 진짜 미래라는 것이죠. 어쨌든 미래는 바꿀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니 미리 안다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 또는 스포츠 게임을 본다고 합시다. 미리 결말이나 승부결과를 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몰입도가 떨어지겠지요. 물론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나 명승부는 여전히 흥미진진해 집중을 가져옵니다. 하지만 그것도 끝을 모르면서 즐기는 것 보다는 흥미가 떨어질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저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벤허 같은 명화 생의 한 가운데에서나 삼국지 같은 명작소설을 여러 번 읽었어도 여전히 흥미롭게 느끼지만 그렇다고 처음에 가졌던 그 감격을 재현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도 첫 사랑이 가장 좋은 것은 내용이 아니라 뭐든지 처음 겪는 일이라 실제보다 더 큰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결말을 알고 있다면 그러한 작품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나 지혜도 적을 것입니다. 몰입이 강해질수록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죠. 물론 그렇다고 결말을 알면 아무 것도 못 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얻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은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처음 접해 본 때의 신선한 충격에 따른 것에 비할 바는 아니죠.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채만식 선생의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주인공은 아들에게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삶이 아니라 안정된 삶을 살도록 합니다. 그것은 곧 미리 준비된 삶 즉 레디메이드(ready-made) 인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대학의 정교수가 되지 못한 것이 전화위복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데 그것은 정교수 자리가 주는 안정감이 결국 제 인생을 그렇게 만들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수가 된 선후배들을 보면 안정감은 뛰어나나 뭔가 도전정신은 좀 부족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래를 다 보여주시고 그 길을 가게 하신다면 비슷한 결과를 가져올 것 같습니다. 우리는 믿음도 깨달음도 얻지 못한 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답을 알고 치루는 시험이 시험일 수 없듯이 미래를 알고 살아가는 삶에서 의미있는 신앙적인 유익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김빠진 콜라 같다고 해야 할까요? 김빠진 콜라도 콜라맛이 나지만 탄산으로 인해 얻어지는 상쾌함(이른바 사이다맛)은 느끼기 어렵습니다.

  더 큰 문제는 신앙의 성장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란을 통해 많은 것을 얻습니다. 무엇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아가게 됨으로써 하나님과 더욱 긴밀한 교제를 통한 믿음의 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이 가장 큰 소득이 아닐까요? 그런데 모든 미래를 알고 있다면 그래서 주님에게 다가갈 동기를 갖지 못하게 된다면 과연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는 기도 말씀에 대한 철저한 성찰 찬양을 통한 믿음의 고백 이 모든 것이 환란의 과정에서 나오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마! 다쳐.”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상대에 대하여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이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르는 상태에서 서로에게 다가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찬찬히 서로를 알게 되면서 이해가 깊어지고 그것을 통해 둘은 보다 깊은 관계를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이 있는데 서로를 너무 알게 되면 이러한 관계 형성에 지장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직장 동료들끼리 사랑을 느끼기 어려운 것도 너무 서로를 잘 알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생은 미로 같아 직선으로 뻗어 앞이 훤이 보이는 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늘 구불어진 길을 걸으면서 앞이 보이지 않아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염려의 대부분이 의미없는 것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없듯이 미래를 모르기에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염려와 근심을 합니다. 하지만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는 원인 중에 길이 너무 직선이라 긴장감을 잃는다는 것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미래가 보이는 삶은 긴장감을 잃어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되거나 그로 인해 도리어 정체된 삶을 살게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로와 같은 인생을 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또 그것을 성장시켜 갑니다. 염려와 근심은 그 자체로는 좋지 않은 것이지만 그로 인해 주님을 더 가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것은 염려를 근심을 주님께 맡기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의미이지 염려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이 간절히 주를 만나고자 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바로 그러한 염려와 근심이 아닙니까? 앞이 구부러져 보이지 않는 미로에서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학원에서 입시지도를 하다 경험한 일입니다. 면접시험을 지도하였는데 그 학생은 과거의 면접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는 말재주가 없나 봐요! 아무 말도 못하겠더라고요하지만 지도를 하다 보니 그는 말을 잘 못하는 학생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면접에 실패한 것은 미리 답을 작성하여 그것만 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 그에게 미리 작성한 답안을 외우지 말고 자신의 말로 답을 말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비록 서툴더라도 그렇게 하면 자신의 머리로 생각한 답이기 때문에 면접의 긴장 속에서도 잊지 않고 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답안을 기계적으로 외우면 긴장된 분위기에서는 기억해내기 어렵습니다.

  제 생각은 적중했습니다. 그는 훌륭하게 면접시험에서 답을 말하였고 합격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시험 전날의 모의시험을 해 보았을 때 저는 합격의 예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너무나 유창하게 답을 했고 표정에는 자신감이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계적으로 답을 외웠다면 아무리 잘 외웠어도 스스로 깨달은 것이 없으니 시험으로 인한 긴장에 사로잡혀 기억하지 못하게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답을 외우는 것으로 인해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는 삶은 바로 기계적으로 답을 외워 면접시험에 임하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끔 갑자기 말씀을 증거해야 할 때가 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작성한 것을 가지고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래도 다시 한 번 보고 새롭게 머릿속에서 구성을 한 다음에 증거할 때와 이미 알고 있으니 그냥 증거하는 경우는 완전히 다릅니다. 새로 구성을 하면 기억이 잘 나지만 이미 알고 있다고 하여 그대로 증거하면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미리 만들어진 것이니 적당히 해도 된다는 편안함이 독이 되는 것이지요.

  일본이 올림픽과 월드컵 유치에서 우리에게 패하거나 사실상의 패배를 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일찍부터 준비를 했고 우리가 유치를 선언했을 때는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한 상태였으니 우리의 도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늦은만큼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덤벼들었고 결국 투표할 때 마지막의 노력이 기억에 남게 되니 승리를 하게 된 것입니다. 미리 준비했고 이미 상당히 이루었다는 것이 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해변가의 발자국의 예화는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장 힘들 때 우리를 업고 가셨습니다. 미로와 같은 인생에서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깨닫고 살아가게 됩니다. 아이러니하지만 미래를 모르기에 우리는 불안하고 그 불안이 주님과의 동행을 구하게 되며 그로 인해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계획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주님의 절묘한 계획을 깨닫고 전적으로 주님께 의존함으로써 염려와 불안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