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이 가져온 축복 ‘예수님께 시선을’
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며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시편 18장 16절)
유학 시절에 저는 고립된 상태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지도교수님과 저는 서로에게 불편한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인데 그 이유는 제가 진행하고 있는 연구가 교수님에게 도전을 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정면 공격은 아니었습니다. 교수님의 연구주제와 제 주제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제 연구는 교수님이 믿고 있는 이해에 대한 반론이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저의 분야에서 전문가는 물론 일반인에게까지 알려져 인정받을 정도로 그 위상이 높으신 지도교수님에게 외국에서 온 유학생이 도전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시도라 하겠지만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제가 그럴 용기가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대학원은 학부와 달라 지도교수가 생사여탈의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자칫 자살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도교수와 맞지 않아 고민하던 대학원생 한 명이 제가 그 학교를 다니는 동안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해 지도교수를 바꿀 수 있게 되었지만 아무리 규정이 바뀌어도 그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른 교수를 저버리고 온 학생을 환영할 교수는 적기 때문입니다.
저를 탐탁치 않게 여긴 것은 비단 지도교수님만이 아닙니다.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도 저를 고깝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외국인 주제에 감히 교수님에게 도전을 해?’ 이런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 연구는 지도교수님에게만 도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일본연구자들이 쌓아올린 정통학설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니 더욱더 반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같은 교수님에게 지도를 받고 있던 한국 유학생 한 명이 다른 학생들과 함께 있을 때 “지도교수님에게 도전하는 것은 매우 용기 있는 행동 아닌가”라고 칭찬하여 힘을 실어주기도 하였지만 큰 효과는 없었습니다. 1주일에 한 번 모여 토론을 하는 시간에 제가 발표를 하게 되면 모두가 저를 집중공격 하여 곤경에 처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도교수님의 인격이 매우 뛰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교수님 같으면 저는 견디지 못해 연구주제를 바꾸거나 학업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저는지도교수님과 사이가 좋지 않은 라이벌관계의 교수님 강의도 들었고 그것도 모자라 그 사실을 자진신고하는(?) 미련함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꾸짓기는 커녕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게 자네에게 유익하겠지?”라며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런 교수님에게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80세에 치매에 걸려 돌아가신 것이 아쉽습니다.
저를 괴롭힌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내가 오랜 외국생활에 몸이 많이 상해 견디기가 어려워져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고국으로 가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의 몸은 회복되었지만 저는 떠나보낸 가족을 그리며 외로운 날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것은 앞의 문제와 달리 매일매일 겪는 고통이었기에 더욱 힘들었습니다. 가끔 가족과 국제전화로 통화를 하고 나면 도리어 그리움이 사무쳐 올라 괴로워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몇 달에 한 번은 귀국해서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문제는 다시 되돌아온 직후에 느끼는 상실감이 너무나 컸다는 것이죠. 집에 돌아와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자고 하는 삶이 너무 힘들었죠.
이러한 고립감은 하지만 저에게 뜻하지 않는 선물을 안겨주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매일 성경을 읽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교회에서 안수집사를 받은 것도 있지만 고립감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읽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생전 안 해보던 새벽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새벽 5시에 교회를 가다니 말이 되는가 하는 생각에 젖어 있던 제가 그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저의 고립감은 심각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룰 정도였으니까 짐작이 가시죠?
저의 신앙생활은 몰라보게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과거보다 교회봉사에 더 열을 올리게 되어 저에 대한 교인들의 평가는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직분을 받은 것이 저를 높이 평가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외국인 특혜’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는 명실상부한 안수집사로서 손색이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 행사란 행사는 다 관여할 정도로 열성을 보였으니까요. 심지어 해결사 역할까지 자처하게 되었습니다. 곤란하면 부르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기쁜 것은 목사님이 신임이 날로 날로 더해 갔다는 것입니다. 임직 당시만 해도 의구심을 보이신 목사님은 무한신뢰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유학생 할당제(?)로 직분 받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되었죠. 당회에서의 위상도 높아져 제가 제안하는 것이 그다지 저항없이 통과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만큼 당회원들의 신망도 두터워졌습니다.
가장 큰 기쁨은 제 기도가 응답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지도교수님의 태도는 눈에 띄게 우호적이 되었고 그래서 저를 싫어하던 학생들이 저를 공격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생사여탈의 권한을 가진 지도교수가 좋게 평가해 주는 연구를 마구잡이로 씹기란 어렵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토론시간이 고통의 시간이 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가족과의 만남도 잦아져 외로움도 줄었고 외환위기로 인한 환율변동이 현지에서 장학금을 받던 저에게는 오히려 행운이었습니다. 한국화폐의 가치가 하락하는 바람에 제가 가족에게 보내는 돈의 가치가 적어도 50%이상 뛰었으니까요. 게다가 학교에서 저는 조수라는 직책을 맡게 되어 장학금이 아닌 월급을 받게 되어 꽤나 많은 수입을 올리게 되었고 그래서 송금한 돈의 일부를 모아 집까지 사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이 저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일 극적인 것은 조수라는 직책을 맡게 되는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모집은 통상 1월 말 무렵에 있었는데 제가 응모한 해에만 1월 20일 전후로 모집이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그것에 응모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날짜 변경에 그다지 큰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으나 다른 학생들은 미처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해 결국 응모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른 경우도 적지 않았기에 저는 쉽게 합격을 하게 되었죠.
게다가 관사마저 배정받아 방세가 20만 원에서 7만원으로 낮아져 경제적 여유가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원래 방도 화장실 공용에 욕실이 없어 저렴한 원룸이었는데 관사는 방이 2개이고 거실도 있는 곳인데 겨우 7만원의 월세만 내면 되었으니 얼마나 큰 혜택입니까? 조금 낡았지만 혼자 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어디선가 세탁기마저 얻는 행운도 따랐죠.
이 정도면 간증할 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저에겐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고 있는 이 사실들은 놀랍게도 실화입니다. 저는 비로소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역사하심을 몸소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까지의 인본주의적 신앙에서 탈피해 신본주의적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 했습니다. 이후 오늘까지 저는 수많은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 모든 체험의 화룡정점은 장로임직과 주일설교였습니다. 박사학위를 받는 것이 최종확정되기 두 달 전 쯤 저는 당회의 결정으로 장로에 임직되었습니다. 곧바로 열린 공동회의 선거에서 전원일치의 지지로 확정되어 그 다음 주일에 안수를 받고 장로가 되었습니다. 안수집사 3년만에 받은 거라 ‘유학생 할당’ 내지 ‘외국인 우대’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떨까요? 아마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거의 불가능한 신공을 제가 발휘한 것입니다.
장로가 되고 나서 첫 번째 당회에서(안수집사로서가 아니라)저는 놀라운 제안을 했습니다. 교단 총회장이 되신 목사님의 출장으로 공백이 생긴 한달 중 한 주의 주일설교를 제가 하겠다고. 유학생활이 끝나가는 그즈음에 저는 10년간의 유학생활을 통해 얻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의외로 제의는 쉽게 당회를 통과했습니다. 무엇보다 목사님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ㄴ다. 그리고 3개월 후 저는 주일 아침 강단에서 45분간 설교를 통해 말씀을 선포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일본에서 제가 한 마지막 공식활동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고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만일 제가 지도교수님과 문제가 없었다면? 가족을 보내지 않았다면? 과연 이러한 일이 있었을까 의문입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가 있던 수녀원의 원장수녀는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창문을 닫으실 때는 다른 창문을 열어 주신다”고. 합니다. 가정교사로 갔던 집에서 홀아비가 된 폰트랍백작과의 사랑에 빠졌지만 그것이 두려워 돌아온 마리아에게 원장수녀는 그것이 새로운 창문이라고 하며 다시 그 가정으로 돌아가 엄마와 아내가 없어 불행했던 가족들을 위해 살라고 격려합니다.
‘Climb every mountain’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Climb every mountain /Search high and low/ Follow every byway
Every path you know/ Climb every mountain /Ford every stream
Follow every rainbow/ Till you find your dream
A dream that will need /all the love you can give/Every day of your life for as long as you live/ Climb every mountain /Ford every stream
Follow every rainbow /Till you find your dream
A dream that will need/ all the love you can give /Every day of your life
for as long as you live /Climb every mountain/ Ford every stream
Follow every rainbow/Till you find your dream
모든 산을 올라가보고/ 높고 낮은 곳을 다녀보아요/여러 길을 걸어보면/당신의 길을 알수 있어요/모든 산을 올라가보고/ 만나는 강줄기를 다 건너가 보아요/무지개가 보이면 뒤쫓아 가세요/ 당신의 꿈을 찾을 때까지
당신의 사랑을 진정으로/필요로 하는 그곳에서 /당신이 사는동안 당신의 모든 사랑을
쏟을 수 있는 그런 꿈을 꾸어요 /모든 산을 올라가보고/만나는 강줄기를 다 건너가 보아요
무지개가 보이면 뒤쫓아 가세요 /당신의 꿈을 찾을 때까지/당신의 사랑을 진정으로
( https://www.youtube.com/watch?v=OfuMMZymklQ에서)
제게 고립은 또 다른 창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창은 제가 일생동안 만나 수많은 창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창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라는 분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창을 통해 제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고 그것은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고통과 좌절에 빠져 힘드십니까? 사람들이 자신을 외면하고 있어 고독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라는 또 다른 창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창을 만나실 기회를 얻은 것이니 이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이미 주님을 만나셨다고요? 그럼 첫 사랑을 회복할 기회라고 생각하십시오. 형식적이던 저의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이 된 저처럼 말입니다.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은 결코 이론이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고난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과 가까워짐으로써 축복된 삶을 사실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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