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나의 힘의 근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날아오르는 소망’

닥터 양 2022. 3. 14. 07:03

나의 힘의 근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날아오르는 소망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31)

 

  “자아로 빗장을 지르지 말고 내 영을 받아들여라. 그리하면 내 영을 의지하여 내가 땅에서 한 일과 똑같은 일뿐 아니라 더 큰 일도 하리라”(‘주님의 음성두 명의 경청자)

자아의 빗장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갖가지 경험과 학습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나의 생각을 갖게 하고 어느 정도의 분량이 차서 확고하게 굳어지면 자아라는 인격적인 것이 자신을 사로잡게 됩니다. 그로부터는 그 자아의 통제를 받게 되어 삶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당하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내가 주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형성된 자아는 그 특성상 편협성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능력은 유한하고 또 경험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아는 일정 연령이상이 되면 성장이 멈춰버리기 쉽습니다. 일단 자아가 형성되어 굳어지면 외부로부터의 신호와 정보를 자아의 잣대로 판단하여 버리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세상을 보는 안경이 씌어진 셈입니다.

  ‘자아의 빗장이란 바로 그러한 편협한 자아가 자신을 지배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편협하지도 한정되어 있지도 않는 분입니다. 천년을 하루 같이 여기시는 그 분에게 유한한 시간만을 지상에서 보내면서 쌓인 인간의 경험은 한낱 순간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세상 지식을 다 동원해도 하나님의 그것에 1에도 미치지 않습니다. 우주의 설계도를 만드신 그분에게 그 설계도의 극히 일부의 존재들 중에 하나에 불과한 인간의 지식은 그저 한 조각의 파편에 불과할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백과사전의 한 항목정도 아닐까요?

  그런 그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분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입니다. 수돗물을 받아야 하는데 수도꼭지를 조금만 열어놓으면 답답할 정도로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니 쉽게 물이 담아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도 꼭지를 확 열어놓으면 물이 콸콸 쏟아져 빠르게 물을 담을 수 있습니다. 양 자간의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현격하게 커지게 되겠지요.

  그러기에 주님의 능력을 최대한 받기 위해서는 마음의 수도꼭지인 자아를 활짝 열어놔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나의 자아의 수도꼭지를 최대한 틀어놓아 가는 것 말입니다. 처음에는 자아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어려움을 겪지만 점차 자아의 작용이 줄어들면서 주님의 능력이 내 안에 점점 넓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는 우리의 자아를 대신해서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면서 자아의 빗장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것이 소위 나와 주님의 연합이 완성되는 단계입니다.

  많은 크리스천이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진행시키지 못한 채 자아의 빗장안에 갇혀 삽니다. 주님의 무한한 능력과 지식을 통해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하고 자신의 힘만으로 살려고 몸부림칩니다. 아직도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니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을 마음껏 누릴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하지만 우리가 자아의 빗장을 풀어 헤치고 주님의 능력을 마음껏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됩니다. 독수리처럼 날개치고 올라고 가고 달음박질을 하여도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의 힘의 근원이 되시는 것이지요.

  모든 크리스천이 그렇듯이 제게도 자아의 빗장을 열어가는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시절에 (라기보다는 어린 시절이죠)신앙을 접했을 때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어 자아가 형성되자 점차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때는 신앙 자체를 버린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버린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고집 센 저를 기다리시고 찾아와 말씀하셨으며 자신이 살아있고 역사하심을 몸소 보여주셔서 저의 자아의 빗장을 열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날 정도 고마울 뿐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 쓸모없는 자를 그토록 사랑하셨습니까? 제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애타게 저를 부르셨습니까?’ 라고 저는 고백합니다. 탕자처럼 하나님을 거부하고 살던 저를 끝까지 사랑해준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가시나무에서)나의 자아가 주님이 계실 곳을 없애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아의 빗장을 지르고 주님이 들어오심을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능력을 자신의 생각으로 제한하고 있지습니까? 내 자신이 나의 주인이 되어 주인 되신 주님을 마음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나요?

  “내 십자가는 세상의 모든 짐을 지는 십자가이니 네 짐을 그 위에 내려놓으라.”(‘주님의 음성두 명의 경청자) 주님은 그 분을 주인으로 인정하며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대신해서 짐을 지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언제까지 짐을 고스란히 자신이 다 지고 가려고 하십니까?

  무신론자들과 대화를 하면 그들이 얼마나 자아의 빗장을 잠구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세계에 대하여 과대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확한 정보나 근거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아에 대한 한없는 애착 때문입니다. 자기애에 투철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작게 만드는 것에 대하여 맹렬한 거부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것을 자신에 대한 위협이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여기는 것이죠. 무신론은 결국 사실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애에 의한 맹목적인 믿음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기만하지 마십시오. ‘난 내 힘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어. 내게 주님은 주인이 될 수 없어. 그저 도우미로 등장해서 문제를 해결해 주면 그만이야라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주님! 저는 주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의 주인이 되어 주셔서 저를 이끌어주십시오라고 하며 자신을 전적으로 맡길 때 우리의 짐을 주님은 대신 짊어지셔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자기부인을 통해 주님을 주인으로 모셔들여 살아감으로써 무거운 짐에 억눌리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