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결혼 꼭 피해야 하나? 믿는 자는 때로 고난을 자처해야 한다.
(참고 : 손선미 선교사의 해당설교 https://www.youtube.com/watch?v=FPRnnEW9OTE
저의 신앙의 멘토 손선미 선교사는 불신결혼을 불신자와 멍에를 함께 짊어지는 것이라고 하며 절대로 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불신결혼이 가져오는 어려움은 아마 본인이 불신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비교적 문제로 대두되지 않고 있지만 과거에는 제사 문제가 제법 이슈가 되었죠. 기독교를 믿는 여성이 불신 가정에 시집을 가서 제사 문제로 시댁식구들과 갈등을 겪었던 것은 한때 사회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불신자와의 결혼은 피하고 싶은 것이 크리스천으로서는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그것이 생각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그렇게 이성적으로 조정되는 것이 아니기에 억제하려고 해도 결국 불신자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생기는 사랑은 인위적으로 만드는 사랑보다 훨씬 더 강렬하기에 끊을래야 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운명적 만남에 대하여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신앙적인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거부하는 것이 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다 못해 취미가 달라서 부부끼리 부딪히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영혼의 문제인 신앙이 다르다면 큰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기왕이면 신앙적으로 맞는 사람과 결혼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꽃길을 걷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크리스천에게 고난이 없는 꽃길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의 길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손 선교사는 불신자와의 분리를 주장했습니다. 불신자는 사탄이며 우리는 사탄과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크리스천은 크리스천끼리 어울리고 교제하고 살아야 신앙적이라 할 수 있나요?
이것은 선교사의 평소 주장과 상당히 배치됩니다. 손선교사는 우리가 구원을 받고도 세상에 살아야 할 이유는 바로 불신자를 구원하는 것이라고 늘 역설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끼리만 교제를 한다면 어떻게 불신자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설마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요.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가 됩니다. 불신자를 구원하려면 불신자와 만나야 하지 그냥 기도만 하면 된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았고 또 이제까지 그렇게 가르친 교회 지도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끼리만 교제하라니 명백한 자기모순 아닐까요?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불신자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때로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전도를 하면서 기분 좋게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여 전도에 성공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 것입니다. 오죽하면 김기동 목사가 고구마전도법‘을 만들었겠습니까? 냉대를 받아도 ’생고구마‘라고 생각하고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 고구마전도법은 일종의 심리학적 방어기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전도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만일 손선교사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불신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않기 위해 적당히 전도를 하고 물러나야 할 것입니다. 아니 아예 전도를 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왜 불신자와 멍에를 함께 집니까? 전도 안 하고 편히 지내다가 천국 가면 될 것을.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거나 가르치는 지도자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이겨내고 기어코 상대의 영혼을 구하라‘는 것이 지도자들의 주장이 아닐까요? 그에 따른 고난은 상급이 되어 돌아온다고 합니다. 천국에 다녀온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도는 순교에 이은 최고의 충성이기에 상급도 순교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세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또는 조금 친한 사람에게 전도를 하기 위해 고난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면 사랑하는 상대에게 그러한 고난을 각오하고 전도하는 것이 잘못은 될 수 없겠지요? 만일 손선교사의 말대로 그대로 헤어지게 된다면 자신이야 편하지만 상대는 구원의 길에서 영원히 멀어질지 모릅니다. 이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의 결과일까요? 자기 혼자 편하자고 상대에 대한 전도를 포기하고 편한 길을 가는 것이.
크리스천은 고난을 통해 신앙을 키운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신앙의 성장을 이룬다는 사실은 거의 상식입니다. 도리어 평안한 환경에서 기독교는 타락의 길을 걸었음을 역사는 증명합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가 정체 내지 쇠퇴하는 것의 원인으로 경제적 번영과 삶의 질의 향상을 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자신이 생기니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죠. 손선교사 자신이 중국에서는 의료환경이 좋지 않아 하나님을 더 찾게 되는데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아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이 의사를 찾는다고 개탄했던 것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불신결혼은 도리어 신앙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는 선택일 수 있습니다. 편하게 신앙생활하기보다는 고난을 이겨내고 한 사람 나아가 자식까지 포함해서 한 가족을 구원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불신결혼을 일종의 선교로 여기고 한다면 도리어 많은 유익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모태신앙을 받아 편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보다 불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이겨내 훌륭한 신앙인이 된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만일 믿는 사람들이 그런 각오로 모두 불신결혼을 한다면 대한민국의 신앙지도는 달라질 것입니다. 불신자끼리 결혼하여 불신가정을 늘리는 것보다 불신자를 신앙으로 이끌어 믿음의 가정을 늘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에 자신이 없으면 애라도 많이 낳아라‘는 우스개소리를 ’전도에 자신이 없으면 불신결혼이라도 해서 신앙의 가정을 늘려라‘고 바꿀 수는 없을까요? 특히 신앙의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불신결혼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역설적인 것이지만 그런 분들끼리 결혼을 하면 자신들이야 더 말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손선교사는 불신자와의 동업에도 회의적이나 과연 그럴까요? 이웃이나 동료를 전도하여 구원받게 하는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전도를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들만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불신자 친구 친지 친척과 다 관계를 끊으라는 것은 결국 그런 말이 아닐까요?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똥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는데 전도를 위해서라면 똥물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곳에도 들어갈 각오를 하는 것이 믿는 자의 길이라고 알고 있는데 제가 착각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손 선교사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불신결혼은 피해야 한다고 합니다. 구약에는 이미 결혼한 사람들이 이혼을 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돌려 보내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미 결혼했다면 상대가 원하지 않는 한 이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손선교사도 차마 이혼을 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빨리 전도하라고. 그것이 결혼이라는 절차를 거친 사람에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불편함을 감수하고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떨지.
오지에 가서 기독교에 대한 말 한마디도 못하고 살해당한 젊은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을 죽인 부족의 사람들은 훗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게 됩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부족과 선교사들은 어떠한 관계도 없는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귀한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랑하는 남자나 여자를 위해 일생을 바쳐 그를 그녀를 구원하려고 하는 시도를 폄하하고 피할 것을 강권하는 것입니까? 설마하니 야만인들에 대한 선교보다 사랑하는 남자나 여자를 전도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평생을 십자가의 길을 걸을 각오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에너지로 영혼구원을 위하여 불신결혼을 일부러라도 한다면 얼마나 고귀한 것이겠습니까?
어차피 우리는 불신자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장에 가도 불신자가 대부분입니다. 전에 제가 다니던 직장에는 한 부서에 30여명이 재직하고 있었는데 믿는 사람은 1,2명 있을까 말까였습니다. 가볍게 전도를 했다가 클레임이 나와 관리자에게 경고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굴하지 않고 전도를 계속했습니다. 직접 전하는 것은 삼가고 갖가지 방법으로 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효과를 가져올지 모르나 저는 일단 복음의 씨앗을 뿌렸으니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신자들과 함께 지내지 말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선교사 본인이 교회에서 성도들만 대하니까 세상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럼 전도고 뭐고 다 피하고 교회사람들하고 편하게 지내야 합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다면 아마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일은 없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인류구원은 물 건너갔을 겁니다.
저는 그렇게 살 생각이 없습니다. 불신자들 속에서 살면서 끊임없이 고난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어떠한 핍박이 오더라도 그들을 버리고 편하게 교우들하고만 지내면서 살 생각은 1도 없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으신 분들을 그렇게 사십시오. 저는 십자가를 짊어질 각오로 불신자들의 영혼의 구원에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많은 전도자들이 그렇게 해서 불신자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우리가 아니라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불신자가 신자로 바뀝니다. 우리는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작 불편함을 견디기 싫으니 분리하여 살라고 하는 것은 어찌보면 불신의 증거일지 모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불신자를 다스릴 능력이 있다고 하면서 피하는 것은 자기모순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는 불신자를 다스릴 권세가 주어졌음을 잊지 맙시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권세와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고 영혼구원의 사명을 다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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