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인 사랑의 실천 ‘누가 내 이웃인가?’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누가복음 10장 29절)
1999년 3월 셋째 주일(3월28) 저는 일본에서 섬기던 교회의 주일 예배(보통 일본의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가 한 번 뿐임)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10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마침 제가 섬기던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교단 총회장으로서 미국으로 1개월간 출장을 가시게 되어 주일 설교를 다른 교회 목사님들이 채우고 있었는데 마침 비어 있는 주일의 설교를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귀국을 앞두고 10년간의 유학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기에 저는 자신의 주제도 모른 채 이 설교를 자원하여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노조미(한국어로 소망)라는 이름의 그 교회는 미국 캠버랜드에 본부를 둔 장로교단(캠버랜드 장로교단)이 일본 선교를 위해 개척하게 된 교회 중 하나입니다. 당시에는 11개의 교회가 일본노회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대부분은 교단과 해당 사역자가 개척한 교회지만 기존의 교회 중에서 편입한 곳도 있었습니다. 우리와 달리 그들은 노회의 영향력이 막강해서 심지어 개교회의 전도사임명도 노회의 승인을 얻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저희 교회에서 전도사 한 명을 청빙하려다가 노회의 승인을 얻지 못해 결국 연수생자격으로 일하게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문제를 일으킨 목회자에 대한 징계로 인해 결국 당사자가 사임하게 된 일도 있었습니다. 대신에 섬길 교회가 없는 사역자에게 최소한의 생계비를 지급하는 등의 보호도 주어지기 때문에 노회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교회주의가 강해 노회나 교단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우리의 개신교회와는 조금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당시 그 교회의 장로였습니다. 우리와 달리 일본 교회의(전체적으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직분은 우리처럼 신분적인 요소가 별로 없고 일꾼이라는 의미가 강했습니다. 서리집사 제도가 없어 집사는 전부 안수집사인 대신에 임기가 있고 신도수(약 50명 정도)에 비해 숫자가 적었습니다. 보통 5,6명 정도였고 대신 장로도 임기가 있고 신도수에 비해 많아 역시 5,6명 정도였습니다. 매월 첫 주에 열리는 제직회의(임원회의라고 함)는 안수집사와 장로가 함께 모여 회의를 하고 당회와 안수집사회의로 나뉘어 세부적인 내용을 토의하였습니다.
제가 장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교회의 이러한 시스템 덕분이라 하겠습니다. 직분은 3년의 임기를 세 번 연임하면 3년은 휴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9+3제도이지요. 다만 안수집사는 휴직에 들어가면 집사라고 불리지 않지만 장로는 휴직기에도 여전히 장로로 불립니다. 실질적으로 한 번 장로가 되면 본인이 사임하지 않는 한평생 장로의 직분이 유지됩니다. 다만 휴직을 하게 되면 제직회의와 당회에 참가할 권리가 없을 뿐입니다.
저의 장로로서의 실제적인 임기는 불과 4개월 정도였지만 (1998년 11월에 임직되어 1999년 4월에 귀국할 때까지)이 설교는 매우 뜻깊은 족적을 교회에 남겼습니다. 제목은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새로운 인류공동체의 건설을 위하여’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인류 공동체’라는 말은 담임 목사이신 아사야마마사하루(朝山正治)목사님이 내거신 교회의 비전이었습니다. 물론 50명 정도의 교회가 그것을 이룰 수는 없겠지만 성도들이 그러한 비전을 가지고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목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이 표어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은 보편적 사랑에 대한 각성을 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유학생활을 시작할 무렵의 저는 보편적 사랑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물론 제가 일본에 유학한 목적은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아마 당시 우리 사회가 갖고 있던 수준보다는 좀 더 높은 보편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엔 우리가 아직 선진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편협한 국수주의적 사고가 지금보다는 팽배해있었고 그러기에 일본에 유학을 가는 것 자체가 그리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왜 쪽발이에게 배우러 가느냐”는 것이 일본유학에 대한 대중의 솔직한 의견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식의 사고에 도전장을 내민 셈인데 그 바탕은 기독교도로서의 보편적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고 하시며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신 것처럼 우리가 일본에 대하여 사랑과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적인 사고가 상당히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편적인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쉽게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아사야마 목사님은 끊임없이 인류 평화와 행복을 이야기했지만 저는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일종의 반감을 느끼곤 하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완전히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분이 전범국 일본의 국민으로서 가질 수 밖에 없는 조금은 무책임한 사고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3년 전에 저는 일본을 방문해서 아사야마 목사님의 자택을 방문했습니다. 저에겐 영적인 스승이신 그분을 만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은 순간적으로 불쾌감을 느끼는 일이 있었습니다. 일본이 우리와 국교를 재개하기 직전인 1870년대 초반 정한론이 일본 정계에서 제기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그토록 쉽게 남의 나라를 침략할 생각을 했을까요?”라고 질문을 했는데 그의 답은 “약하니까 그렇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는 “약한 나라는 침략해도 좋은 겁니까?”라고 반박했습니다. 목사님은 침묵으로 답을 했습니다. 침묵의 의미는 모르지만 저로서는 참으로 불쾌한 추억이었습니다. 그 이전에 일본 사람들과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답을 들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평화주의를 내세웠던 목사님이 왜 이토록 모순된 주장을 하는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보편적 사랑에 대한 각성에 있어서 아사야마 목사님의 영향은 절대적입니다. 만일 그 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저는 제가 가진 사고의 틀을 깨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대학에서 지도를 받은 나카무라마사노리(中村政則)교수님 역시 비슷한 성향을 가진 분이었지만(철저한 좌파)신앙생활을 같이 한 목사님과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두 은사는 저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아무래도 영적인 스승인 아사야마 목사의 영향이 보다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저는 그분과 하나님께 그 점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지요.
저의 마지막 설교는 10년의 유학생활의 경험을 총망라한 것이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본문으로 보편적인 사랑을 테마로 한 이 설교는 저의 오늘날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입으로 시인하여 의에 이른다’고 한 말이 사실을 실감나게 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이 설교는 12월의 당회에서 제 설교가 결정되기 전부터 구상했던 것인데 결정이 내려지자 약 3개월간 면밀하게 준비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해 10월에 이미 박사논문을 제출하고 논문을 심사를 기다리고 있던 저는 저의 생각을 정리할 계기가 필요했고 그것을 이 설교에 전부 쏟아부었습니다. 설교 준비에서 그러한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설교를 함으로써 저는 제 신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입으로 시인함’이 저에게 확신을 준 것이지요.
생각해 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절묘하십니다. 노조미 교회는 조금 특이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요예배를 기도회형식으로 하고 설교를 목사님과 제직이 번갈아 가며 하는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저도 안수집사가 되면서 그것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저에게 신앙의 성장을 가져온 것입니다. 설교는 하는 사람이 먼저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말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저를 성장시키고 귀국후에도 섬기는 교회에서 중고등부를 맡게 되어 2년 유초등부를 맡아 1년 이렇게 3년간 설교를 하게 하셨습니다. 평신도임에도 저는 적어도 200번 이상의 설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설교자는 필연적으로 성장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목회자처럼 직업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감동은 훨씬 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자선을 베풀라 는 것일까요?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차별없는’ 사랑이라는 것이 아닐까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핵심은 자선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 적대적인 대상인 유대인에게 자선을 베푼 것입니다. 자신의 동족에게 그것도 제사장과 레위인이라고 하는 성직자 내지 중직자들에게 외면당해 죽어가는 유대인을 치료하고 돌본 사마리아인의 자선이 이 이야기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웃 사랑’ 저는 예전에 부끄럽지만 이웃을 물리적 이웃으로 착각했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형제자매’가 육신의 형제자 매가 아닌 것처럼(일부 예외를 빼고)예수님의 이웃은 물리적인 이웃인 옆집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이웃이란 나의 가족은 물론 친족 패거리 등이 아닌 타인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남이죠. 성경에서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육신의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는 좁은 의미가 아니라 남을 (자신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미워하지 말라는 넓은 의미인것처럼 이웃도 마찬가지로 남을 의미(이 경우는 자신의 범위가 좀 더 넓습니다)합니다.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은 사람은 아마도 좁은 의미의 이웃을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는 아마 유대인전체까지는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류 전체로 그 범위를 넓히셨습니다. 더구나 그것은 유대인에게는 원수라 할 사마리아인들까지 포함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의 실사판이라고 해야 할까요? 원수를 사랑한다면 원수가 아닌 사람이야 남이라고 해도 당연히 사랑해야 하겠지요? 그러니 이 비유는 인류애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가르침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그것은 인류애가 아직 세상에 보편화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과거에 비하면 사람들은 공동체적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국제연합이 생기고 각종 기구가 활동하면서 전쟁을 억제하고 있으며 올림픽 대회는 그러한 인류공동체로서의 결속력을 확인하는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인류보다는 민족이나 국가 심지어 자기들이 속한 집단의 수준에서 사고하기 쉽습니다.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인류는 끔찍한 전쟁에 대한 반성으로 보편주의를 보다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지만 점차 민족주의의 함정에 다시 돌아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마치 ‘개가 자신이 토한 곳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지요.
한일관계 역시 그런 상태입니다. 한 때 ‘김대중 오부찌 선언’으로 화해무드로 들어간 한일관계는 결국 역사 왜곡문제와 징용 위안부 피해자 문제로 다시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 그들을 용서할 수 없는 한국 누가 더 큰 책임인지 모르지만 이 역시 보편적 사랑보다는 편협한 사랑이 앞서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으르렁대는 것처럼 우리도 과거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과거가 아니라 바로 보편적인 사랑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를 통해 우리의 인식전환을 촉구했습니다. 21세기에는 (당시는 20세기의 거의 마지막 시기였죠)민족이나 국가가 아니라 인류를 단위로 생각하는 혁신을 통해 보편적 사랑을 키워 ‘인류공동체’를 건설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금은 하나가 된 전라도와 경상도가 과거에는 백제와 신라 가야 라는 세 나라였습니다. 당연히 서로 싸우며 살았지만 오늘날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인류는 그렇게 하나로 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 왔습니다. 유럽이 EU를 결성한 것은 민족국가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실현시킨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그러한 시도는 가능할 것입니다. 동아시아라면 EAU(East Asian Union)가 되겠지요. 그렇게 결성된 지역공동체가 하나가 된다면 바로 지구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보편적 사랑을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미래를 위한 첫 걸음은 바로 인식의 전환입니다. 신라와 고구려 백제의 후예가 한민족국가인 고려와 조선의 국민으로 살아와 공동체를 결성한 것처럼 일본과 우리가 또한 중국이 하나가 되어 일체감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유럽은 그것을 먼저 실현시킨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식의 전환입니다. 우리의 경우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감정이 아직도 건재하지만 과거에 비해 많이 약화된 것이 사실입니다. 투표에서 그것은 확연히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인식의 전환은 시간이 걸리지만 분명 가능합니다. 영국의 경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에 지역감정이 우리보다 훨씬 더 심합니다. 그런 그들도 유럽공동체를 만드는데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지요.
과거에 우리는 거대한 제국을 몇 개 경험했습니다. 로마제국 중화제국 인도제국 등은 아마도 대표적인 제국일 겁니다. 특히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하던 몽골의 제국은 전 지구 육지의 1/6을 지배했고 비슷한 크기로 20세기에 존재했던 소련과 비교해 훨씬 다양한 문화를 포괄했습니다. 그러한 제국들은 힘의 의한 지배를 전제로 하기에 환영받지 못했지만 미래의 제국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합의를 통해 성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국의 경험이 미래의 인류공동체 성립에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인류공동체라는 보다 원대한 꿈을 위해 우리 사회부터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졸저 ‘넘치는 사랑 불행한 대한민국’에서 저는 ‘모두의 사랑’ ‘우리만의 사랑’을 구분하여 양자의 공존을 주장했습니다. 가족 친구 연인 과 같이 가까운 사이의 사랑인 ‘우리만의 사랑’은 개인의 생존을 좀 더 확실하게 해주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사랑이 지켜줄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모두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의 아픔을 돌보아 준 것은 바로 그러한 사랑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우리’가 전부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두’에게 우리의 사랑을 펼치도록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것을 위한 말씀이지요.
21세기 대한민국은 역행하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으나 지금은 그러한 마음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어려워진 사람을 돕는 것을 비난하는 인터넷 댓글은 저를 우울하게 만들죠. 왜 그렇게 변했습니까? 그것은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가진 병폐일까요? 아닙니다. 유럽이 하나 된 것을 보십시오. 우리보다 훨씬 풍요로운 유럽도 되는 것을 우리는 왜 못합니까?
저는 부흥이라는 찬양을 너무 좋아했지만 요즘 들어 이 노래를 부쩍 자주 찾습니다. ‘이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요’로 시작되는 부흥의 가사는 저의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큰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패거리만 사랑하는 죄입니다. 우리는 강도를 만나 린치를 당하고 쓰러져 신음하는 유대인을 외면하는 동료 유대인과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난 몰라’하며. 저에겐 그렇게 보입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라고 합니다. 무너진 기초 그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믿음의 기초입니다. 우리가 ‘모두의 사랑’을 잊은 것은 바로 ‘믿음의 기초’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믿음이 없이 이루어지면 정욕이 됩니다. 믿음이 없는 인간은 정욕을 넘어선 사랑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모릅니다. 왜냐고요? 공부 못하는 학생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를 때가 많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으니 자신이 하는 사랑이 정욕임을 모릅니다. 정욕이 뭔가요? 보편성을 잃은 사랑입니다. 욕구가 앞선 사랑입니다. 사랑은 넘치지만 정욕적 수준의 사랑만 넘치니 대한민국은 불행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동의하십니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우리는 우상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이웃을 사랑할 여유가 또 마음이 없습니다. 돈 쾌락 즐거움 재미 편함 등이 우리의 삶을 중심이 되어 버렸으니 진리의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교회에서의 기도는 축복에 대한 간구로 가득차 있어 우리의 사명을 자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축복의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즐거움 쾌락 재미 편함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우리만’ 누리자는 것이죠. 소외된 이웃에 대한 생각은 그저 연말연시의 구세군 모금함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이벤트성 사고에 불과합니다. 평소에는 우상을 섬기며 행복한 삶을 살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진리가 은혜가 되살아나는 부흥이 일어날 때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 하신 사랑 ’모두의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었던 것들을 회복해야 이 땅에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회복됨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 날 주소서! 오 주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새 날 주의 나라는 무엇일까요? 기독교 신자를 늘리는 것일까요?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우상과 죄악에 가득한 채 형식적인 믿음만 가진 신자가 늘어난다고 과연 이 땅에 새날이 오며 주의 나라가 임할까요? 결코 아닙니다. 바로 성령의 역사로 진리가 은혜가 되살아나 보편적인 사랑이 실천될 때 그것은 실현될 것입니다.
언제까지 내 가족 내 애인 내 형제 내 친구 내 패거리 내 자식만을 사랑하고 지낼 것입니까? 놀라운 것은 우리의 사랑의 범위는 날로 좁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갓 태어난 손녀가 자신의 엄마의 젖을 빨고 있자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가 ’저것이 내 딸의 영양을 빼앗아 먹는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물론 극소수의 경우라고 믿고 싶지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마치 우리들의 현재의 ‘우리만의 사랑’의 현주소를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저와 우리 모두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웃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위한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음으로써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육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 천국도 벼락치기로 갈 수 있나요? (0) | 2022.02.07 |
---|---|
하나님의 계획을 믿어라 ‘다른 계획’ (0) | 2022.02.04 |
주의 음성 듣기 비법 ‘안개를 헤치고’ (0) | 2022.02.02 |
참다운 믿음 ‘과거, 현재, 미래’ (0) | 2022.01.27 |
내면의 청소가 필요해 ‘깊은 탐색’ (0) | 2022.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