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내면의 청소가 필요해 ‘깊은 탐색’

닥터 양 2022. 1. 26. 15:05

내면의 청소가 필요해 깊은 탐색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편 13923-24)

 

  내겐 한 가지 좋지 않은 습관이 있습니다. 습관이라기보다는 부주의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재미 삼아 사람들이 불편할 수 있는 이야기나 농담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분위기를 좋게 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때론 분위기를 나쁘게 하거나 상대를 불쾌하게 만드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때마다 반성을 하기는 하지만 때때로 그것을 잊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결코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로 인해 상대는 물론 제 자신도 피해를 입는 경우가 있으니 문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혀를 제어하는 자가 온 몸을 제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혀는 생명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권세를 가진 것입니다. 제 자신이 남의 말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남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설화를 가져오는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저에겐 좋은 성격이지만 남에게는 피해를 줄 수 있으니 고쳐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제가 기준이 매우 낮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저의 기준을 적용시킬 경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것 때문에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심지어 해고의 빌미를 제공한 적도 있습니다. 요즘엔 그러한 문제를 그저 실수나 부주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범죄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기에 자칫 처벌을 받을 우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계속 실수를 했고 결국 자신이 애착을 가지고 있던 직장에서 해고되는 (물론 그것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영향을 주었어요)피해를 스스로 자초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과연 그것이 그저 실수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내면에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게 하도록 하는 잘못된 생각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일본생활을 10년 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본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인 면도 있기에 어쩌면 그것이 설화를 불러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우리보다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그곳에서 지낸 10년은 저로 하여금 보다 개방적인 생각을 하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을 귀국하고 버리기 어려웠고 아무리 합리적인 생각이라도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교훈에 따라 감추거나 버려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생각이 변해야 문제가 해결 될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얼마 전 대학 동창에게 저는 비슷한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거의 40년 만에 만난 동창인데 그와 카카오톡을 하다가 농담을 할 생각으로 한 말이 문제였습니다. 나중에 그 톡의 내용을 읽고 저 자신도 경악했습니다. ’아니 내가 이런 글을 보낸 거야? 믿어지지 않아!‘ 제가 이 정도로 생각을 했다면 상대는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도저히 옮기지조차 어려운 끔찍한 내용이었습니다. 술집에서 술 마시며 하면 좋을 정도의 불건전한 농담이었어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상황을 알고 있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될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술도 안 마시고 잘도 이런 글을 보냈다솔직한 제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내용이 너무 좋지 않아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전화나 톡으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준 명함의 주소를 따라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손에는 도너츠를 한 다발 사들고. 가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도중에 저는 맥도널드에 들려 쉬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했습니다. 과연 그가 받아줄까? 자신이 없었습니다. 손이 떨리고 혀가 바짝바짝 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끔 이런 일로 문제를 일으킨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야. 나의 잘못된 생각이 가져온 것이야. 결국 내 내부의 죄성이 불러온 참화라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때 떠오른 것은 바로 회개였습니다. 주님이 제게 회개를 재촉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읽고 들은 간증을 종합해 보면 믿는 자에겐 자신의 삶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요구받는 시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18시간이나 회개를 해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런 과정이 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뭐 큰 죄를 지었다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과정을 생략하신 게 아닐까?‘ 저는 이렇게 저를 합리화시켰습니다. 그때만해도 저는 제 자신이 큰 과오없이 살았다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만이나 위선이었습니다. 저는 이 일로 회개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이 들었습니다.

  맥도널드 구석에서 저는 회개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제법 많은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중에는 범죄에 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눈물이 쏟아지게 되었습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더러운 인간이었나?‘라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죄가 떠올랐습니다. 거짓말 사기 음란 미움 적대감 등등...가슴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일들이 떠오르자 그만 통곡에 가까운 울움이 터졌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좌절감이 밀려 왔죠.

  하지만 곧 감사의 기도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많이 사랑하시는구나라며.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저는 영원히 회개를 하지 않고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지 모릅니다. 심지어 구원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로부터 저는 매일 드리는 기도에서 회개를 꼭 하게 되었습니다.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회개를 드리는 것도 저의 새로운 습관이 되었습니다. 자칭 의인은 사실은 붉은 죄로 가득찬 위선자였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필자는 남편의 의자 쿠션 아래 숨겨진 갖가지 물건들을 발견하고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죄악과 감정의 부스러기를 떠올렸습니다. 남편의 말 한마디에 그곳을 뒤지면서 발견된 잡동사니처럼 자신의 내면에도 그러한 것들이 숨겨져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시편기자의 간구처럼 하나님께서자신으로 하여금 그러한 내면의 죄악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전에 장롱 밑을 뒤지면 돈이나 과자 갖종 물건들이 나타나 횡재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렇게 우리 내면에는 숨기고 싶은 죄악과 감정의 부스러기가 잔뜩 쌓여 있을지 모릅니다.

  언젠가 그것을 드러내고 처분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남에 의해 드러나면 더 큰 아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스스로 꺼내서 처리하시면 조금은 나을지 모릅니다.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도록 합시다. 심판의 날에 우리는 낱낱이 죄가 드러나고 그로 인해 정죄를 받아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백하고 죄를 용서받으면 그 죄는 눈같이 희어지기 때문에 죄악을 기록한 책에서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를 회개하는 것을 게을리하거나 뒤로 미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큰 죄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큰 죄가 처음부터 큰 죄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깨진 창문이야기처럼 작은 잘못을 그대로 방치하게 될 때 그것이 큰 잘못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죠. ’뭐 이런 것가지고 그래. 다 그런 거지라며 덮어버린 것이 엄청난 잘못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것이 진리임을 우리는 부인하기 어렵죠?

  생각해 보면 큰 죄의 뿌리는 악을 허용하고 합리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누군가는 큰 죄를 짓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까요? 아마도 용기가 없거나 그럴 기회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터넷 댓글을 보면 가끔 섬뜻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를 비난하지만 그것이 결코 악에 대한 정죄가 아니라 자신들이 그러한 방법으로 이익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상실감에서 비롯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못했으니 화가 난다는 거죠. 예전에 가출 청소년들 문제에 매달릴 때의 일입니다. 가출한 아이들을 허가 없이 보호하거나 재워주면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자기 친구를 재워준 사 람을 고발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지요. 물론 그녀가 정의감에 불타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이유를 묻자? ”제가 그 집에서 잘 수 없으니 화가 나서 그랬어요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친구에게 편히 잘 집이 생겼지만 자신에게 그럴 기회가 없기에 심술이 나서 신고를 했다는 것이죠. 엄청나게 놀랐습니다. 어차피 자기가 그 혜택(?)을 대신 받는 것도 아닌데. 하긴 어떤 여대생은 수업시간에 친구가 장학금을 받으면 화가 나요라고 말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모두가 심술에 가득차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결국 인간은 누구나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본성이 숨겨져 있다고 해도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본성을 스스로 드러내고 이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해야 죄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숨겨두거나 스스로를 속이면서 부정하는 것은 죄를 덮어둘 수 있어도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당장의 아픔을 피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 아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회개의 과정을 거치셨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기도하십시오. 사실은 저도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다른 사람들은 회개를 철저히 하는 과정을 거쳤는데 왜 저는 그게 없나요? 벌써 수십 년째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설마 저를 그들보다 덜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그렇다면 제게도 그것을 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지만 저는 그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저를 회개로 이끄셨습니다. 아울러 저의 약점이었던 것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참교육을 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녀를 버리시지도 방치하시지도 않으신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죄에 대한 경각심과 그에 따른 회개를 통해 삶을 바꾸어 가는 과정을 이어감으로써 보다 완전한 새사람을 입을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