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하나님이 일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충분하다’

닥터 양 2022. 1. 23. 22:36

하나님이 일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충분하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 후서 129)

 

  예수님께 어느 청년이 찾아 왔습니다. 그는 돈이 많은 관원이었죠. 돈도 많은데 관원이니 권력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할 수 있습니다. 돈과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으니 아쉬울 것이 없는 청년입니다. 게다가 그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은 율법을 충실하게 지켜 예수님께서 물으신 죄악을 범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모든 게 완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뜻 밖의 제안을 합니다. “네가 한 가지가 부족하구나. 너의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이렇게. 예수님의 생애를 그린 복음서나 바울 서간집을 통틀어도 이런 제안을 했던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무소유를 이룬 후에 따르라는 것인데 왜 이런 제안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과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왔으니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지요?”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답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자는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한두 번은 들어볼 법한 이야기이지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은 아마 많은 재산 때문에 올바른 삶을 살기가 어렵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예전에 본 드라마에서 어느 여성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 남편이 돈이 없으니 그렇지 돈 있어봐 바람 피울거야. 다 그렇잖아 남자들은.” 어렸을 때라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자신이 어른이 되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돈이 많은 남자에게 가장 큰 유혹은 바로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여자에겐 아마 사치와 낭비일 것입니다. 어느 쪽이 든 천국에 가는 것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람을 피운다는 것은 간음이니 당연히 안 될 것이고 사치와 낭비를 한다면 역시 바람직한 삶을 살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단지 그가 부자이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게 사실이라면 예수님께서는 만나는 부자들마다 그런 이야기를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했다는 기록은 여기 뿐입니다. 적어도 성경에는. 예를 들어 삭개오를 만나 그의 집에 유하신다고 하자 삭개오가 자신의 재산을 절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눈다고 하였을 때 구원이 이 집에 있으니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칭찬하셨지만 재산을 다 팔아 나를 따르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미 절반이나 팔았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부자인 그에게 더 이상의 요구를 하시지 않은 것이지요. 그것은 그정도 성의를 보였으니 됬다는 것일까요?

  저는 부자 관원과 삭개오의 태도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자 관원에게는 진심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려는 마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에겐 속된 말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자기의 의로 가득차 있는인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에 비해 삭개오는 자신의 죄를 뼛 속 깊숙이 깨닫고 스스로를 낮춘 사람입니다. “세리와 창녀가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을 몸소 보여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부자관원은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고 기도한 바리새인과 같은 오만함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낮아질 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 저는 제가 알아서 잘 살거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저는 완벽합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공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의 생각은 올바른 판단일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인간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있습니까? 그는 다만 자신의 죄를 부족함을 모르는 무지한 죄인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겸손이 없는 것입니다.

  세계 4대 성인 중 하나인 소크라테스의 위대성이 무엇이지 아십니까? 그는 네 자신을 알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최초로 한 말은 아니고 원래 있던 말을 그가 잘 활용했다고 합니다. 그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무지의 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기도교의 자기부인에 해당됩니다. 소크라테스가 기독교도는 아니지만(시기상 기도교도가 될 수 없지요. 예수님보다 수 백년 먼저 태어났으니)그는 철저히 자신을 낮춤으로써 오히려 성인이 된 사람입니다.

  ‘무지의 지가 없는 사람은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지를 가졌기에 끊임없이 지혜를 구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는 이른바 소피스트라는 지식인들을 찾아다니며 도장깨기를 하였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질문을 하여 상대가 결국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무지의 지의 가치를 몸소 보여준 것이죠.

  부자관원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기는 하지만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그에게 일종의 도전장을 내밀어 버린 것이죠. 결국 부자 관원은 자신이 얼마나 위선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슬픈 얼굴로 떠났다는 것은 결국 그의 의로움이 가진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재산이 많음으로라는 설명은 그가 재산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라는 한계를 여실히 폭로한 것이고 그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 스스로 무너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부끄러움을 느끼고 갔으니 희망이 아주 없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삭개오와 비슷한 인물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발을 씻긴 여인입니다. 삭개오가 세리라면 그녀는 창녀였습니다. 물질과 성이라는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에서 큰 죄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지요. 그녀의 행위를 보고 예수님은 집주인인 시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 중 누가 그것을 탕감받았을 때 누가 더 채권자를 사랑하겠느냐고 묻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지요. 당연히 더 큰 액수를 탕감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그의 형보다 더 사랑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여 자기 부인을 이루고 회개하는 죄인이 진정한 의인이라고 할 수 있음을 이 이야기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앞에 선자가 뒤지고 뒤에 있던 자가 앞 선다는 것이 이래서 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안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여러 번 기도했으나 돌아온 답은 네 은혜가 족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에 대하여 약한 것이 자랑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부자관원처럼 저는 완전한데요 혹시 뭐 필요한 것이 더 있을까요?”라는 태도를 보인 사람에게 주님은 역사하시지 않으며 약함으로 인해 전적으로 매달려 의지하면서 모든 것을 주께 맡기며 절대 순종할 때 주님은 역사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나는 매일 죽노라하며 철두철미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살아간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자신이 모르는 교만의 씨앗은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약함을 요구하셨습니다. “네 은혜가 족하다고 하신 것은 그에게 약함을 주시고자 하는 주님의 뜻을 표현한 것이겠지요.

  예전에 경험한 것을 조금 말씀 드리지요. 제가 기도응답을 한참 잘 받던 시절 저에겐 바울처럼 가시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 때문에 더 많이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비교적 약해져 삶이 평탄해지면 기도에 소홀히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악화되면 필사적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나중에 깨닫게 되었죠. 주님이 기도하게 하려고 그 가시를 빼주지 않으셨음을 말입니다.

  지금은 그 가시가 사라졌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왜 그럴까요? 제 생각은 제게 더 큰 사명을 느끼게 하셨기에 그런 가시는 더 이상 필요 없어졌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은 아닐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명을 위해 기도하기에도 바쁜데 그런 문제로 기도하는 것은 이미 제게는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죠.초등학생 때 고민이 대학생이 되면 문제가 아닌 것처럼. 여러분은 제 생각에 동의하시는지요.

  여러분에게도 가시가 있습니까? 그것이 좀처럼 빠지지 않아- 열심히 기도했지만- 고통스러우십니까? 그렇다면 그 가시가 자신을 교만에 빠뜨리지 않고 더 기도하고 더 은혜를 간구하는 이유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가시는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여 기도할 마음이 약해진다면 그것이 오히려 재앙의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약함이 주님이 강함이 되는 것이 우리에겐 더 큰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과거에 모든 것이 너무나 순조로웠을 때 여러 번 실족한 아픈 기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것이 어쩌면 가장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때일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소설 햄릿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햄릿 왕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까지 차지한 숙부이자 현재의 왕을 살해하고자 기회를 엿봅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왕을 살해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왕이 회개의 기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자를 살해한다면 아마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이야. 결코 그렇게는 안 되지. 저자가 죄악에 빠져 있을 때를 노릴 것이다. 그래야 지옥에 보낼 수 있으니라고 햄릿 왕자는 말합니다.

  사탄은 어쩌면 우리가 가장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을 틈타 우리를 타락의 길로 걷게 할지 모릅니다. 햄릿 왕자처럼.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가시가 있음을 주님께 감사합시다. 주님이 역사하실 수 있음을 그렇기에 우리가 더 강해질 수 있음을 감사합시다.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시를 남겨 주신 주님께 감사함으로써 우리의 약함이 강함이 될 수 있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