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만남이 갖는 가치 ‘사랑하고 웃도록’

닥터 양 2022. 1. 22. 16:32

만남이 갖는 가치 사랑하고 웃도록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한복음 410)

 

  저는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거의 불신자가 되었습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학문에 맛을 알게 된 저는 종교가 점점 매력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 하는 종교보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를 가지고 진리를 논하는 학문이 훨씬 더 가치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기독교가 말하는 대속의 원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불합리해 보였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서 죄를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인류가 죄를 용서받게 되었다는 말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야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이러한 주장에 100% 납득이 가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예수께서 대속해 주셔서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다면 왜 그걸 믿어야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흔히들 이것을 노예를 돈 주고 샀다고 비유하는데 돈을 주고 노예를 사서 자유롭게 했다면 노예 자신이 그것을 믿고 안 믿고에 따라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대속으로 자유가 된 뒤에도 왜 여전히 마귀들의 노예로 살고 있는지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피 값으로 사셨으면 바로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 외에도 많은 의문이 있지만 이 정도만 말씀드리죠.

  물론 지금은 대속의 원리를 어느 정도 믿게 되었습니다. 우선 허다한 증거가 존재하기 때문에 부인할 길이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본 사람들의 증언을 죄다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들이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개중에는 기독교라면 이를 갈 정도로 싫어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무슨 이익을 있다고 천국과 지옥을 증언할까요? 게다가 대속의 원리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이해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위에서 말하는 노예를 돈 주고 샀다는 식의 논리와 다른 이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교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 때문이라기보다는 저를 이끄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끊임없는 기도 응답같은 체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싷 저는 과거에 끊임없이 기독교를 부인하고자 애쓰면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또 믿음이 있으면 천국에 간다는 주장이 너무나 불합리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에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지옥가야 하나? 예수님 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나? 이순신장군도 세종대왕도 단지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지옥가야 하나 하지만 그 분들은 예수를 믿을 기회도 없었는데? 이슬람지역에서 태어나 예수를 접할 기회도 없는 사람들은 모두 지옥가야 하는데 그건 좀 불공평하지 않은가?

  제가 여호와의 증인에 잠시나마 머물렸던 것은 이러한 의문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을 기회가 없던 사람들은 제1차 부활에서 기회가 주어집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럼 제가 고민하던 문제가 해결될 테니까. 이순신 장군도 세종대왕도 그렇게 부활해서 예수를 믿을 기회를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이야말로 참된 진리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어 2년 정도 그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문제를 느끼게 되고 결국 저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수혈과 병역문제 그중에서 수혈문제가 저에게는 역시 불합리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병역을 거부하는 것도 비현실성은 있지만 이상적인 가르침이라고 해서 납득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한 것에 대하여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전쟁입니다. 그러니 허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벌이는 전쟁이 여호와의 뜻에 따른 것일까요?”라고 했습니다. 듣고 보니 그럴 듯 했습니다. ‘아하!“ 저는 오히려 그런 질문을 한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수혈에 대하여는 끝내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피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럼 피를 주사로 찔러 넣으면 괜찮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지만 피와 술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술은 몸에 좋지 않은 유해성분이지만 피는 다릅니다. 그리고 피를 먹지 말라는 해당 구절은 피의 제사가 갖는 의미에 바탕한 것이지 피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피를 마시지 말라는 것은 위생적인 면도 고려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과 달리 공중위생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에 피를 마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피를 생으로 마시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겠지요?

  기독교에 대한 의문과 반감 때문에 이단은 물론 각종 종교를 섭렵하며 진리를 찾았지만 결국엔 기독교가 답이다 라는 생각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기독교로 유턴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물론 유학 시절 경험한 기도 응답의 체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직접적 계기였지 다는 아닙니다. 저는 이미 기독교를 다시 믿고 싶은 마음이 어느 정도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었고 체험은 그것을 확고하게 한 것 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요? 제목처럼 가치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오늘의 필자는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인해 일어난 그녀의 내면의 변화를 이야기 했지만 저에겐 그 대상이 목사님이었습니다. 국비유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방을 얻은 곳 근처에 하필 교회가 있는 게 아닙니까? 당시 제가 살던 도시는 인구 7만의 소도시였는데 교회라고는 딱 4곳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 바로 근처에서 방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저는 지금도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모태신앙이던 아내는 교회에 가자고 졸랐고 저는 일본사람들과 친구가 될 생각으로 동의했습니다. 처음 갈 때는 조금 긴장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사람을 차별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차별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차별은 전혀 없었고 도리어 너무나도 뜨거운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교회에서 저는 10년간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결국 잃었던 신앙을 찾을 것은 물론 엄청난 믿음의 성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신앙의 불모지라는 일본 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참으로 놀랍죠. 물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저의 사례에서도 실감할 수 있을 겁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아무리 형식적이라 하여도 중요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다는 말이 있지요? 하지만 경건의 모양이 있어야 능력도 따라오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시간 때우려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다고 해도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공부를 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에게 죄짓는 방법이 아니라면 전도를 해서 교회에 불신자들을 끌고 와서 앉혀야 합니다.

 예전에 어느 교회에서는 여성청년들의 사진을 일괄적으로 게재하고 '우리 교회에 오시면 이렇게 예쁜 여성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라는 전도지를 만들어 배포하다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무슨 술집 광고도 아니고 여성을 상품화하는내용이라고. 물론 제가 생각해도 상식에 어긋나고 신앙적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동의한 자매들의 믿음이 아름답고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전도를 하려고 했던 열정만큼은 평가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전도를 위해 술과 담배를 사주는 경우도 있으니 무엇이 올바른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예전에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술을 좋아하는 저에게 술을 사준다고 하길래 교회 갔다가 은혜받고 목사가 되었습니다."라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으니 주님의 역사는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만큼 우리는 "강권적으로라도 내 자리를 채워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우리는 소중히 여기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처음부터 은혜가 충만하여 교회를 찾는 사람은 적어도 새신자들 중에는 매우 적을 것이기 때문에 일단 경건의 모양을 갖추도록 하게 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능력도 채워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멘!

  저도 그렇게 해서 모양만 갖추고 다니다가 어느 날부터 능력도 갖추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기 까지는 그 교회 담임목사님의 역할이 매우 컸던 것 같습니다. 교회가 50명 정도의 소규모라 전도사도 부목사도 없었고 다만 가끔씩 신학생이 견습생이라는 자격으로 전도사의 역할을 하곤 했습니다. 담임목사님의 영향으로 저는 차츰 기독교에 대한 반발심을 잠재워 갈 수 있었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목사님의 이름은 아사야마 마사하루(朝山正治)‘ 젊어서 미국에서 2년간 유학을 한 경험도 있는 해외파였으며 중고등학교와 대학교가 미션스쿨이라 기독교 신자가 되신 분이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영어 실력이 뛰어나 대학의 영어교수로 발탁되었으나 이를 박차고 나와 신학교에 진학하였다고 합니다. 목사이면서 철학자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여 저와는 이야기가 잘 통했습니다. 그러한 점이 저로 하여금 기독교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게 하였습니다. ’지성적 기독교라고 해야 할까요?

  아사야마 목사님의 설교는 매우 지적인 것이었습니다. 마치 한 편의 철학 에세이를 읽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종교성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핵심은 철학과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이 분이 철학자가 되려고 목사가 되셨나라고 생각하게 할 정도였다고 짐작이 가시겠습니까? 물론 처음에는 위화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신비주의에 저항감이 있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으셔서 자주 그것을 언급하셨지요. 마치 운동권 출신이 목사가 된 것 같다는 느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위화감 대신 친금감이 늘어갔습니다. 기독교가 결코 반지성적인 종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결국 저를 지성적으로 기독교와 연결시켜 주신 분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일본기독교의 특징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와 달리 일본기독교는 엘리트의 종교였고 그래서 지성적인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아사야마 목사님은 그런 일본 기독교의 특징을 누구보다도 잘 보여주는 분이었기에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분은 참으로 많은 명언을 쏟아내셨습니다. ‘형태는 목적에 따라 결정된다“ ”국제주의라는 의미의 인터네셔널이 아니라 개인간의 교류를 강조하는 인터퍼스털리즘이 필요하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가슴이 벅차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분을 통해 보편성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고 (엄밀히 말하면 그 불씨를 되살린 셈이죠. 원래 그런 열망이 있었는데 한동안 잊고 살았습니다)그것은 보편적 진리로서의 기독교라는 형태로 저에게 기독교에 대한 믿음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 바탕을 가지고 경험한 기도 응답과 신비한 체험은 저로 하여금 보다 완전한 신앙을 가지도록 하였습니다. 제 말대로 된 셈입니다. 아사야마 목사님은 저에게 경건의 모양을 가질 수 있게 했고 그것은 경건의 능력을 맞아들일 준비였던 것이죠. 만일 그 분이 저에게 경건의 모양을 갖도록 하지 않았다면 경건의 능력을 가질 기회조차 갖지 못했을테니까요. 결국 목사님은 저를 하나님에게 다가서도록 하는 중매쟁이가 된 셈입니다. 지성적 기독교를 거쳐 신비적 기독교으로 가게 함으로써 저의 신앙체계를 완성하게 한 셈입니다.

  수가성의 여인은 자기 지역의 사람들에게 아사야마 목사님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저도 그랬지만 수가성 사람들도 나중에는 이제는 당신이 없어도 된다는 말을 할 정도로 예수님과 직접 교류를 하게 됩니다. 저도 아사야마 목사님의 매개 없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가성 여인도 아사야마 목사도 저와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주선해 준 천사와 같은 분이 있었습니까? 단지 전도를 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제대로 갖기 어려웠던 자신을 하나님 곁으로 이끌어준 분이 있었습니까? 물론 그분 역시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분에게도 여러분은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에게 그 마을 사람들에게 또 아사야마 목사님이 저에게 한 매개자로서의 역할이 매우 소중했던 것처럼 그분의 역할 역시 매우 소중하니까요.

  믿는 자들에게 가장 크고 소중한 만남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명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인생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깡패가 도둑이 사기꾼이 술주정뱅이가 하루 아침에 착하고 순한 사람이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내면의 상처로 고통받던 영혼이 회생되는 기적도 간증의 단골 메뉴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하나님께 다가가도록 한 매개자들과의 만남도 그에 버금가는 소중한 만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의 성장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하나 알려 드리죠.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실 분들을 자꾸 만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요? 간단합니다. 신앙이 자신보다 좋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배우는 것입니다. 신앙서적으로 강연이나 세미나 부흥회 각종 영상설교 등이 그러한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학생이 공부를 잘하려면 주어지는 것만 소화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자기주도학습을 전개해야 성적이 비약적으로 오르죠.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교회에서 주는 영의 양식으로 만족하지 말고 보다 높은 수준의 신앙적 만남을 구하십시오. 학생이 배움에 대한 갈급함이 있어야 우등생이 되는 것처럼 신앙에 대한 갈급함이 있어야 신앙도 성장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갈급함으로 보다 높은 수준의 신앙적 만남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