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마음의 선물’
그러므로 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간ㅌ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 18장 4절)
‘애틀란티스의 소녀’
저 먼 바다 끝엔 뭐가 있을까 다른 무언가 세상과는 먼 얘기
구름위로 올라가면 보일까 천사와 나팔부는 아이들
숲속 어디엔가 귀를 대보면 오직 내게만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
꿈을 꾸는 듯이 날아가볼까 저기 높은 곳 아무도 없는 세계
그렇게도 많던 질문과 풀리지 못한 나의 수많은 얘기가 돌아보고 서면
언제부턴가 나도 몰래 잊고있던 나만의 비밀
(이제 정말) 왜 이래 나 이제 커버린 걸까 (이제 정말) 뭔가 잃어버린 기억
(지금 내맘)이젠 나의 그 작은 소망과 꿈을 잃지 않기를 저 하늘속에 속삭일래 오예
(이하 생략) (보아 ‘애틀란티스의 소녀’에서)
우리는 가끔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그때와는 너무나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물론 성숙해진 자신의 모습에 뿌듯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것이 다일까요?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만 느낀 다면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정말 훌륭하게 성장했거나 큰 착각에 빠진 상태이거나. 그도 아니면 아예 개념을 말아드신 분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 모습에서 자괴감을 느낄 것입니다. ‘이러려고 대통령이 되었는지“라고 말씀 하신 분처럼 우리도 ’이러려고 어른이 되었는지‘라는 생각에 서글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요.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는 의문을 가져보지만 그에 대한 답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나이 들면 다 그렇지‘ ’그게 인생 아냐?‘라는 자기합리화를 방어기제삼아 상처받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어쩌면 우리어른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합니다.
‘키가 자라는 것처럼 지혜도 자라‘ 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키가 자라면서 우리의 지혜도 자라는 것은 기쁜 일이지요. 하지만 그에 따라 교활함과 영악함도 함께 자란다는 것 또한 알고 있을 겁니다. 아이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본능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러한 독소를 함께 배우게 되지요. 그것이 하나 둘 몸에 배면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갈림길을 걸아가게 됩니다. 새 사람을 덧입어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하는 몸부림을 삶을 살아갈 수도 그냥 걸어온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살람들은 그대로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삶을 합리화시켜온 사람들에게는 그조차 얼마든지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양심에 화인 맞이’버린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만일 신실한 크리스천이라면 그것은 절대 피해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셨습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바로 거듭남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으니라“고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과거 어린 시절에 가졌던 순수함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해서 ’어린아이와 같이 낮추는”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함”이라는 말씀도 결국은 같은 가르침입니다.
어린 아이는 아무런 때가 묻지 않아 맑고 투명한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로 되돌아 갈 때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의 법칙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여 자기 부인을 통해 진리에 더 가까워지려고 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자기를 부인할 때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거듭남이란 ‘선해짐’도 ‘착해짐’도 아니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죠.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것이 쌓여 자아를 형성하게 되면 그것에 반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집니다. 자신의 상식과 지식에 사로잡혀 그것을 거부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들을 귀’가 없어지기 때문에 마음이 옥토밭이 아니라 돌밭이 되어 염매 맺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굳게 되어 버린 마음 밭은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맺더라도 보잘 것 없습니다.
‘애틀란티스의 소녀’에는 그러한 모습에 대한 자괴감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던 질문” “그렇게 많던 이야기”들이 사라지고 만 자신에게 “나 이제 커버린 걸까?”라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진리에 대한 호기심도 탐구심도 잃고 적당히 하루하루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살아가는 무기력한 자신을 탓하며 전설의 대륙 애틀란티스 대륙에 대한 향수를 표현합니다. ‘나의 삶은 이제 끝난 것일까?’라는 슬픈 결론이 엿보입니다. 여러분의 삶도 이렇습니까?
예수님을 찾아가 말씀을 구한 니고데모는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당황합니다. 그는 거듭남을 육체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생각하여 “어떻게 그런 일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도 어른이 되어 살아왔으니까 세상 지식으로 가득차 있어 쉽게 그러한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어린 아이라면 “예수님!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물었을지 모릅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불가능이 없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없으니 들은 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른들에게는 희망이 없나요? 어차피 거듭남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듭남을 통해 크리스천으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종교가 그렇지만 기독교는 변화를 가져오는 종교이고 그것은 개량이나 개선이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건물이 문제가 생겼을 때 여기저기를 뜯어 고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신축을 하는 수준으로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고치는 것이 새로 짓는 것보다 힘들 수도 있습니다. 특히 문제가 심각할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이래 죽음에 이르는 죄를 짓는 죄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니‘ ’죄의 대가는 죽음이요 죽은 뒤에는 심판이 기다린다‘는 기독교의 메시지는 이러한 죄인의 삶이 가져올 죽음과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개량이나 개선으로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거듭나기‘를 말씀하시며 이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세례나 침례를 받으면 거듭나게 될까요? 물침례 나 성령세례를 받으면 거듭나게 될까요? 여러분들은 세례나 침례를 받고 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는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 여러분 자신이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위대한 신앙인조차 ‘오호라 곤고한 자라. 누가 나를 구할 수 있는가?’ 라고 하소연합니다. 그는 옛사람과 새사람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의 전쟁이 자신의 안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자신은 의지와 달리 죄를 짓고 있음을 개탄합니다.
그렇다면 세례나 침례는 무의미합니까? 아닙니다. 세례 침례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삶을 바꾸고자 열망하게 됩니다. 죄의 종에서 벗어나 구원의 길로 가고자 하는 열망을 가집니다. 그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그를 도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죄를 짓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느낌니다. 세례나 침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죄에 대한 의식이 없기에 그러한 고통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는 영원한 형벌을 지옥에서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나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러한 사망의 길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정을 걷게 되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인 것입니다.
거듭남을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 특히 갓난아이는 부모의 말에 절대로 순종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무기력하기 때문에 그것외에는 살 길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에겐 세상을 살아갈 어떠한 지식도 없기에 부모의 말이 곧 생명의 법인 것이죠.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방법도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지한 자신을 인정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라는 것에 거부감을 느낌니까? 불합리하고 비과학적으로 여겨집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사악한 존재인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오죽하면 교회에서도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니다”라고 강조할까요? 그런 경험은 일단 의심하고 보는 습관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의심을 체계화한 것이 근대학문입니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근대학문이 의심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중세유럽이 보인 문제점 특히 기독교 교회의 갖가지 비리는 믿음에 대한 절대적 불신을 가져왔습니다. 그렇기에 종교개혁 르네상스를 통해 종교적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인간의 이성이 위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나는 생각한다”는 다른 말로 “나는 의심한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저도 학자로서 훈련을 받았지만 학문하는 사람의 기본적 자세는 ‘의심’입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것을 철저히 조사하고 판단해서 가장 정확한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근대적 학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합리성’ ‘과학성’ 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세의 맹목적 신앙을 비판한 것이니 이러한 주장이 힘을 얻은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 자체로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사이비 이단 종교가 많습니다. 그러한 종교는 불합리하고 비과학적입니다. 근거없는 말로 사람들을 속이고 그것을 통해 이익을 갈취하고자 합니다. 그로 인해 얻은 이익은 극소수의 종교지도자들이 차지하며 그것은 신자들의 피와 눈물을 가져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그러했고 종교지도자와 정치지도자들이 그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해된 것은 그들의 검은 커넥션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죄사함을 받고 구원된다는 예수님의 주장은 성전과 제사를 통해 엄청난 이익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습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한 사람이 죽어” 세상이 평화로운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여 예수님을 제거합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주장은 결국 종교 믿음 자체를 완전 부정하는 인본주의로 발전하게 됩니다. 인간을 신격화하는 것이죠. “신은 죽었다”는 철학자 니체의 주장은 그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신앙과 종교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그의 이적과 기사를 부인하고 그저 위대한 선생정도로 폄하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처럼 지혜나 도덕을 주는 가르침으로 전락합니다. 절대적 권위가 상실되니 사람들은 하나님도 예수님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그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가져왔습니다. 신을 벗어난 인간이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증명한 셈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서도 적용됩니다. 한 개인이 하나님을 벗어나면 한없는 타락의 길을 걸을 수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보았습니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고 우리 조상들은 말했습니다. 비록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하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결코 큰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왕이 없어 각자 소신대로 살았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을 모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늘이 무섭지 않”은 사람들이기도 하지요. 나그네의 첩을 밤새도록 윤간하여 죽음에 이른 사건이 사사기의 후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처럼 치안이 확립되지 않는 시대에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세례나 침례를 받았다고 구원을 받았으니 안심해도 좋다고 믿고 계십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세례나 침례가 곧 거듭남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거듭남을 위한 준비라 하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세례나 침례의 가치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입학식을 하고 학교에 들어갔다고 해서 저절로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니며 졸업장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학교에 출석하여 수업시간에 집중하고 또 방과 후에는 숙제를 잘 하고 예습복습 등의 자기주도학습으로 실력을 향상시켜야 좋은 성적과 함께 졸업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학교를 다녀도 성적이 바닥이거나 졸업장을 받지 못하면 그는 학교를 다녔다고 인정받지 못합니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남의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성실하게 교사의 지시에 따라 공부를 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야 천국이라는 영원한 직장에 취업이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이라는 불량직장에 취업하게 되어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거듭남의 학교의 수학기간은 종신이며 졸업장은 죽음과 동시에 받으며 그와 동시에 천국이라는 직장에 취업이 결정됩니다. 그러니 살아 있을 동안에는 그 학교의 학생이라는 신분을 잊지 맙시다. 천국이라는 직장에 취업하고자 원한다면 말이죠.
여러분들이 예전에 학교에 처음 다니게 되었을 때 부모님에게 무슨 말을 들었죠? “학교 가서 선생님 말 잘 들어라”는 것이었죠? 그것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이상하게 선생님의 말씀을 잘 안 들어서 문제입니다.그러니 수포자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말을 잘 들으라는 것은 질문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질문을 중시하는데 그것이 곧 선생님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성경에도 하나님께 질문이나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이 모두 불량 신자는 아닙니다. 오히려 신실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큼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최종적으로 순종한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하나님께 순종을 하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거듭남의 학교에서 여러분들의 가장 중요한 교사는 누구일까요? 바로 성령이십니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여러분들의 모든 가르침을 주관하십니다. 물론 인간의 교사도 중요하지만 그들은 불완전하니 최종적으로는 성령님에게 의존하셔야 합니다. 모든 의문은 성령님에게 물어ㅈ보시는 것이 가장 현명합니다. 성령님의 답은 어떻게 받을까요? 성경을 통해 기도응답을 통해 주어집니다. 때론 설교로 친구의 말로 주어지기도 합니다. 형태야 어찌 되었든지 우리는 그 분의 가르침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저는 수십 년간의 신앙생활 동안 성령의 역사를 따라왔습니다. 물론 순조롭지만은 않았습니다. 그 목소리를 거부하고 제멋대로 살았던 시절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저를 기다려주셨습니다. 성장에도 각자의 몫이 있습니다. 너무 서둘러 성장했다가 받아들일 그릇이 안 될 경우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조숙하는 것이 최선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성장하는 사람이 나중에 승리하여 웃을 수도 있습니다. 저 자신도 그런 쪽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만 합니다.
어제는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환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기뻤습니다. 믿어지지 않습니다. 설마 제게 그런 일이 있을 줄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환상을 실제로 경험했으니 제 믿음은 더욱 굳건해 진 것 같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제게 하나님은 레마의 말씀을 주셨고 저는 순종했습니다. 결코 쉬운 주문이 아니었지만 주님을 믿고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저를 실망시키시는 분이 아님을 또 한 번 실감했습니다. 제 앞에 마치 대형TV가 놓여서 화면을 비추는 것 같이 보여진 환상은 지금도 머릿 속에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저는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물론 그런 것을 밥 먹듯이 보는 분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일일지 모르나 제겐 꿈과 같은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에 어린 아이처럼 순종을 함으로써 보다 많은 이적과 기사를 통해 축복의 삶을 살며 거듭남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천국으로 가서 영원한 복락을 누릴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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