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주의 음성 듣기 비법 ‘안개를 헤치고’

닥터 양 2022. 2. 2. 12:32

주의 음성 듣기 비법 안개를 헤치고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 자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사무엘 상 310-11)

 

  여러분은 혹시 그런 사람들을 만나 당혹스러움을 느낀 적이 없습니까? 내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있는 사람 말입니다. 간혹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해도 그것은 지극히 형식적이고 게다가 그 말들에 대하여 존중하려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가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면 어떨까요? 그런 사람과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과연 들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 모든 사람들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답은 ‘NO’일 것입니다. 속된 말로 밥맛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 쉽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을 카리스마가 있다거나 신념이 굳건하다고 하여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아마 그들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심지어 이성으로서 사랑을 느끼고 있다면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겠지요.

  반대로 여러분 자신들이 그런 행동을 취해 주위 사람들에게 경원시 되었던 경우는 없었습니까? 부끄러운 일이지만 저는 그런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예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제게 호의를 표했던 여성이 저의 그런 태도를 보고 어느 순간부터 멀어진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다시 가까워지고자 애썼지만 끝내 다시 마음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포기해야 했습니다. 아마 비슷한 경험을 가진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상대가 자신의 상사이거나 고객이거나 한다면 그것은 최악의 사태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상사라면 그런 태도를 무례하게 여기고 나에게 불이익을 줄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고객이라면 두 가지 중 하나이겠지요. 대놓고 항의를 하거나 침묵하고 그대로 지나간 후에 거래를 끊겠다는 통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뒤통수를 얻어 맞는다는 점에서는 저의 경우와 마차가지이지만 상대가 내게 불이익을 줄 수 있으니 그것은 현실적인 고통을 안겨줍니다.

  반대의 경우도 물론 있었습니다. 저는 어느 날 대안학교의 교사가 되기 위한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원을 하지 않았지만 저의 이력서를 본 학교측에서 면접을 볼 것을 권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기도를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대안학교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무척 기뻤습니다. 감사기도를 하고 면접날을 기다려 학교로 찾아 갔습니다. 물론 마음 속에는 합격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원도 하지 않았는데 면접의 기회를 준 것 자체가 그만큼 학교가 저를 필요로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합격의 이유는 의외의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추측이기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저는 면접을 끝내고 나오면서 합격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경청이었습니다. 새로운 스타일의 교육에 대한 저의 호기심 때문에 면접관인 교장 선생님께 끊임없이 질문을 했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가 교장선생님을 면접한 것이 되었습니다. (귀교가 내가 일하기에 적합한가 라는 식의) 교장선생님은 저의 답변에 열변을 토하였는데 제가 예전에 읽은 책에 의하면 상대가 신나게 말을 하게 되면 그것으로 인해 나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한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 사이에서 신뢰를 얻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가슴에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쏟아붓고 싶은 잠재적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들어주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기 때문에 경청을 해 주는 사람의 가치는 높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원래 그렇게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때만큼은 웬지 모르게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왔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교육방법에 큰 공감을 느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아마 성령의 역사가 그렇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아마 그 학교에서 제가 일을 해야 할 필요를 하나님은 느끼셨던 것이겠지요. 아니 계획하셨다고 봐야 합니다. 결국 교장선생님은 남은 후보들과의 면접을 모두 취소하고 저를 합격시키셨습니다.

  이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남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를 즐겨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입이 하나이고 귀가 둘인 것은 적게 말하고 많이 들으라는 의미라는 데 그런 하나님의 법칙을 무시하고 떠들기를 좋아하니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쉽게 고쳐지지는 않습니다. 오 주여!

  만일 그 상대가 하나님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얼마나 그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기도에 대한 책이나 강의 설교를 들으면 우리가 얼마나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말을 하고 듣는 것을 별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기도를 함께 할 때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들어 보면 그것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도 예외는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때부터 최대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애쓰게 되었습니다. 저의 신앙의 멘토 손선미 선교사는 자신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구하면서 음성듣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손선교사의 음성 듣기는 육성처럼 들리는 소리는 아니고 자신의 내부에서 세미하게 들리는 메시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쏟아내는 선교사님의 설교나 가르침은 가히 주님의 음성에 걸맞는 내용이라고 여겨집니다. 참으로 부럽기도 하고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존경스럽기조차 합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손선교사님의 가르침은 저의 기도 태도를 180도 바꾸게 하였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아주 못 듣는 것은 아니었지만 예전보다 더 잘 들을 수 있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요즘은 의문이 생기면 기도 때 열심히 여쭤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교리나 고민 등에 대한 주님의 의견을 드는 것은 매우 유익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에는 교리에 대한 질문을 많이 드렸습니다. 동성애 문제나 교단 등 핫한 이슈를 묻고 답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직접 답을 하시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 갑자기 뜻밖의 장소에서 답을 주시기도 합니다. 물론 저는 모두 납득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에 대한 질문외에도 개인적인 문제의 결정에 대한 질문도 합니다. 주님이 갑자기 주신 감동이 정말 주님의 뜻인지를 묻기도 합니다. 이래저래 제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자 애쓰게 된 것 같습니다.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다 대답을 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의 서원대로 엘리 사사를 통해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그런데 엘리 사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식들이 아니라 사무엘을 통해 사사의 지위를 계승되기를 원하셨기에 사무엘이 주님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어린 사무엘은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없으니 엘리의 부름이라고 생각해서 그에게 달려갔습니다. 세 번 연속 같은 일이 반복되자 엘리는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알려주고 예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답을 하라고 가르치고 사무엘은 순종했습니다.

  사무엘은 이후로 주님의 음성을 통해 전해져오는 지시에 순종하면서 자신의 직무를 잘 수행하게 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한 그의 말은 자신이 몸소 실천하면서 배운 살아있는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그러한 순종이 위대한 사사 사무엘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죠. 그에 비해 엘리는 순종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주님의 신뢰를 잃었고 결국 그의 무례한 아들들과 함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역시 순종을 거부한 사울왕도 마찬가지였고요.

  인간이나 하나님이나 마찬가지로 경청하는 사람을 신뢰합니다. 그러니 신앙이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주님의 음성 듣기를 위해 우리는 주님께 답을 하시도록 마음의 공간을 제공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마치 따발총처럼 기도를 해대는 것으로 만족감을 느낄지 모릅니다. 주님의 음성듣기를 할 여유조차 없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주님께 훈계를 하는 것처럼 기도를 합니다. 모든 것을 자신이 판단하여 결론을 내리고 주님! 제 말에 따르세요라고 말하는 것같은 인상조차 줍니다.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상대는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누가 누구를 훈계한단 말입니까? 저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하여는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음성듣기를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바로 자기부인이 아닐까 합니다. 내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바로 자기 부인이지요.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한 자세로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바로 경청의 첫 걸음일 것입니다. 이 역시 인간과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 사이에서도 오만한 사람은 경청을 할 수 없으니까요.

  사울이 패망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초반에 여러 가지 업적을 쌓아가면서 그는 더 이상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멜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고 가축과 사람을 살려 두는 불순종을 보입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아는 것처럼 비참한 최후였던 것입니다. 제가 호의를 가진 여성에게 미움을 받게 된 것처럼.

  신앙이 우리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말은 결국 우리의 삶에서 신앙의 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형상이 닮은 존재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여라고 한 이른바 황금률은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청하는 사람을 신뢰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니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참 쉽지 않습니까?

  더 이상 여러분의 요구조건을 일방적으로 떠들거나 훈계질같은 것을 무례하게 해대는 것을 계속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너는 왜 내가 말할 틈을 주지 않는 거니?’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불만을 가지고 계실지 모릅니다. 실제로 그런 음성을 들었다는 간증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심지어 다 결정하고 통보하는 기도는 좀 많지 않습니까? ‘그래 멋대로 해라는 주님의 볼멘소리가 들려올 것 같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자기 부인을 통해 스스로를 내려놓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성숙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