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주는 행복 ‘슬픔 극복하기’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편 30장 11절)
예전에 본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악당의 무리들의 대장이 있는데 그는 미각을 잃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즐겁기는커녕 괴롭고 심지어 모두 토해내기조차 합니다. 그래서 부하들은 그에게 먹는 즐거움을 주는 음식을 찾아 전세계를 돌아다닙니다. 하지만 그에게 맛의 행복을 줄 수 있는 음식은 오직 하나랍니다. 그것을 주인공이 갖고 있기에 탈취하고자 하는 것이 이 애매니메이션의 내용입니다. 참으로 유치하죠? 겨우 음식 때문에!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가운데에 한가지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악당의 대장이 왜 미각을 잃었는가입니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은 없었지만 간접적으로 암시는 했기에 저는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소비하게 될 때 느끼는 만족도가 소비를 거듭하면서 떨어진다는 경제학의 법칙입니다. 어느 상품이 새롭게 출시되어 처음으로 그것을 소비하게 될 때 느껴지는 만족도를 100이라고 할 때 2번째 3번째 이렇게 횟수가 늘어갈수록 만족도는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대상이 무엇이든 적응하기 마련인데 나쁜 것에도 적응하지만 좋은 것에도 적응하게 되어 원래 가졌던 효과나 기쁨이 줄어들거나 사라진다는 것이죠.
이것은 원래 인간에게 매우 필요한 것이지만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소비에 대한 것도 그렇지만 사랑에 대하여도 행복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오래 하다 보면 만족도가 떨어져 결국 싫증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고 좋아하던 취미도 점점 질리게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물론 다는 아닙니다. 정말로 좋아하는 취미 정말로 사랑하는 경우에는 그러한 현상이 억제되거나 심지어 아예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설의 사랑이 탄생하고 또 취미가 직업이 되기도 합니다.
악당의 대장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었는데 이것은 그의 혀를 둔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매일 최고의 요리를 먹게 된다면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최고의 요리가 아니라 일상적인 요리가 될 것이고 결국 더 이상 맛을 느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맛있는 음식을 찾아 헤매게 될 것인데 그 끝은 어쩌면 이 악당대장의 운명과 같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기는커녕 구역질마저 하게 될 정도로 미각을 잃게 되는 것이죠.
최고의 음식이 아니라 지나치게 자극적인 음식만을 먹어도 미각을 잃게 될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사람들에 비해 음식에 관해서는 보수적인데 그것은 고춧가루 고추장을 중심으로 한 자극적 음식을 자주 먹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우리도 매운 음식을 상대적으로 덜 먹게 되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을 찾는 방문객 1위라고 하는데 이는 젊은 층일수록 음식에 대한 개방성이 커져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예전에 유학하던 시절에 한국에서 손님들이 오면 하루 이틀을 못 버티고 한국 음식 타령을 했을 정도인데 –반면 한국에 놀러온 일본사람들은 대부분 귀국 할 때까지 일본 음식을 찾지 않더군요-일본 음식에 익숙한 요즘 젊은 세대들은 과거세대에 비해 미각이 살아있을 것 같습니다.
최고의 음식이든 자극적인 음식이든 우리가 계속적으로 좋은 것만 접하게 되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냥 일상이 되기 때문에 좋은 줄 모르게 됩니다. 마약에 중독되면 나쁜 것은 마약의 자극이 일상이 되다 보니 마약의 효과가 떨어진 상태를 견디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마약을 처음 접하면 엄청난 환각상태에 빠져 그야말로 천국에라도 들어간 느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속되면 여기서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작동하여 그것이 주는 행복감이 떨어지게 되고 결국 그 상태를 벗어나면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에 밖에서 들어오면 방이 무척 따듯해 행복해지는데 그 상태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다가 밖에 나가면 추위의 고통이 더 심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법칙을 인생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미녀와 야수’라는 애니메이션을 아시지요. 모르시면 검색해서 알아보세요.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기는 어렵네요. 왕자가 야수가 된 것은 그가 너무나 남에 대한 배려를 모른 채 제멋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원래 그의 천성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뭐든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조그마한 거절이나 불편함도 참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뭐든지 자동으로 자신의 뜻이 이뤄져야 하는 상황에서는 조그마한 불편도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죠. 폭군은 그렇게 탄생합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대한항공 땅콩회항사건 그리고 그 가족의 갑질사건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들에게 견제가 전혀 작동하지 않아 마치 왕이나 황제처럼 군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랫사람의 자그마한 실수조차 참지 못하고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은 그들이 평소에 얼마나 권력의 맛에 취해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절제 인내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자그마한 불편도 큰 분노를 가져옵니다.
이 가족의 경우에도 그들의 문제 뒤에는 야수가 된 왕자의 경우와 흡사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 가족의 수장이라할 조양호회장은 가족들의 그러한 횡포를 견제할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회사를 대표하는 그가 공인의 자격으로 가족의 그러한 태도를 절제시켜야 했고 그럴 권한도 있었지만 전혀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대리 사과라는 웃지 못할 해프닝마저 일어났습니다. 나이가 40이 넘은 딸의 잘못을 아버지가 대신 사과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더구나 이것은 처음이 아니랍니다. 결국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그는 가족을 절제와 인내를 잃어버린 ‘벌거숭이 임금 님’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던 것입니다. 야수의 아버지인 왕처럼.
영화‘쉰들러의 리스트’에는 유대인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하는 수용소장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니 그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그마한 문제에도 곧바로 분노하고 쉽게 권총을 꺼내 상대를 살해해 버립니다. 그런 가운데 한 유대인은 권총이 고장 나서 격발이 안 되는 바람에 운 좋게 살아나죠. 그러자 독일군 병사는 “넌 오늘 운이 좋은 줄 알아”라고 외치며 갑니다. 운이 좋은 것은 유대인이 아니라 그 독일인 병사 아닐까요? 덕분에 한 사람을 덜 죽이게 되었으니 죄를 하나 덜어낸 셈이지 않습니까?
수용소장은 그의 친구 쉰들러의 설득으로 살인을 멈추려고 하나 불가능했습니다. 이미 절제와 인내를 잊은 그에게는 살인이 일종의 중독이 되어 버려 그것을 멈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몇 번은 그런대로 성공했습니다. “권력의 진정한 위력은 그것을 휘두르지 않는 것에 있다”고 한 쉰들러의 조언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곧 한 계가 드러나고 결국 그는 또 다시 살인마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에겐 총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의 모습이 무너가 게임기에서 죽어가는 게임캐릭터 정도로 여겨지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게임캐릭터에게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동정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고 게임하듯이 신나게 살인을 저지르면서 쾌감을 즐기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아주 특수한 조건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신다면 아직 인생을 모른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여러분도 저도 이러한 상태에 빠질 위험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른바 MZ세대의 이야기가 떠도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상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절제와 인내를 멀리하며 살아온 세대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고 그래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조양호 회장과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세대라 하겠습니다. 다만 그들 대다수는 부모가 조양호회장처럼 거대한 권력을 쥐어줄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죠.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러한 태도를 기성세대가 다 이해하고 받아줘야 하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힘으로 저항하고 싸워서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킨다면 그것이 나름 의미있는 일이지만 알아서 길을 비켜준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특권을 사회에까지 연장시키겠다는 발상이니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가요? 불만이 있어 이의를 제기하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 하나하나 개선되는 것이 민주주의사회라면 MZ새대의 저항은 의미가 매우 크지만 그냥 성문을 열고 백기투항하겠다면 그들의 절제와 인내는 누가 키워줍니까? 그들을 ‘벌거벗은 임금님’인 조양호 패밀리의 아바타를 만들 셈인가요? 그렇게 하면 이 사회가 과연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인생에서 좌절 슬픔 이러한 것은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닌 것입니다. 좌절과 슬픔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고 또 그것을 통해 고난을 이겨낼 지혜를 얻게 합니다. 야수 왕자님이나 조양호 패밀리는 그것을 배울 기회를 놓친 채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살다가 결국 엄청난 좌절을 느꼈으니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다’의 실사판이 되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린컹 대통령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저는 그분의 전기를 여러 권 살펴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든 것은 엄청난 독서량도 아니고 빼어난 연설도 아니며 바로 그가 겪은 수많은 실패라는 것입니다. 위대한 링컨이 이렇게 실패투성이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가 중앙의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단 두 번입니다. 하원의원 선거 한 번 그리고 대선입니다. 사업도 실패하여 그 빚을 갚는데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링컨은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실패에 좌절하지 않았고 또 실패하더라도 자신의 모습을 강렬하게 국민에게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실패한 숙적 더글러스-심지어 결혼 상대를 둔 싸움에서도 라이벌. 링컨 대통령의 아내 메리는 처음에 더글라스와 결혼하려고 했으나 링컨으로 상대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글라스가 링컨을 더 미워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가 있죠-에게 패한 1858년의 연방상원의원 선거는 소신 있는 링컨의 모습을 전국민에게 보여줌으로써 1860년의 대통령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쳐 링컨의 당선을 가져왔습니다.
링컨이 실패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새어머니를 맞이했는데 친어머니도 신앙이 좋았지만 새어머니는 정말로 신앙심이 두터운 분이어서 링컨과 그의 누나에게 믿음을 심어준 덕에 그는 평생 경건한 신앙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성경을 너덜너덜하게 될 정도 읽었고 매일 새벽에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영의 양식을 먹기 전에 육의 양식을 먹어 본 적이 없다”고 호언할 정도로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은 사람을 진정한 강자로 만들어 줍니다. 사람들은 믿는 구석 이른바 빽이 있을 때 겁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빽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나를 반드시 이 환란 가운데에서 건져 주신다는 믿음 그것은 우리를 담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면 고난과 축복을 겸하여 받게 되어 있으니 이미 웬만한 시련에는 단련이 되어 있기에 좌절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주님은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고요.
맛있는 음식을 계속 먹으면 그것이 일상이 되어 맛을 모르는 것처럼 평안한 삶이 계속되면 인간은 타락하게 마련입니다. 교회에서 만나는 분들중에서 “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에 대하여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분들 치고 신앙심 좋은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분들은 주님의 사랑을 훨씬 덜 받았기 때문에 시련도 고난도 없이 살아왔고 그래서 믿음을 성장시킬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이죠.
슬픔은 인간을 하나님께 더 다가가게 합니다. 다윗은 “눈물이 음식이 됩니다”라고 할 정도로 고난의 삶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던 것도 바로 그 눈물의 고난 때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장 3~4절)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좌절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항상 느끼고 살기 때문에 고난을 이겨낼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치 자전거 뒤에서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 부모님의 존재에 마음놓고 자전거를 타는 아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껏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갖는 힘이고 믿는 자의 특권인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우리는 성장하여 나가 결국 고난이 닥쳐도 요동하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 연단을 거쳐 소망으로 이어진 결과입니다.
슬픔이 행복을 준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고난과 슬픔은 우리를 강하게 하며 소소한 것까지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놓는 ‘자기 부인’을 가능하게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믿음의 기초이자 완성이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매일 죽노라”고 고배한 것은 바로 ‘자기 부인’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감사와 기쁨이 쏟아집니다.
오늘의 필자는 아들의 친구들의 방문에서 슬픔을 이겨낼 행복을 찾았습니다. 원래라면 그들의 방문은 자신의 안락을 깨는 귀찮은 일이 될 수 있으나 그가 슬프기 때문에 그것이 행복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슬픔이라는 더 나쁜 감정 아래에서는 자그마한 즐거움도 큰 즐거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러한 즐거움을 누리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런 의지를 가져온 것이 그에게는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필자처럼 삶을 모두 선물이라고 여기게 하는 마음을 줍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이런 데서 비롯되었다 할 것입니다. 감사할 무언가가 생겨서라기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범사를 감사할 것이라고 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마음이 행복할 때 느끼는 감정을 믿음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을 경험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게 생긴 일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게 되는 순간 기쁨과 감사가 솟아오르는 경험!
더 이상 고난을 하나님의 탓으로 여기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고난이 있고 그로 인해 슬픔을 느끼기에 범사가 감사하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삼 일을 굶으면 뭐든지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매일 최고의 요리를 먹으면 그런 맛을 느낄 수 없게 되겠지요. 슬픔이 주는 행복 우리 모두 누려보시지 않겠습니까? 그저 하루하루가 무사히 넘어가기만 해도 감사하고 싶은 마음 그것으로 인한 행복을 함께 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행복을 통해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히고 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 갈 수 있기를 에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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