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세상을 바꾸는 것’

닥터 양 2021. 12. 29. 22:04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세상을 바꾸는 것

 

너희는 나를 불러 주어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646)

 

  새 땅과 새 하늘에 사는 옛사람! 어울립니까? 결코 어울릴 수 없습니다. 마치 화려하게 꾸민 파티 장소에 구질구질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 같이 어색합니다. 그곳에는 멋진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야 어울릴 것입니다. 성경에도 왕의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이 오지 않자 대신 들어온 사람들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밖으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았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주님 예수 다시 올 때 그대는 영접할 예복이 있는가 그대 몸은 거룩한 곳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됐는가”(‘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에서)라는 찬송도 마찬가지로 예수님 재림을 맞기 위한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세상에서도 우리가 어딘가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격이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착하다거나 좋은 사람이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에 입장하고자 할 때 저는 착한 사람이니 그냥 들여 보내 주세요라고 하면 검표원이 그러세요? 그럼 그냥 들어가세요라고 하며 입장을 허락해 줄까요?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 검표원은 머지 않아 일자리를 잃을 것이고 더 나아가 고발당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 검표원은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는 악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입장권을 가진 분에게 입장을 허락합니다.”라며 단호히 거절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에 들어갈 때도 우리는 자격이 필요합니다. 새사람 영접할 예복은 바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의미합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라는 명저에는 천국 문에까지 와서 입장을 거절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천국 입장의 자격이 없다면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입장할 자격인 새 사람 예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믿음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니까’ ‘목사님과 친하니까등등의 이유로 천국에 입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녀도 믿음이 없으면 못 들어갈 수 있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해도 믿음이 있다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회란 우리가 신앙생활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있지만 그곳에 가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보증을 받을 수 있는 곳은 결코 아닙니다.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공부를 잘하고 똑똑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죠. 공부를 잘하고 똑똑해 지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려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서 제대로 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우등생이 되야하죠.

  ‘믿음의 우등생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큰 소리로 주여! 주여!’ 외치며 통성기도를 잘 하는 사람일까요? 찬양을 아름답게 부르는 사람일까요? 헌금을 아주 많이 내는 사람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교회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일까요? 설교 잘하시는 목사님일까요? 전도왕이 되신 사람일까요? 불우한 이웃을 돕기 위해 많은 기부금을 내는 사람일까요? 전부 아닙니다.

  그럼 누구냐고요? “주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의지하여 믿고 따르며 그의 말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에는 경건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리새파라는 종파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어려서부터 외우다시피 공부하고 실천했습니다. 십일조를 철두철미하게 냈는데 어느 정도냐 하면 야채를 얻으면 뿌리까지 세어 십일조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많이 했고 자선행위도 열심히 했습니다. 이 정도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칭찬해야 하는데 뜻밖에도 돌아온 것은 질책이었습니다. ‘회칠한 무덤!’ ‘외식하는 자들’(위선자들) 예수님은 그들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의 행위는 믿음이 없이 그저 남에게 보이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상대에게 잘 해주는 사람과 같습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그것은 남에게 자신이 착한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랍비(선생)!“라고 불리며 인사를 받기를 즐겨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엔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두려움도 경외심도 없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과부와 같이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외롭고 힘든 삶을 이용하여 금전적인 이익도 취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의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거짓된 말과 행동으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갖가지 방법으로 돈을 갈취하는 사람들말입니다. 사기꾼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죠. 다르다면 그들은 법의 허점을 잘 이용하기 때문에 처벌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 뿐일 겁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왜곡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나님은 십계 명 중 제5계명을 통해 명하셨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부모에게 고르반’(부모님께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의미)라고 말하면 부모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자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옳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의 의미를 왜곡시켰음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여 주신 날인데 그것이 인간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이용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 이어지자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이 대중에게서 무시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예레미야서에는 거짓 선지자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가올 위기를 말하지 않고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펼쳐 백성들을 기만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예레미야의 참된 선포는 눈에 가시가 되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고참소되어 갖가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후예라 할 바리새인들은 역시 그들의 조상과 같은 잘못을 저지릅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그들이 진정 믿음이 없었음은 이러한 사실에서도 충분히 증명될 것입니다. 만일 믿음이 있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성경인 구약성경의 말씀을 믿고 있었다면 위와 같은 행동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한 행위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믿음이 없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선포하는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은 그들이 거짓 예언자 선지자들과 같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는 말을 예전에 많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오직 사람에게만 잘 보여 명예와 권세 이익을 탐했으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음이 명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신앙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금식을 할 때도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더 건강하게 보이도록 하고 기도할 때는 골방에서 하라고 하십니다. 자선을 베풀 때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유명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은밀한 곳에서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는다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내놓고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또 자신의 행위를 간증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권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 공로와 영광은 오롯이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자신을 이끄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또한 믿음이 있다면 아무도 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도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게 될 것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선행을 하는 사람들은 남이 보지 않을 때는 악행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라는 작품을 아시나요? 지킬 박사는 자신의 사회적 명성과 지위를 잃지 않고 싶지만 죄에 대한 유혹을 이기기 어려웠던 의사 지킬이 자신을 하이드라는 새로운 인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어 이중생활을 하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러한 삶이 주는 압박에 못 이겨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는 물론 하나님을 믿지도 두려워 하지도 않기에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삶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기에 가능했습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이러한 형식적인 믿음 생활이 도처에 널렸습니다. 남미의 어느 지역에 가면 가톨릭을 믿는 사람이 국민의 90%가 넘는데도 불구하고 특정한 여신을 섬기는 풍습이 버젓이 만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은 그저 문화이며 풍습이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두 신을 하나님과 여신- 겸하여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파적 신앙이 유대사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저 전승해온 문화를 기계적으로 따를 뿐인 것이죠.

  오늘의 필자는 환경이 아니라 내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기독교에 입문한 사람들은 자신이 아니라 환경이 변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신앙의 꽃길을 걷고자 합니다. 잘 깔려진 꽃길을 걸으며 신앙이 주는 혜택을 누리는 이른바 행복신앙을 기대합니다. 고난도 시련도 절대 사절입니다. “예수님! 제게 축복을 주시되 고난과 시련을 겸하여 주시지는 마세요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이미 언급한 대로 그것은 파티장에 나타난 남루한 의복의 손님처럼 어울리지 않는 조합입니다.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자신이 그곳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지 않으면 불청객에 불과합니다. 경비들이 손을 잡고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하며 내쫓을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다 문전박대를 당한 꼴이 될 것입니다. 천국에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은 사람만이 어울립니다. 옛 사람이란 변화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죄악에 가득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득한 천국은 이미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될 것입니다. 지옥에 어울리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와 물을 흐리게(?)하도록 할 수는 없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고 예수님은 가르치십니다. 포도주를 새로 담그면 발효로 인해 팽창하기 때문에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낡은 부대에 넣으면 부대가 찢어져 포도주도 부대도 못 쓰게 됩니다. 새 땅 새 하늘에 옛사람은 그래서 어울리지 않습니다. 새 부대 새 사람만이 새로운 포도주 새로운 땅과 하늘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쁜 것은 어느 날 제 자신이 변하여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술을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하나님께서 끊어주셨습니다. 술을 끊으니 술에 취해 하던 잘못이나 실수를 하지 않게 되었고 술을 마시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기도를 하면 응답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기도하는 것에 힘을 쓰게 되어 주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하여 그 임재하심을 언제나 실감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감동이 저로 하여금 찬양을 부르게 합니다. 그 결과 세상음악과 노래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좋아하던 가수의 노래가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찬양에 몰두하는 자신이 그저 대견럽습니다. (약간의 서운함이 남아 있음을 고백합니다. 아직 더 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워낙 음악을 좋아했기에..쩝쩝..)

  만일 하나님께서 저의 요구를 그냥 막 들어주셨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변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런 능력이 주어진다면 어떤 짓을 할까요? 미운 사람을 혼내주고 죄를 짓기 위해 능력을 남용하고...상상이 갑니까? 예수를 믿은 지 오래 되어도 여전히 옛 사람이 그의 입에서는 불평불만이 쏟아지고 그의 행실은 더럽기 이를 데 없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근심을 달고 사셔야 하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경을 보면 편하게 주님의 일꾼이 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윗의 골리앗을 때려 잡아 영웅이 되자 마자 참소를 받아 사울왕의 눈을 피해 유랑생활을 합니다. 모세는 이집트 왕자의 지위에서 쫓겨나 광야에서 40년간 연단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고 그것도 모자라 100살에 낳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살려주셨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순종하리라는 것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통해 믿음을 더욱 성장시켰고 우리는 그의 순종을 보며 믿음이란 순종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을 통해 대대로 그것을 깨닫도록 하며 아브라함 자신의 신앙도 성장시키는 효과를 위해 그렇게 명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10년 전 20년 전의 제 모습은 지금과 사뭇 달랐습니다. 물론 나이를 먹어 변한 것도 있지만 속사람의 놀라운 변화를 절감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아직 미숙하고 어립니다. 하나님께서 더 고쳐주셔야 장성한 분량의 신앙을 가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시련이 와도 그분에게 의지하고 매달려 이겨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던 것처럼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 분의 인도하심에 따랐을 뿐입니다. ‘나는 진실로 행복한 사람의 저자 홍예숙 사모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님을 찾으면 사랑하는 딸아! 걱정마라. 내가 했지 네가 했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고 그래서 안심하고 치유사역을 감당했다고 합니다. 정경주 사모는 그녀의 저서 하나님이 하셨어요에서 누군가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라고 물으면 하나님이 하셨어요라고 답을 했답니다.

 이 분들처럼 엄청난 사역을 하지 않았지만 저의 소박한 신앙생활에서도 하나님께서 늘 하셨습니다. 기도도 말씀의 깨달음도 찬양도 전도도 그분이 이끄시지 않았다면 저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을 겁니다. 보기와 달리 소심하기 이를데 없었던 저는 이제 과거에 바할 수 없이 담대해졌습니다. 어려움이 닥쳐도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느날 일어나 보니 유명해졌다는 것처럼 극적으로 갑작스럽게가 아니라 어린 아이같던 저를 한 걸음 한 걸음 이끄시며 인도하신 하나님과 저의 오래 여정의 결과인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이 하셨어요. 나의 믿음 나의 용기 나의 지혜 나의 행복 기쁨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만들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왜 하필 저일까요?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영원히 사랑함이라바로 이것이 유일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이유도 조건도 없이 저를 사랑하여 주셨고 앞으로도 그러실 겁니다. 그렇기에 저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라!‘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