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작은 빛이 모여서 ‘대림절 넷째 주일’

닥터 양 2021. 12. 20. 23:39

작은 빛이 모여서 대림절 넷째 주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크리스천에게 삶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예수 잘 믿어 천국 가는 것? 최후의 때에 합격하여 휴거되는 것? 아니면 살아서 온갖 축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사는 것?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로 묶여 살아서 축복받아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서도 천국에 가 더 잘 먹고 잘 사는 것인가요?(이건 완전 죽이는 인생이네요. 그런데 십자가는 어쩌죠?)

  성경에 따르면 이러한 것이 크리스천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어떤 구절을 보면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신실하게 살면 모든 것이 형통하다는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믿는 자에게 구원은 특권이니 죽어서도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은 축복과 구원의 선물세트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그리고 틀린 말은 절대 아니지요. 실제로 예수 믿고 거듭나서 그런 삶을 사는 분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하나님을 믿고자 했던 동기는 이러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아니 심지어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특이하죠? 제 나이에 유치원을 나온 것 자체가? 그만큼 유복했다는 것과 서울에 살았기 때문일 겁니다)에도 왕따와 괴롭힘을 당해야 했던 저는 어린 나이에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나서 학교 운동자 구석에 홀로 앉아서 도대체 난 왜 태어난 거지? 이러려고 태어났나?(이러려고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지요?) 저 아이들은 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정말이지 하루 하루 사는 게 지옥 같았고 학교 가기가 너무 싫었습니다. 오늘은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기도하면서 간 것 같아요.

  교회 유치원을 다녔기에 그나마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신기해요. 불교 믿는 집에서 왜 저를 교회 유치원을 보내셨는지. 아마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을까요? 나중에 교회를 다니게 되었을 때 최소한 저항감이나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의 원인 중 하나는 되었을 겁니다. 그 외에도 미션스쿨 다니던 이모가 가지고 다니던 성경 책을 읽어 보거나 이모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다거나 성경 이야기라는 책을 어린이용 문학 전집에서 꺼내 읽어 보았던 것 등이 믿음의 길을 예비하게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왕따와 괴롭힘에 시달리던 저에게 책은 너무나 좋은 벗이었고 그래서 친구집에 가면 그 집의 책을 몇 권씩 빌려와 읽고는 했는데 그 중에 성경이야기는 단골 목록이었습니다. 너무 신기했어요.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나 기독교는 저의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오랜 세월 저는 기독교를 부정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드디어 친구 손에 이끌리어 교회 문을 두드렸지만(그 이전에도 몇 번 갔지만 일회성이었죠)그래서 처음에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그것을 부정하고 싶어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구원론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 그게 말이 되나? 그럼 이순신장군도 세종대왕도 다 지옥이네? 말이 되나?’ 그 분들은 예수의 예자로 몰랐고 알 기회도 없는데 그렇다고 지옥에 가다니 기가 막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여호와의 증인이 되고자 했던 것은 이에 대한 답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이렇습니다. 나중에 그분들이 부활해서 예수 믿을 기회를 받습니다이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이거다! 이거야말로 진리구나라는 생각에 여호와의 증인이 되고자 했죠.

  구원론을 그토록 싫어한 것은 바로 제가 교회를 다니게 된 이유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즐겨 읽고 이모의 성경책을 몰래 훔쳐보고(이모가 중학생이라 그런 거에 민감해 서 많이 혼났습니다. 성경책만 아니라 교과서도 훔쳐보곤 했죠. 특히 역사책이 재밌어 결국 사학과에 갔습니다)크리스마스가 되면 예수님의 생애를 그린 영화를 보고 감동한 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나같이 왕따 당하고 괴롭힘당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고난이라면 고난인데 예수님은 그런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기에 어린 나이에도 감동을 느낀 것입니다.

  그것과 비슷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 당시 만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널렸습니다. 아침이면 그야말로 거지꼴을 한 진짜 거지들이 문을 두들기며 밥 좀 줘요. ?”라고 외쳤을 정도니까요. 요즘 사람들은 말로는 거지를 알아도 진짜 거지는 모를 겁니다. 21세기 버전은 아마 노숙자일텐데 노숙자는 거지에 비하면 양반입니다. 그래도 노숙자는 제법 괜찮은 옷이라도 입고 있으니까요. 거지는 정말 끔찍한 모습이었으니까요.

  저는 그런 거지들을 보고 또 굶어 죽어가는 사람 겨울에 얼어 죽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이런 일이 있는가에 대하여 고민했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해가 안 되죠? 우리집이 못 사는 것도 아닌데 (저를 유치원 보낼 정도니 알만하지요?)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은 지금과 다르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해!” 이 소리가 얼마나 싫었는지 몰라요. 공부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저도 제법 공부는 했습니다)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지금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널려 있으니까요. 남이야 굶어 죽든 말든 자신만 잘 살면 된다는 사람들이.

  그런 저에게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를 사랑으로 돌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니 감격할 수 밖에 없었죠. ‘아 예수님만 믿으면 되는구나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기독교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희망을 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기독교를 믿고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대로 살면 가난도 질병도 모두 해결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구원론은 나이가 들수록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구원론에 대하여 의문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물론 더 이상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렇게 허다한 증거와 증인이 있는데 어떻게 부정합니까? 사람들은 구원론을 억지로 부정하려고 하지만 그거야말로 비과학적이고 불합리한 태도입니다. 그들은 진실을 외면한 채 천동설을 주장한 교황청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요. “아 싫어 싫어 난 그냥 그렇게 생각할래하면 귀를 막고 눈을 가리던. 구원론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적인 근거를 가진 팩트입니다. 귀를 막고 눈을 가린다고 없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벌써 없어졌을 겁니다.

  하지만 C.S. 루이스 같은 신실하신 믿음의 소유자조차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권한이 주어진다면 제일 먼저 지옥을 없애겠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지옥이 있고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고 안 믿고 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저도 그 분과 같은 마음입니다. 지옥이 없으면 좋겠지만 그게 사실인데 부정해 봐야 소용 없다는 것이죠. 한 마디로 쓸데없는 저항은 그만하고 얌전히 말 들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지옥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이 지옥은 없다고 했을 때 냉큼 받아먹었죠. 이래저래 여호와의 증인은 제게 입에 맞는 떡이었습니다. 하지만 진리가 아니면 가지 말아야죠.

  그렇지만 여전히 저는 구원론보다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춰 신앙생활을 합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믿는 자의 당연한 권리이고 이미 그 확신을 가졌는데 여전히 세상에 살아남은 것은 바로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 저의 삶의 가장 큰 동기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너희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라입니다. 어떤 분은 빛과 소금대신 소금과 빛이라고 하십니다. 먼저 소금이 되어 녹아야 빛이 될 수 있다. 빛은 누구나 되고 싶어하지만 소금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자신을 내주어야 빛이 되니 소금과 빛이 맞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도 어느 때부터 소금과 빛이란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기독교의 구원론보다 여전히 그쪽이 더 현실적으로 믿어졌기 때문이죠.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바꾸려는 크리스천들이 가득할 때 우리는 살아서 천국을 맛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빛과 소금의 하나가 되어 내 삶을 모두 바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글도 쓰고 정당에도 가입하고 심지어 출마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세상을 바꾸는 일에 참여하겠다고 생각하며. 마틴 루터 킹 목사님같은 참여적 신앙을 가진 분들을 롤모델로 삼아.

  하지만 오늘날 저는 그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부분적으로는 가능해도 전체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집이 망가졌는데 이미 부분적으로 수리를 해도 소용이 없다면 새로 지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는 종말론적 신앙이야말로 참다운 진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이것을 부정해 봐야 소용이 없음을 느꼈습니다. 루이스 선생의 말은 그런 점에서 제 마음에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부정해도 소용없다. 항복하라!‘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스피노자는 말했습니다. “내일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꿈을 꾸라는 말도 있습니다. 구원파처럼 어차피 세상은 끝나고 새하늘과 새땅이 오니 지금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식의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남겨 두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밝히고 그로 인해 악의 세력이 완전하게 세상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빛의 자녀들을 더 늘리고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필자는 우리에게 그러한 사명이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크리스마스 트리에서 빛나는 작은 등불이 주변을 밝게 해 주는 것처럼 우리는 주변을 환하게 해 주는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등불이 세상을 모두 밝힐 필요는 없다고도 합니다. 그러한 작은 등불이 하나가 되어 세상은 악의 세력이 감히 활개치지 못하는 빛의 세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한 영적 싸움의 선봉이 되어 싸우는 군사가 되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이유이며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작은 등불로서 주변을 밝게 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빛이 더욱 커져 빛 중의 빛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이시겠지요.

  우리의 빛의 근원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장 큰 빛이 되어 비추시니 우리도 빛납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크리스천이 빛이 되고 영적 전쟁의 군사가 되어 악의 무리를 물리치고 세상을 밝히고자 애쓰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저 종말이나 바라면서 편하게 살도록 주님은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 하신다” (’저 장미 꽃 이슬처럼에서)

  사도 바울조차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하고 싶다고 고백했지만 주님은 그에게 사명을 주셨기에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주님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있겠지요. 구원을 위해 축복을 위해 살지 말고 사명을 위해 사십시오. 그러면 구원도 축복도 결과로서 주어집니다. 시험 잘 보려고 공부하지 말고 공부 잘 하려고 시험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모에게 재산 물려 받으려고 효도하지 말고 효도한 결과로 재산 물려 받는 게 맞습니다. 효도는 부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이죠?

  천국은 자격이 있는 사람이 가야 합니다. 그저 예수 믿는다고 고백하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죠.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돈이나 능력 인맥에 더 의존하며 산다면 그것이 믿는 것입니까? 믿는다고 하면서 말 안 듣고 딴전 피우면 그게 믿는 겁니까? 그래서 절대순종이 필요한 겁니다. 절대 순종은 믿으니까 말 잘 드면 좋은 일이 있다는 확신입니다. 투자하라면 투자하는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주시리라를 믿으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에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따라가면 천국에 이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천국 문 앞에 이르러 자신을 바라보며 우리는 놀랄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사람이 된 자신에게 경탄을 할 것입니다. “? 내가 언제 이렇게 되었지?” 라고. 그렇습니다. 세상을 바르게 만드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라가다 보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 갑니다. 그러니 천국이지요. 옛 사람 그대로 천국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죄짓고 파당 만들고 온갖 짓 다할 텐데 그게 천국인가요?

  그러니 요령 있게 구원받고 천국 갈 생각은 애시당초 하지 마시고 말씀대로 계시대로 살면서 따라가십시오. 그래야 천국 문 앞에서 문전박대 당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 도중에도 탈락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과정을 거쳐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는 것입니다. 제가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방법을 완전히 수용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아 나는 어리석었다.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아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다. 나는 그것을 위해 순종하며 나의 사명을 다 하면 되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과 구원받는 것은 하나였다라는 것이죠.

  제가 오해를 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구원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잘못된 크리스천들의 잘못된 롤모델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살지 않고 도피해 있습니다. 구원파에게 속은 사람들은 아마 그런 삶을 살았을 겁니다. 그저 구원이나 바라며 신앙생활을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꿀 희망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에 따라 살면 세상도 바꾸고 구원도 얻는다라고. 그래서 너희는 가라 저 세상으로!”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에 내 주님 나를 맞아주시리”(’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에서) 이것이 십자가의 삶이요 우리 크리스천이 가야 할 길임을 잊지 마시고 살아갑시다. 목이 빠져라고 주님 오실 날만 기다린다면 어떻게 그 길을 완주할 수 있겠습니까? 하루 하루의 삶이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있는 삶이고 거기에 집중해서 살다 보면 주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열심히 그렇게 사는 저희 앞에 갑자기 주님이 나타나셔서 어이 수고했어하실 때 주님! 벌써 오셨네요. 저 아직도 할 일이 많은 데라며 맞이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