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 믿음이다 ‘기도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내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합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요한계시록 5장8절)
만일 여러분이 누군가와 친하다고 한다면 그 친함의 정도를 측정할 가장 좋은 기준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선물을 많이 주고받거나 함께 영화를 본다든지 서로를 칭찬한다든지 등등 만일 둘이 연인이나 부부 사이라면 얼마나 자주 스킨십이나 성관계를 하는가도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기준으로 상대와의 관계를 생각하곤 하지요? ‘저 사람이 나게 어떤 존재일까?’라고 하는 의문에 대하여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측정해 보고 그다음 관계에 반영합니다. 상대가 이렇게 해 주니까 나도 이렇게 해야 하지 라는 식으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게리 채프먼의 ‘5가지 사랑의 언어’(생명의 말씀사)에는 관계의 깊이를 측정할 수 있는 5가지 기준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는 그런 뜻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지만 제가 그렇게 볼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5가지 기준이란 인정하는 말(칭찬) 함께하는 시간(교제) 선물(물적 서비스) 봉사(노력 서비스) 스킨십(육체적 교류)입니다. 사람은 이 5가지 기준을 모두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골고루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누군가는 교제를 더 원하고 어떤 사람은 노력 서비스를 더 해 주기를 바랍니다. (괄호 안의 표현은 저자가 아니라 제가 만든 표현임을 밝힙니다) 그러기 때문에 상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그가 그녀가 어떤 서비스를 좀 더 원하는지를 알아 그것에 중점을 두어 실천하라고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도 그가 말하는 함정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상대의 바람을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하고 “내가 이렇게 노력을 하는데 왜 상대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야”라는 불평을 늘어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그것은 한마디로 엉뚱한 곳을 긁어주거나 마사지한 꼴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에는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욕구를 가지고 있고 그러니 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도 원하며 그것을 실천하면 상대가 나에게 감동을 느껴 같은 대접을 해 줄 것이라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산다면 남에게 악행을 할 수가 없겠지요? 반대로 선행은 늘어갈 겁니다. 누구나 남이 자신에게 선행을 해주길 바라니까요. 문제는 자신은 그렇게 원하면서 남에게는 악행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유교의 경전인 ‘논어’에는 다르지만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게 하지 말라” 기독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 주라고 하고 유교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도록 하지 말라고 차이는 있지만 결국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상대를 배려한다는 점에서 같죠. 결국 진리 그 자체는 다를 수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모든 종교 철학에는 그 나름대로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궁극적인 진리에 이르렀는가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믿는 것은 궁극적 진리가 기독교에 담겨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종교나 가르침은 다 거짓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독선에 불과하겠지요. 어른이 아이의 말을 다 무시하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에게도 그 나이에 맞는 깨달음이 있고 그것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이것저것 떠들 때 그것이 어른의 기준으로 보아 수준이 낮다고 해서 “입 다물어. 왜 그렇게 유치해”라고 한다면 그 아이는 성장할 기회를 박탈당할지 모릅니다. 더 이상 표현할 수가 없게 되게 될 경우 자신이 그러한 표현을 통해 생각을 펼칠 능력을 기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지혜로운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어른들이 너무나 세상에 들어가 버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가 어른이 되고 중년 노년이 되어도 같은 수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세상의 지혜를 존중하고 그것을 수단으로 믿음을 키워가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기독교의 궁극적 진리에 도달해 모든 것을 우리의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장성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 어떤 종교 철학 가르침도 자신의 내면에서 기독교라는 궁극적 진리 안에서 소화해 낼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애당초부터 기독교에만 올인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지 의문입니다. 마치 온실 속의 화초처럼 될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세상의 지식과 철학 종교에도 진리가 어느 정도 담겨 있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포용하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보다 진리를 사랑하고 믿게 되는 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그렇다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태도를 일부러 취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다 넓은 마음으로 세상의 지식과 철학 종교를 대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진리의 습득과 전파에 득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신학대학은 없고 신학대학원만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의 지식을 익히고 그 기반 위에 신학을 배워야 보다 나은 목회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다시 이야기를 되돌려 봅시다. 나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는 말과 위의 저자의 주장은 충돌하게 될까요? 이렇게 바꿔야 합니까?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상대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하라” 그렇지 않습니까? 언 듯 생각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에게 해주다가는 자칫 헛발질하는 꼴이 되어 도리어 욕만 먹는다면 곤란하겠지요. 가려우니 긁어 달라고 했는데 가렵지도 않은 곳을 긁어주면 혹은 마사지를 해달라고 했는데 원하는 곳이 아니라 엉뚱한 곳을 문질러 대면 욕먹기 십상이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 되겠지요. 예수님은 심리치료사가 아닙니다. 궁극적인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네가 바라는 것’은 구체적인 욕구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것은 공자 선생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배려를 원하니까 너도 배려하라 누구나 사랑을 원하니 너도 사랑하라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야지 구체적으로 뭘 하라 마라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종교가 자꾸 그런 걸 가르치니 종교가 아니라 심리학이 되어 버린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요? (옥성호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부흥과 개혁사, 2007) 종교는 종교를 말해야 종교인 것입니다. 물론 진리를 말하다 보면 다른 진리가 들어갈 수 있지만 그것에 흘러 버려 본질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치유사역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병원 역할을 해달라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치유는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복음을 통한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하고 이를 믿고 그에 따라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치유가 일어나고 그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에 너무 큰 비중을 든다면 예수님에게 “너희가 떡을 바라고 나를 따르느냐”는 꾸짖음을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을 믿음 생활에 적용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우리가 그분에게 더욱 가까이 갈 수 있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하나님이라면 위의 5가지 중에 무엇을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실까요?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라는 다른 질문과 통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말씀? 찬양? 전도? 예배? 등등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수단은 꽤 있지만 무엇이 과연 핵심일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 중요하지만 그래도 가장 힘을 써야 할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것들 중에 가장 경시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찬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 아닌데. 나 찬양 좋아하는 데” 이렇게 반론하실 분이 계실 겁니다.. 맞습니다. 찬양을 우리는 좋아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찬양을 중시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준비찬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지금 아주 싫어합니다. 원래 취지는 좋은 것인데 점차 뉘앙스가 이상해졌습니다. 찬양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마치 곁가지나 수단인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교회 예배를 드려다보면 신앙의 본질은 말씀과 기도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 늘 ‘말씀과 기도로 나아갑시다’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말씀과 기도가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에 못지않게 중요한 신앙 구성요소인 찬양은 왜 빠져 있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입니다.
“호흡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이것은 시편 150편 6절 즉 시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말씀입니다. 다른 곳에는 “이 백성은 나를 찬양하게 하기 위해지었나니”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것은 기도하라고도 아니고 말씀 읽으라는 것도 아니고 결국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라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말씀 기도 이것이 왜 필요합니까? 자신을 찬양하는 인간들 그리고 동물식물을 보시면서 얼마나 그분이 흡족해하실까요?? 세상의 왕도 그렇습니다. 독재자들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합니까? 거대한 퍼레이드를 하면서 자신에게 찬양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북한이라면 “김일성 원수님 감사합니다”라는” 식으로. 대물 방언을 하시는 분에 의하면 꽃도 나무도 동물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라고‘ 하지 ”기도합니다“ ”말씀을 봅니다 “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요즘 예배시간에 찬양이 줄거나 심지어 실종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아 서글픕니다. 이른바 준비찬양이라는 이름으로 미리 실컷 해 두자는 것인데 말이 됩니까? 찬양이 언제부터 애프 타이저로 전락한 겁니까? 연애로 치면 그저 분위기 끌어올리기 위한 행위라고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찬양은 예배의 핵심이니 애프 타이 저가 아니라 메인 디시이고 연애 그 자체이어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찬양에 신앙생활의 중심을 두어야 할 것인가요? 예배의 핵심에 찬양이 있어야 하지만 신앙생활이 되면 이야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물론 찬양하십시오. 혼자서 하는 찬양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을 끌어올리는데도 매우 좋습니다.
하지만 더 열심히 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찬양을 하는 것은 우리 안에 믿음이 가득 차서 찬양을 하지 않으면 배길 수 없게 되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넘쳐흘러”난 네가 너무 좋아. 넌 너무 아름다워. “.“ 하는 찬양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찬양이 별거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그분의 사랑을 곡에 따라 올리는 것이지요.
그럼 무엇으로 그 믿음을 키우겠습니까? 위의 5가지 중에 어느 것일까요? 바로 교제입니다. 상대를 알아야 찬양을 할 거 아닙니까? 말씀으로 아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기도만큼 되겠습니까? 상대의 저서를 아무리 읽어도 상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효과가 있겠습니까? 이상적으로는 저서를 읽으면서 상대를 만나는 것이 좋으니 우리는 말씀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말씀을 읽어도 상대에게 직접 듣는 것보다 낫겠습니까? ’ 백문이 불여일견(百聞이 不如一見)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연애편지나 주고받으면서 만나보지 않는다면 사랑이 결실을 맺겠습니까? 만나서 교제할 때 그 사랑은 일취월장하게 되겠지요. ‘원거리 연애요?’ 그것도 가끔씩 만나지 않으면 깨지기 십상입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오늘의 필자는 기도의 향이 하나님께 전달되는 환상을 이야기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그저 미래나 예측하는 예언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통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보여주는 지침서이기도 합니다. 시험문제를 알려주고 평소에 이렇게 공부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험이 공부의 목적은 아니나 적어도 시험을 통해 중요한 것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시험에 나오는 것이 일반적으로 요점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최후의 심판에서 중시되는 것이 곧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중시해야 할 것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계시록 말고 다른 곳에서 그런 말씀은 많지만 계시록은 그것을 정리해준다고 하겠지요.
그 계시록에서 기도의 향이 전달되는 환상이 나온다는 것은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최후의 심판이 오더라도 우리의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확신 말입니다. 손선미 선교사는 그러한 환상을 자신도 보았노라 고백합니다. 천국에 50번 다녀온 아들 김진 전도사도 천국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계시록은 그저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지요.
이 말은 계시록이나 잘 공부하면 된다는 이단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말해 줍니다. 계시록은 우리의 현재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어야지 시험 때 쓰는 깜지처럼 그것만 공부하면 된다는 식으로 활용하면 안 될 것입니다. 제가 이단에 대하여 제법 배웠는데 그들이 계시록을 강조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종말론을 내세워 ”어서 들어와.. 안 그럼 넌 구원 못 받아. 지금 바로 들어와’라는’ 말로 사람들을 미혹시키려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은 시험공부가 아니라 평소에 진리를 갈고닦는 길고 긴 학습입니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는“ 공자 선생의 말처럼 우리는 ”믿고 때로 실천하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는“ 마음으로 신앙을 키워가면 시험이 오든 종말이 오든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계시록에서 기도의 향을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기도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교제는 인간관계의 핵심입니다. 교제 없이 관계가 깊어질 수는 없습니다. 핵심의 핵심은 바로 대화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귀신을 섬기는 자들도 향을 피워놓고 자신이 모시는 귀신을 불러들입니다. 우리는 향을 피우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향에 따라 움직이시는 유치한 신이 아니라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위대한 신이 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도 우리와 대화하고 교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속삭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분도 그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따르기를 바라십니다.
성경을 지식으로 완벽히 이해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제가 성경을 그저 읽기만 했을 때는 불평이 너무나 많이 쏟아졌습니다. ’ 뭐가 이리 황당하나 ‘라며.‘라며. 홍해가 갈라지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등등.. 하지만.. 기도생활에 본격 돌입하고 나서는 그런 것이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고요? 성령님이 저에게 그런 믿음을 주시니까요. 영의 시각에서 보게 되니까요. 게다가 기도응답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니 ’아 기적이란 실제 있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되니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죽은 사람이 살아는 것이 가능하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도가 믿음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믿음이 성장할 수 없지만 믿음이 없으면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교제를 하니 사랑이 깊어지지만 사랑이 없으면 교제가 깊어지기 어렵습니다. 봉사? 스킨십? 선물? 이런 것은 사랑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바람둥이 부자라면 사랑없어도 사랑이 많은 가난한 연인보다 선물을 훨씬 더 많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아시죠? 사기꾼도 봉사합니다. 그래서 인심을 얻어 돈을 갈취합니다. 하지만 진실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랑 때문이 아닐까요?
기도하면서 부끄러운 죄를 고백하고 내 소원을 빌고 이런 것이 믿음 없이 되겠습니까? 말씀을 읽거나 찬양을 하거나 전도를 하는 것은 믿음이 없거나 적어도 할 수 있습니다. 찬양의 경우를 봅시다. 일본에서는 미국의 가스펠이 꽤나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믿음으로 찬양을 부르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도 때론 흥에 겨워 찬양을 합니다. 믿음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 중에 얼마나 많은 것이 세상에서 회자됩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 “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한다 ““ 이런 말 웬만하면 다 알죠?
심지어 전도도 합니다. ”기독교 그거 괜찮으니 믿어봐 ““ 저는 불신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자신은 안 믿는 것뿐이죠.. 요즘 표현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자식들! 이쁜 건 알아가지고 “를“를 ”자식들! 기독교 좋은 것은 알아가지고 “라고“ 바꾸면 됩니다.
좋은 걸 안다고 믿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선물은 아무나 받을 수가 없겠지요. 그럼 누가 받을까요? 그걸 정확히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아직도 제가 왜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를 정확히 모릅니다. 누가 멀어보면”하나님이 주셨어요 “라는“ 대답할 수밖에 [[ 없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믿음에 대한 간절함인데 그 간절함이 왜 내게는 생겼고 친구에게는 안 생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너무 알려고 하지 마세요. 어차피 궁극적인 답은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들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열심히 기도하는 불신자! 상상이 갑니까? 기도는 가장 쉽지만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두 손을 모으기만 하면 되는데 믿음이 없으면 또는 떨어지면 두 손의 거리는 태평양보다 넓어집니다. 믿음이 약해질 때 제일 하기 싫은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이 연약해져 기도하기 싫어지면 찬양부터 합니다. 찬양은 믿음 없는 사람들도 좋아하니까 제일 쉽습니다. 게다가 음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저에게는 찬양이 믿음의 회복제입니다. 아침에 갖는 경건의 시간에 찬양에 너무 열을 올려 그만 기도와 말씀을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찬양이 그런 도구로 쓰이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것이 본질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필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때와 방법으로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향이 되어 모아진 후 하나님 앞에 드려집니다. 악한 기도 정욕적인 기도가 아니라면. 그러니 믿고 기도하십시오. 저 자신도 가끔은 기도를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것은 뭔가 의미가 있어 보이죠? 책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찬양도 부르다 보면 신이 나니 불신자들도 부릅니다. 하지만 기도는 뭔가 헛 짓거리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필자처럼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시면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만일 어느 교회에서 새벽기도에 와서 기도를 하면 매일 1010만 원씩을 준다고 합시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예배당이 만원이 되어 앉을자리도 없어서 결국 번호표라도 나눠줘야 할 것입니다. ’아니 그런 게 어딨어? 말이 되나!‘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 주님께서 새벽에 외치는 자들에게 10만 원만 주시겠습니까? 100만 원 1,000만 원도 주십니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니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 손해이지요. 기도는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권리를 마음껏 행사하여 물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풍요로움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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