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 ‘내 앞에 있는 사람’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 후서 3장 9절)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반전이었습니다. 미운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상대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남을 공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히 자신이 먼저 화가 나고 기분이 나쁘기 때문에 공격을 하지 않겠습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남을 괴롭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상대에 대한 불편한 마음 미움 또는 다른 이유로 인해 자신의 삶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풀기 위해 남을 괴롭혀 위로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입었거나 병이 들면 필요 이상으로 민감해집니다. 멀쩡한 살을 건드릴 때에 사람들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상처가 났거나 아프거나 특별히 그 부분이 민감하거나 할 때는 과잉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합니다. 자신이 마음의 상처가 심한 데 누군가가 그 그녀의 마음에 도전적인 말을 하거나 때리는 행위를 하면 아픔으로 인해 분노가 폭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상처 입은 영혼’의 울부짖음입니다.
예전에 가출청소년들과 함께 지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분노를 폭발시키고 남에게 각종 폭력을 휘두르며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남에 대한 배려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나만 좋으면 되고 행동의 기준이 자신의 이익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아이들이 천성적으로 악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때때로 제 품에서 울면서 하소연 할 때는 영락없이 순수한 사춘기 소년소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도대체 이 모순은 어디서 오는 거지?’라고. 그들에게는 두 가지 영혼이 들어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상처입은 영혼의 모습을 드러낸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 대부분(거의 전부)가해자이기도 하지만 피해자였습니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이 나이가 들어 사춘기가 되면 힘이 생기고 그래서 자신의 상처를 건드리는 사람에게 폭력적 언행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말을 하죠. “쌓인다 쌓여” 그들에게는 아무 일이 없어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로 늘 쌓여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건드리기만 해 봐라! 다 뒤질 줄 알아’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습니다.
김진홍 목사님의 자서전에서 술만 마시면 아내를 때리는 남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평소에는 공자님처럼 착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술만 마시면 천하에 둘도 없는 폭군이 되어 아내를 두들겨 팹니다. 도대체 왜 한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일까 목사님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왜 술만 마시면 폭군이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답은 역시나였습니다. 그는 어려서 의붓어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신데렐라 콩쥐가 그랬듯이 그도 의붓어머니의 학대를 견뎌야 했답니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두 얼굴을 가졌습니다. 자신의 자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남의 자식에 대한 미움으로 바뀌기 때문에 의붓어머니는 학대의 아이콘이 되기 쉽습니다. 아동학대를 하는 사람의 대다수가 친부모라고 하는 통계가 있지만 그것이 대부분의 아이들이 친부모 손에 자라기 때문이고 또 학대의 정도는 의붓 부모 특히 의붓어머니가 훨씬 강합니다. 정인이 사건 기억하시죠?
그것이 결국 그 사람의 폭력의 근본적 원인이었습니다. 술을 마시면 인간은 이성이 약화되어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드러납니다. 술 마시고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은 것은 평소에 바라던 욕망이 드러나기 때문이죠. 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의붓어머니에 대한 분노를 같은 여성인 아내에게 폭발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마음을 이해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미운 감정이 아내에게 표현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죠. 어머니는 곧 아버지의 아내이고 나의 아내는 아이들의 어머니 아닙니까? 그것이 연결되어 느껴지는 일이 종종 있거든요.
가출한 아이 중에 한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덩치도 좋고 키도 커서 학교에서 일진을 했습니다. 제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경찰서에서였습니다. 저는 가출 청소년을 불법으로 보호한 혐의로 조사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 때 그 소녀가 조사받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고 훗날 다시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하니까 자신도 저를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이상한 인연이었죠. 폭력과 갈취로 경찰서에 단골손님이 된 아이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우리와 친해지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감옥 간다”” 한 경찰관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맞는 말이죠. 경찰의 친구가 아닌 이상 친해진다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닙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린 피해자였습니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소녀는 아버지와 살게 되었습니다. 평소에는 너무나 좋은 분인데 술만 먹으면 그렇게 때렸다고 합니다. 한 번은 그 아이가 제게 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가고 싶다고 해서 같이 갔습니다. 간단히 차례를 올리고 나자 그 아이는 “아빠! 왜 그랬어요? 왜 이렇게 이쁜 딸을 그렇게 때렸어요”라고 하더군요. 이유를 묻자 그렇게 답을 했습니다.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이제까지 당당해 보이던 소녀가 초라하고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가해자의 뒤에 숨어 있는 피해자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날 그 아이는 제 품에 안겨 한참이나 울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지만 그 순간에 가해자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저를 괴롭힌 미움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들도 피해자였을지 몰라. 이 아이처럼’ 그렇게 생각하자 미운 마음이 사라지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폭력이 용인돼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가해자들을 바라보면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필자는 저와 같은 심정이었을지 모릅니다. 피해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다가 마침내 가해자들에 대한 염려와 기도를 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기분 좋고 행복한 마음으로 남을 괴롭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짜증나고 화나고 불쾌한 마음을 가질 때 그렇게 하는 것이죠. 반대로 화가 났더라도 좋은 일이 생기면 상대를 용서하게 되지 않습니까? 제가 상대한 가출청소년 중에 제대로 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은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누군가의 사랑을 제대로 받은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행동거지가 제법 바르게 나타나더군요. 역시 사랑은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별 것 아닌 걸로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는 사람 때문에 힘드십니까? 이유 없이 자신에게 공격을 가하는 사람 때문에 우울하십니까? 아마도 그들은 상처 입은 영혼의 소유자일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었고 지금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상처 입은 영혼이니 저에게 감싸주고 사랑해주라고 하십니다. 대신에 당신께서 저를 그렇게 사랑하여 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런 말씀에 제가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쌍하게 생각하니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 공격을 가하는 사람에게서 ‘상처 입은 영혼의 울부짖음’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나 힘들어’ ‘나 괴로워’ ‘나 슬퍼’ ‘나 사랑받고 싶어’ 이렇게.
오늘의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도 멸망시키지 않으시려고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비록 극악무도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천하보다 더 소중한 영혼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라나타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십시오)라고 찬송하고 기도하지만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오면 더 이상 영혼구원은 불가능하니 그 시기는 자꾸 미뤄지는 것일지 모릅니다. 구원의 역사가 끝나기를 기다리시며. 참으로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의 은혜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은혜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손선미 선교사님(인터넷한가족교회)이 하신 말씀 중에 “아버지께서 그들을 자식처럼 여기고 기도하라하십니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식이라면 목숨이라도 내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지옥에라도 대신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다고 선교사님은 말씀하셨고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때를 오게 하는 힘은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선교사님의 입을 통해 들려온. 저와 여러분이 그런 마음으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조차 품고 사랑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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